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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기사승인 2019.04.20  18: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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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랑의 80년대 초의 모습들

한국기독청년협의회는 내가 출소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출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회가 개최되었고 나는 전국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감옥에서 아주 튼튼한 몸으로 단련되어 나왔고 자유세상에 나가면 왕성하게 활동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못맡을 것도 없었다.

요동치고 있던 70년대 말

1979년은 우리나라 경제가 파탄나고 있었다. 1978년 말부터 식료품가격이 상승하면서 물가가 올라 서민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1979년 초에는 이란에서 팔레비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혁명정권이 들어섰다. 혁명정부는 우선 석유생산부터 줄이고 석유수출까지 금지하였다. 이에 석유값이 폭등하는 제2차 오일쇼크까지 겹쳐 수입원자재와 공산품까지도 가격이 올라 도산하는 공장들도 많이 생겼다.

4월13일에는 YH노동자들 5백여명이 회사 폐업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였다. YH사건은 초기부터 황주석씨(EYC초대회장. 그는 후에 YH노조지부장 최순영과 결혼하였다)와 서경석 선배(당시 EYC간사)가 열심히 도왔기 때문에  EYC도 일찍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  EYC도  YH농성장을 방문하였다. 나는 빈민쪽 활동만 했지 노동자농성장에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15에서 17세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성들 5백여명이 머리에 빨간띠를 동이고 노래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너무나도 강열하게 다가왔다. 저 어린 소녀들한테서도 저런 힘이 나오는데 그러면 젊은 남성노동자 사업장은 어떠할까? 군사독재를 끝장낼 힘도 나올 수 있겠다는 확신 같은 것이 왔다.

빈민활동에서는 예수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사랑이 많은 분, 위로자, 한없이 뒤에서 밀어주는 분등의 모습으로 보여졌는데 YH농성장 방문 이후로는 예수는 아버지로서의 해방자, 혁명가로 서서히 모습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YH노동자들은 공장기숙사에서 잘 수도 없게 되자 급기야는 김영삼 씨가 총재를 맡고있는 신민당사로 들어갔다. 김영삼 씨도 흔쾌히 받아들였고. 노동과 정치가 만나니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8월11일 경찰기동대 2천명이 투입되어 여성노동자들을 신민당사에서 끄집어 내었다. 그 와중에 김경숙 씨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횡주석과 서경석은 YH최순영 지부장과 노조간부 4명과 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사회선교협의회 문동환, 고려대 해직교수 이문영, 고은 시인 등과 함께 국가보위법,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이 불러온 파도

10월9일에는  군사독재는 허수아비인  공화당, 유정회 등을 동원하여 김영삼을 국회에서 의원제명 처분하였다. 2학기 들어서자 대학은 집회와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구호의 수위도 높아만 갔다.

▲ 서울 명동의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위장한 재야인사들의 집회 ⓒ자료사진

그러나  김영삼 제명이후로는 부산, 마산 시위는 달라졌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시민, 그리고 고등학생들까지도 참가하였다.  시위도 파출소등 공공건물까지도 파괴하는 과격행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정부는 부산만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경남의 마산·창원 주변까지 위수령을 선포하였다. 10월9일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수배를 발표하였다. 수괴가 북에서 파견된 간첩이라는 둥, 인공기앞에서 피로 서명하여 가입한다는 둥 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부발표가 이어졌다.

나와같이 농촌학습모임을 했었던 동지들, 민인기, 김기영, 임영빈 등도 줄줄이 잡혀들어갔다. 도대체 누구까지 연결되었고 누구까지 잡혀갈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와중에 의균이가 남민전 수배자, 이강형을 데리고 서울 구로구에 있는 우리집을 찾아왔다.

마침 우리 형님이 건축업주라서 집이 팔리기 전까지는 쓸 수 있는 빌라 건물이 있어서 임시로 독채 한채를 나혼자 쓰고 있었다. 그렇게해서 강이 형은 나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내가 ‘YWCA 위장결혼식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을 때였다. 한 보안사 조사요원이 나에게 찾아와 이강이가 너의 집에서 잡혔다고 알려주었다. YWCA주동자들이 숨어다니면서 모의를 할 때 우리 집에서도 한번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구의 입에서 발설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도 모임장소였다는 것이 들켜 버린 것이다. 아마도  보안사요원들이 무슨 볼 일이 있어 갔는지는 몰라도 찾아갔었던 모양이다. 나는 참으로 긴장되었다. 혹시 이들이 우리를 남민전하고 엮지는 않을까 불안하였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박정희가 살해당했다, 그런데 왜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고 대통령이 사망하자 세상은 정적이 감돌았다.  10월27일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비상계엄령이 발포되었다. 나는 사당동 판자촌에서 이 사실에 접했다.

멍멍했다. 긴가민가 했다. 그리고는 시내로 나왔다. 사람들 표정들을 유심히 봤다. EYC사무실에 들어갔다. 다들 말이 없었다. 아니, 독재자가 죽었는데 왜? 기쁨이 솟구쳐 올라오지 않을까? 우리가 이루어낸 결과도 아니고 도저히 예상치던 못한 사태가 갑자기 나타나서일까?

그렇게 멍한 사이동안 11월3일 국장은 숙연하게 치루어져 가고 있었다.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담화를 발표하면서부터 다시금 정국은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최 대행은 담화를 통해 유신헌법에  규정된 내용에 의거하여 빠른 시일내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한다고 하였다.

김영삼,김대중등 야권은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11월15일 EYC도 유신체제 청산과 민주정부수립을 담은 민주화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제 무언가 강력한 한방의 사건이 필요해지고 있었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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