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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삼보” - 老子三寶

기사승인 2019.04.15  19: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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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67

“천하에 모두가 말하기를 나의 도는 커서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본받을 만하지 않다고 한다. 대저 오로지 크므로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본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본받을 만했다면 오래전에 하찮게 되었으리라. 내게 三寶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모시고 길렀다. 하나는 사랑이라고 한다. 둘은 검소라고 한다. 셋은 감히 천하보다 먼저 행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랑하므로 능히 용감하고, 검소하므로 능히 넓어지고, 감히 천하보다 먼저 행하지 않으므로 능히 덕(器)을 기를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사랑을 버리면서 용감하기만 하려하고, 검소하지 않으면서 넓어지려고만 하고, 뒤에 서지 않으려 하면서 앞에 있으려 하니, 죽게 될 뿐이다. 대저 사랑으로써 전쟁에 나간즉 이기고, 지킨즉 단단해지리니, 장차 하늘도 그를(사랑하는 자) 구원하고 사랑으로써 그를(사랑하는 자) 보호하리라.”
- 노자, 『도덕경』, 67장
天下皆謂我道 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 久矣其細也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 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당시 세상 사람들은 노자의 도는 크기는 하나 옛 성인의 진리와 비슷하기는 하나 본받을 것이 없다고 비아냥거렸다. 노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도에 벼슬과 재물의 이익이 있었으면, 타락한 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노자는 삼보(三寶)를 모시고 길렀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이미 재물과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현실에서 누구도 본받지 않을 만하다.

노자의 삼보는 자애(慈)와 검소(儉), 그리고 천하보다 먼저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자애는 생명을 사랑하니, 용감하여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검소는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지 않고 호화로운 삶을 추구하지 않으니 널리 베풀 수 있는 것이다.

ⓒGetty Image

천하보다 앞서지 않는 것은 함부로 예나 법령을 만들어서 인민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자신의 세 가지 보배가 궁극적인 길임을 주장한다.

가여운 땅
흙의 마음 구하러 먼 길 떠나신 이여
그대 어린 빛의 농부여
다만 오늘을 위하여
오늘 하루를 다 쓰지 말고
아직 오시지 않은 님
깨끗한 사랑을 위하여
오늘을 소중히 모셔두게나

삶은 대자대비한 땅
홀로 찾아가는 외로운 농업
그믐달이 강물의 영혼을 더 푸르게 해주어
별빛이 먼길 인도하여 주시면
그대 근원을 향한 발걸음
아무데서 함부로 멈출 수 없으리니

흙의 착한 마음을 믿는 농부여
기다림이라는 님 길이라는 님
아직도 모시고 있다면
먼 길 그냥 더 가시게나
언제이고 어머니 뵙거든
흙님에게 강님에게 숲님에게 햇빛님에게 곡식님에게
나무호미 깎아드리고 무릎 꿇어 삼배 올리시게나
- 홍일선, “흙의 경전”

노자의 시대보다도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온 세상이 자본주의적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경쟁과 술수가 당연시 되고 있다. 모두가 대량생산의 노예가 되어 탐욕적으로 소비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이미 그러한 생활방식에 한계를 알고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어디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 돌아가려 하지만 선뜻 돌이킬 수 없다. 용기도 없고, 너무 익숙한 삶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노자를 읽을수록 이러한 마음은 점점 커진다.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고 하는 것도 그렇다.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지금 살면서 누리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선뜻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서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는 말에 마음이 많이 아프고 괴로워한다.

게다가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더 괴로울 것이다. “나는 아니지요?” 하는 물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가는 길을 계속해서 따라야 할지를 확신할 수 없는 나약한 태도이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괴로우면서도,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에 슬프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예수님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는 확신이 얼마나 있을까? 그 확신은 누구에 의해서 평가되기 이전에 먼저 나의 결단이고, 누구보다도 나의 마음이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니지요?’ 하는 물음은 나는 아니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입니다. 그 말 속에는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자기들끼리 다투었던 제자들이 배신자가 있다는 말에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결과가 예상되는 일에는 서로 하겠다고 다투면서도, 어렵고 힘든 길은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유대 지배자들에게 넘겨준 가룟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 차이나는 것은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탓하거나 핀잔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세 번의 수난예고를 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다툼으로써 예수님을 안타깝게 했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이 잡힐 때에 모두가 달아났고, 제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에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결정적인 문제나 논란거리가 있을 때에 먼저 나를 돌아봅시다. 내가 가는 길에, 내가 하는 일에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 길을 가면서, 그 일을 하면서 화려함과 영광스러움을 추구하지 않았는지 헤아려 봅시다. 그 길, 그 일이 어렵고 궂은 일일지라도 과연 내가 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험난한 길이 다가올 때에 발뺌하기 위해서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았는지를 성찰합시다.
‘나는 아니지요?’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맙시다. ‘나는 아니지요?’ 하면서 잘못을 전가하지 맙시다. ‘나는 아니지요?’ 하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지 맙시다. ‘나는 아니지요?’ 하면서 다른 동료를 핀잔하지 맙시다. ‘나는 아니지요?’ 하면서 따를 수 없음을 정당화 하지 맙시다. ‘나는 아니지요?’ 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감추려 하지 맙시다. 차라리 내가 확신하고 있다면 묵묵히 길을 가면서 일을 합시다. 차라리 ‘바로 나입니다.’ 하면서 잘못을 고백하고 되돌릴 수 있도록 회개합시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나는 아니지요?”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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