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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움트는 하나님 나라”

기사승인 2019.05.10  19: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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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쿠쉬의 「Above the World」

늘 같은 봄은 어찌 늘 새로울까?

아랫동네 벚꽃이 흐드러지면, 교회 앞은 막 피어나기 시작한다.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살면서 겪는 시차다. 아랫동네에 비가 내리면 눈이 내리고, 꽃이 지면 꽃이 핀다. 늘 지각한 꽃들로 봄을 만난다. 그래도 늘 처음처럼 새롭다. 해마다 봤던 그 꽃들이다. 고급스럽게 새로 포장한 꽃다발이 아니다. 허나 처음 보는 듯 감동적이다. 해아래 새것이 없지만, 해아래 설레지 않는 봄도 없다.

소비사회에서는 낯선 일이다. 새로운 디자인, 혁신적인 기술을 얼마나 강요하는가. 눈 깜박할 사이에 구닥다리가 돼버린다. 설교와 예배도 소비되기 시작한 탓일까? 더욱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설교와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찾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들은 힘겨운 숙제가 되었다. 사순절, 부활절을 어떻게 새롭게, 어떻게 더 감동적으로 연출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무덤덤한 쳇바퀴에서 얼마나 벗어나던가.

봄꽃은 지각해도, 똑같아도 어떻게 늘 새로울까? 예배와 설교, 절기들은 왜 그리도 쉽게 질리고 식상하게 느껴질까? 봄은 겨울을 통과해서 만난다. 추위에 얼어붙는 시절을 온몸으로 겪은 후에 만난다. 길고 긴 추위 속에서 봄을 기다리던 마음마저 지워질 때쯤에야 만난다. 그래서 봄은 당연하지가 않다. 그래서 봄은 식상하지 않고, 늘 새롭고 설렌다. 유명 쉐프가 없어도 허기가 산해진미를 만들어 주듯, 겨울이 봄을 새롭게 한다. 봄의 설렘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에 담긴다. 봄은 새로운 디자인이 아니라 겨울의 십자가로 인해 새롭다.

설교, 예배, 절기라고 다를까. 구경하고 소비하려 하는 한 결국 식상하고 지겨워질 수밖에 없다. 겨울을 통과하듯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절을 새로운 감격으로 만날 수 있다. 더 감동적인 예배 형식과 설교만으론 감정을 소비할 뿐이다. 감정의 소비는 쉬 익숙해지고 더 자극적인 것만을 향한다. 말씀에 굶주리면 설교와 예배는 절로 새로워진다. 말씀 외엔 길이 없을 때, 예배는 절로 살아난다. 겨울을 통과한 봄,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 영적 가난을 통과한 풍성함! 사순절은 소원성취의 기회가 아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봄이 잉태되는 고난의 겨울이다. 나 하나 살자고 죽은 척하는 절기여선 안 된다. 살리기 위해 죽는 겨울의 절기일 때, 부활의 감격은 피어난다. 단단하게 얼었다가 부드럽게 녹은 영혼의 옥토에서 피어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지만 십자가를 통과하면 새롭지 않은 생명이 없다.

겨울과 봄 사이에 갇힐 때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다. 겨울을 통과할 때, 봄이 늘 설레고, 십자가를 통과할 때, 부활이 충만한 기쁨이 된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겨울을 견디고 있지만, 봄이 지연된다면, 십자가를 지고 있는데, 부활이 늦어진다면 어떨까? 봄은 늦은 적이 아직 없다. 부활 역시 삼일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신앙의 실존 속에서도 그런가?

너무나 오래 동안 기도했는데, 응답이 요원할 때가 있다. 참고 또 참으며, 섬기고 또 섬겼는데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좋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 있다. 그렇게 겨울과 봄 사이에 갇혀버린 것만 같던 어느 날, 블라디미르 쿠쉬의 「Above the World」를 만났다.

▲ Vladimir Kush 「Above the World」(109×68.5cm)

한 사람이 커튼을 열고 있다. 커튼은 다름 아닌 나무껍질이다. 활짝 열린 나무껍질 사이, 저 너머에 붉게 물든 하늘과 산들이 펼쳐진다. 앞모습이 보이지 않고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감상하는 이들 대부분은 같은 이름을 떠올린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로에 있는 거대한 예수 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껍질뿐인 나무를 열어 그 너머에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준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작품의 의미를 생생하게 경험한 때는 늦겨울과 초봄 사이였다. 산중턱에 살면서 봄이 올 즈음이면, 숲으로 두릅을 따러간다. 메마른 낙엽들을 밟으며 가지만 남은 나목들 사이를 걷는다. 겨울과 봄 사이, 그 경계에서 숲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죽음과 생명 사이의 경계, 그 속에서 두릅나무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앙상한 나무들 중에서 가시가 잔뜩 돋은 나목을 찾으면 된다.

가시만 가득한 두릅나무를 발견하면 그 가지 끝을 살핀다. 높은 가지 끝에 여린 새순들을 따다가가 데쳐서 먹기 때문이다. 이제 막 돋아난 두릅 새순을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 식탁에서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경험했다. 뭉클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감정이 일어났다. 저리도 고운 연둣빛 새순들이 가시만 가득한 나무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린 것이다. 잔뜩 가시만 남아 죽은 것만 같은 앙상한 가지다. 그런데 그 속에 여리고 고운 생명이 깃들이 있었다. 저 고은 생명들을 지켜내려고 가시를 돋운 것만 같았다. 살아있었다. 겨울을 견디고 견디며 살아남았다. 겨우내 생명을 품고 살아남은 것이다.

▲ 「추풍령 숲 속 두릅나무」 ⓒ하태혁

처음에는 「Above the World」를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는 장면으로 봤다. 그러나 두릅나무의 새순을 만나고는 다르게 보였다. 가시뿐인 나무속에 생명이 깃들어 있듯이, 겨울 속에 깃든 봄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무덤 속에 부활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도 이미 깃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젖히는 커튼도 나목의 껍질로 보였다. 잎사귀도, 꽃도 심지어 가지조차 없는 나목, 그러나 주님께서 그 속을 열어 보여주신다. 죽지 않았음을, 그 속에 생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신다. 이 세계를 넘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죽음 같은 현실 속에 깃들어 있다, 메마른 나목 속에 이미 깃들어 있듯이. 겨울과 봄 사이에 갇힌 줄 알았지만, 그 사이에는 이미 봄이 함께 있었다. 아니 겨울의 한복판에서부터 함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곳인가, 오는 것인가?

신앙인들의 언어습관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보통 ‘가는 곳’이거나 ‘오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가는 완벽한 세상이다. 그래서 들어갈 수 있을지를 염려한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면 언제쯤 임할까를 궁금해 한다. 두 경우 다 지금 여기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 이미 있는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는 일상의 언어는 드물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어떤가?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누가복음 17:20,21/새번역)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미 있다고 말씀하신다. 톰 라이트는 이 문장을 “하나님 나라는 너희 손닿는 곳에 있다”로 번역한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296). 너희 ‘안에’ 보다 ‘가운데’ 혹은 ‘손닿는’이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있다. 개인의 내면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뜻이다. 만남과 관계와 행위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열어놓으려는 것이다.

어느 제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는 천국에서 스승과 다른 제자들이 기도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게 천국의 보상이란 말인가?” 그가 외쳤다. “아니, 저건 지상에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행하던 것과 똑같은 일이잖아!”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석은 자여! 저 기도자들이 천국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반대다. 천국이 저 기도자들 가운데 있느니라. 저 기도자들이 지금 천국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느냐? 그 반대다. 천국이 그들 행위 가운데 들어와 있느니라, 이미 지상에서부터.”(앤소니 드 멜로, 『일분 지혜』, 34 각색)

우리 가운데, 손닿을 만큼 가까운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있다. 이 가르침은 신앙인의 시선에 파격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십자가와 부활 사이, 겨울과 봄 사이, 그 어디쯤인가에 갇혀버린 것만 같을 때, 다른 어딘가를 기대한다. 언젠가 다가올 내일을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다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깃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실망스러운 그 사람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깃들어 있다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 단단하게 굳은 껍질을 열어 젖혀서 「Above the World」를 보여주신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와 돌무덤 속에 깃든 하나님 나라를 이미 보여주셨다. 겨울의 끝자락 가시만 잔뜩 돋은 가지 끝 연둣빛 두릅도 보여준다. 경계에 움트는 하나님 나라를. 두릅을 통해서도 속삭이신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손닿을 만큼 가까운 그곳에, 이미” 그 속삭임이 막힌 담에 부딪혀 메아리가 된다.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라. 바로 여기에서 누리고 나눠라.”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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