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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을 하면

기사승인 2019.04.24  18: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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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식적 종교의 종언(終焉)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금식을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죄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 여러분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제를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을 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여러분을 영접해 들어가면 그들이 대접하는 대로 먹고 그들 중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십시오. 결국 여러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제14절)

첫 부분은 제6절에 제자들이 금식, 기도, 구제에 대해 물어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에 해당된다. 그러나 바로 앞 절에 예수님이 도마를 따로 불러 말씀하신 세 가지 말씀이라는 것이 여기 금식, 기도, 구제에 관계되는 말씀이 아닌가 짐작할 수도 있다.  아무튼 금식, 기도, 구제, 이 세 가지는 유대교의 핵심적인 종교 행위였는데,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외형적 종교 형식을 배격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아 금식이나 기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제도화된 종교에서 형식적으로나 가식적으로나 기계적으로, 또 남보라고 하는 그런 관행으로서의 금식, 기도, 구제를 거부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 감추어진 나라, 하느님을 찾고 나를 찾아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엇이 모자라 다시 형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금식,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순종의 표시로 하는 구제 등이 필요하겠는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에 매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태, ‘죄 받고, 정죄 받고, 상한 영’의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그 상태로 되돌아가 있다는 뜻이라 보고 있다. 당당하게 율법주의적·형식적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 광야에서 금식하시는 예수 ⓒGetty Image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대도(大道)가 페하면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선다.”고 했다. 그렇게 되어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된다.”고 하였다(제18장).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금식이나 기도나 구제, 그리고 유교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인의(仁義) 같은 외형적 가치가 여전히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아직도 그 사회가 종교에서 이상으로 하고 있는 구경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이야기이다.

둘째 부분은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을마다 찾아가, 대접하는 대로 먹고, 병자를 고쳐주는 등 어떻게 활동했던가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대접하는 대로 먹어라.’는 것이다. 바로 앞 구절에서 금식, 기도, 구제 등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 종교를 청산하라는 파격적인 말과 함께, 여기 이 말은 더욱 구체적으로 성서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음식물 규례에 따라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는 유대인들의 결벽(潔癖)주의적 ‘정결제도(purity system)’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초기 불교에서도 불가에서 채식을 기본으로 했지만 무엇이나 주는 대로 먹는다는 것을 대 원칙으로 삼았다.

왜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가? 여기서 가장 큰 이유로 드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마음에서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더욱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삶에서 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먹는 것 이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가장 중요시되던 정결제도를 무시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예수님에게 중요하던 것은 얼마큼 깨끗하냐 하는 것보다 얼마큼 자비로운가 하는 것이었다.(미주 1)

유대교에서 말하는 음식 가려 먹기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건강에 좋은 음식, 적절한 음식을 가려먹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이 음식이 내 건강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보다도 이 음식이 내 건강에 좋은가 나쁜가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는 것이 건강에 더욱 나쁠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극단의 예를 들어 건강상 술을 마시면 안 될 사람이 술을 마시면 물론 술이 몸에 해롭겠지만, ‘이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과 죄책감과 좌절감 같은 것이 술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생물학적·영양학적 악영향 못지않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 중 몸무게가 나가는 것이 겁이나 음식을 기피하다가 음식을 아주 먹지 못하는 거식증(拒食症, anorexia)에 걸려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기까지 한다. 요즘 새로 생긴 조어로 orthorexia라는 것이 있다. ‘ortho’라는 것이 orthodox(正統), orthodontics(치아교정)에 보이는 것처럼 ‘바름(正)’을 뜻하는 것이니, ‘정식(正食症)’이라고 할까? 건강에 좋은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먹은 음식이 소화도 안 되고 잘못된 음식을 한 젓가락이라도 먹었으면 그것 때문에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종교적 계율에 어긋나 하늘나라에도 못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그러느라 결국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에 적용하는 말이다.

종교적 이유로든 건강상의 이유로든 먹을 것이나 못 먹을 것을 극단으로 따지는 사람과 식사를 해 보라. 밥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웃음도 나누고 해야 할 시간에 이것 먹으면 안 된다,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 이것이 좋다 뭐다 하는 잔소리나 건강 강의를 듣느라 그야말로 밥맛이 달아나고 밥 먹는 기쁨도 사라져 버린다.

이런 것이 유대교의 형식주의 신앙에서 강요하는 음식 가려먹기의 결과라면 그런 신앙은 우리의 육체적, 영적 건강을 해치는 일을 하는 셈이 아닌가.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 이런 것 이상임을 말하고 있다. 무엇이나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지어다.

이 14절에서 우리는 종교가 깊이를 더하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인습적이고 관행적인 것에 억매이지 않는 파격성, 뒤집어엎음, 우상타파(iconoclasm) 등의 특성을 나타낸다는 역사적 사실의 실례를 보게 된 셈이다. 공관복음서들에도 나오는 이야기(눅10:8-9, 막7:15, 마15:11)와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해진다.

미주

(미주 1) 이 ‘정결제도’에 대해서는 오강남 『예수는 없다』, 개정판 (현암사, 2017), pp. 269-275를 참조할 수 있다.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soft10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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