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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깨어 있어라.”

기사승인 2019.04.15  19: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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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36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38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40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41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42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43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44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6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26:36-46/새번역)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가 변화산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는 주님 앞에서는 잠들지 않았습니다. 두렵긴 했지만 초막 셋을 지어 그 산에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괴로워 죽을 지경인 주님 곁에서는 잠만 잡니다. 부활의 영광에는 침 흘리면서, 십자가의 고난에는 잠만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많은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대신 감당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괴로운 마음 곁을 지켜달라고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물어보시는 것만 같습니다. “너도 잠들어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 지금 다시 부탁하실 것만 같습니다. 억울한 고통에 처한 이들 곁에서 함께 깨어있어 달라고. 그들만큼 아파할 수야 없겠지만, 기억해주고 깨어서 곁을 지켜달라고.

그들 곁에서 깨어 있어주는 것이 이제라도 주님 곁에서 깨어 있어주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주님께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 한 맺힌 상처를 짊어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곁에서 깨어 있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 폴 고갱,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WikiCommons

그냥 부르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부르십니다. 죽음 앞에 당당했던 소크라테스나 여타 성인들과 다른 모습입니다. 불교에서 목표로 삼는 완벽한 열반(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도 멀어 보입니다.

무여열반에 든 아라한은 어떤 일에도 번뇌가 일지 않는다 합니다. 일체의 번뇌가 끊어진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이와 달리 주님께서는 괴로워 죽을 것만 같고, 그래서 잠만 자는 제자들에게 서운해 하시기도 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 그것이 어떤 흔들림도, 두려움도 없는 경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완전한 평안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의 모습을 더 사모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었기에 또한 너무나 신적일 수 있었던 참 사람을 사랑합니다.

엄청난 고행과 수행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두렵고 불안하신 마음자리에서 함께 출발하십니다. 그래서 따라가고픈 사랑이 용기를 내게 됩니다.

어떻게? 주님 따라 나아가려 합니다. 죽을 것 같이 괴로웠고, 그래서 잠만 자는 제자들이 서운했던 주님, 그렇게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님께서 길을 열어 가십니다. 우리에 앞서 한걸음씩 나아가십니다. 세 번 기도하십니다.

숫자 셋이기 보다 ‘충분히’로 다가옵니다. 괴로움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을 만큼 충분한 기도입니다. 우리처럼 흔들리셨지만, 기도로 길을 여십니다. 우리가 따라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기도로 길을 열자, 더 이상 서운하지 않으십니다. 자고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괴로워 죽을 것 같던 모습은 “일어나서 가자” 맞이하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잡혀 가신 것이 아닙니다. 맞이하신 순종이자 사랑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문제를 제거하는 능력으로만 너무 치우친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문제 속에 깃든 하나님의 뜻을 맞아들이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제거하고 해결해야만 한다는 아집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맞이하고 끌어안을 기회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기억해주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며 치유해나갈 기회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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