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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디에, 나는 어디에?”

기사승인 2019.04.12  19: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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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거 쾨더(Sieger Köder)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어떤 노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섬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은퇴 후 대도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이웃집 청년이 말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평생을 사셨으니, 정말 행복하셨겠습니다.” 노인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거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바라보면서 살았을 텐데, 불편하게만 느껴져서 빨리 대도시에서 편히 살고만 싶었네요.” 앤소니 드 멜로 신부는 이 이야기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는 없다. 단지 눈멀게 하는 학교를 멀리하기만 하면 된다.”(앤소니 드 멜로, 『개구리의 기도2』, 28)

노인은 대도시의 편안함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아름다운 섬을 만끽하지 못했다. 청년도 섬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느라, 대도시만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여길 떠나면, 문제가 해결되면, 그 사람만 바뀌면, 그것만 이뤄지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행복을 조건이라는 지평선 너머로 밀어내곤 한다. 하지만 놓치고 있다. 자신이 서있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자신의 발밑이 누군가가 동경한 그 지평선이라는 것을, 그곳이 바로 과거의 절박한 문제들이 해결된 자리라는 것을. 그래서 여기 아닌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보다 지금 여기를 새롭게는 보는 눈뜸이 절실하다.

믿음도, 예술도 지금 여기를 새롭게 보는 눈뜸이다. 예술은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만나도록 눈을 열어준다. 믿음도 그런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예술적이다. 골고다도, 십자가도 치욕이자, 패배로만 보였다. 하지만, 눈을 뜨니 사랑이요, 부활이었다. 내세의 하나님 나라만 기대하는 동경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뜸이다.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보는 눈뜸, 이보다 더 예술적인 개안이 또 있을까. 그래서 믿음과 예술은 서로를 통해 새로운 깊이에 눈을 뜰 수 있다.

예술로 표현된 믿음의 풍경, 그 새로운 깊이를 지거 쾨더 신부(Sieger Köder, 1925~2015)를 통해 맛보았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14처는 수없이 그려지고 조각되었다. 그 중에 같은 것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성화는 제목만으로도 예상되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떠올려 보자. 대부분 십자가에 누워있는 예수님, 손에 못을 박는 병정, 구경꾼 등을 예상한다. 지거 쾨더 신부의 11처는 다르다.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설명 없이 먼저 그림을 음미해보자.

▲ 지거 쾨더(Sieger Köder)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Getty Image

무엇이 보이는가? 처음 봤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뭘 그린 거지?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지?’ 예상했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는다. 못 박히는 주님의 손만 묘사한 작품들도 있지만, 여기에는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계시는지 알겠는가? 화면 안에는 예수님이 없다. 눈치 챘는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면서 바라보셨을 풍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시선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화면 전체에 계신다. 못을 박는 병사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계신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표현한 하나님의 이름, “없이 계시는 하나님”처럼 예수님도 없이 계신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다운 거칠고 투박한 질감과 강렬한 색채만으로도 신선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재, 예수님 바라보시는 풍경, 생각지도 못한 표현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통찰이 더 깊고 새로운 울림을 전해준다. 작가는 예수님과 함께 누워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한다. 묵직한 망치를 한껏 들어 올린 병정, 고통스러워 얼굴을 가린 사람, 비웃음을 흘리는 사람, 무심한 사람, 놀라는 황소에 하늘의 해까지 검게 타들어가고 있다. 그 모든 풍경을 주님과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작가는 구경하려고 온 감상자들을 구경꾼의 자리에서 끌어내고 있다. 안타까워하고 죄스러워하든, 무심한 호기심이든, 아니면 냉소적인 비웃음이든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 수가 없다. 구경꾼을 바라보는 자리, 주님의 자리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 사랑과 고통으로 세상을 직면하게 한다. 잔혹한 세상과 사람들을 마주하게 한다.

주님의 절절한 사랑, 주님의 처절한 아픔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의 면면을 가만히 살펴본다. 배신과 자책, 냉소와 폭력, 무관심과 호기심까지 각기 다른 표정들이다. 그 중 누군가에 대해서는 비판과 정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 하나는 자신의 얼굴과 닮지 않았을까? 지거 쾨더는 이 작품에 부제를 달았다. “Seek My Face.” 자신의 얼굴은 그 중 어떤 표정인가? 억울하게 죽어가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드리웠는가? 작가는 스스로에게 던진 이 성찰의 물음을 함께 나누고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의 어떤 표정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한 사람 한 사람을 용서하시는 시선이다. 그대로 이해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는 시선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23:34) 용서의 기도를 머금은 시선이다. 특히나 빛을 잃은 태양조차 받아들인다. 검게 물든 태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떠오르게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절규하신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 냉혹하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침묵도 받아들이신다. 그 침묵까지 사랑하신다. 그렇게 다 이루신다.

화면 가득 빈틈없이 스며있는 주님의 시선이 느껴지면,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골고다 해골의 곳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아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곳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등을 돌린 곳이자, 하나님조차 침묵하신 곳이다. 다시 아담에게 주신 질문으로 돌아간다. “어디에 있느냐?” 부조리와 폭력만 가득한 지옥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다. 이 세상 어디보다 주님의 사랑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옥처럼 보이던 곳이 하나님의 나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지옥이 천국으로 보이는 은총,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자칫하면 지옥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폭력의 세상 그대로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는 뜻이다. 주님 사랑 가득하니 그대로 충분하다고 볼 수가 없다. 사랑은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만, 그대로 머물게 하지는 않는다. 은총과 사랑은 안아주심이지만, 또한 부르심이기도 하다. 지옥 속에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시는 부르심도 분명해진다.

이 작품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과 사랑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희생자의 자리에서 가해자의 폭력성을 마주하게도 한다. 엘리 위젤의 회고록 『흑야』(Night)의 한 장면과 겹쳐온다. 엘리 위젤은 어린 소년으로 아우슈비츠를 겪었고, 그곳에서 양친과 어린 여동생이 죽어갔다. 그 가운데 잊지 못할 교수형 장면이 있다.

‘아기’라 불리는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이 다른 두 성인과 교수대에 선다. 올가미가 끼워지고 어른 둘은 “자유 만세!”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소년은 말이 없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묻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그분은 어디 있는가?” 수용소 소장이 신호하자 의자가 쓰러지고, 수용소 전체에 정적이 쫙 끼친다. 지평선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탈모!” 수용소 소장이 쉰 목소리로 외친다. 사람들은 울고 있다. 수많은 교수형을 보면서 메말랐던 눈물이 다시 솟아오른 것이다.

“착모!” 다시 행군이 시작된다. 두 어른은 이미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 소년은 몸이 너무 가벼워 쉬 죽지도 못한다. 몸이 꿈틀거린다. 30분이 넘도록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버둥거리며 서서히 죽어간다. 엘리 위젤 뒤에 있던 누군가가 다시 물음을 던진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바로 그때,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대답하는 어떤 음성이 들려온다.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에 있어. 여기 교수대 위에 목이 매달려 있어….” (엘리 위젤 저, 『흑야』 허종열 역, 가톨릭출판사, 1992년, 96~99)

“어디에 있느냐?” 아담에게 던진 하나님의 물음이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도 주어졌다. 살해당한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를 원하신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대답하기보다 변명하거나 반문한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부조리한 폭력과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디에서 뭐하시냐고 묻는다. 신정론,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의로움에 반문한다.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 흘러오는 난제 중에 난제다.

엘리 위젤이 내면 깊은 곳에서 마주친 대답은 신정론을 뒤집는다.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에 있어. 여기 교수대 위에 목이 매달려 있어….” 억울하게 죽어가는 생명 속에서 죽어가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이 대답할 차례다.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함께 죽어가고 있는데, 너는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께 던진 질문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 부딪혀 되돌아온다. “너는/너희는 어디에 있느냐?” 신정론이 인정론으로 뒤집힌다.

지거 쾨더 신부의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심」도 피해자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자리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이들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살해당한 이들의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주님의 절대적 사랑을 엿본다. 그러나 동시에 억울하게 죽어가고, 의를 위해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도 만난다. 방관하거나 주저하거나 외면했던 자리, 협조하거나 가담하거나 부추겼던 자리, 그곳에 서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바라본다. 죽어가는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신음소리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디에 있는 거지? 무엇을 하고 있던 걸까?”

이제 곧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수없이 반복해온 또 한 번의 고난주간이라면, 부활주일 역시 다를 것 없는 절기로 그칠 것이다. 삶은 계란이 구운 계란이 되는 정도의 차이, 그것으로는 새롭게 태어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물음에 직면해 본다. 가해자의 자리에 서있는 자신에게 피해자의 마음으로 물어본다. 구경하던 자신에게 주님 십자가에 달린 사랑으로 물어본다. “어디에 있는 것이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러고 보니 예수님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 속에 있던 가롯 유다에게도 물어보셨다.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마태복음 26:49a)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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