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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과 지혜로움”

기사승인 2019.04.01  19: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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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65

“(그러므로) 옛적에 도를 잘 행하는 자는 백성을 밝게 하지 않고 어리석게 하고자 하였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지혜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럼으로써 나라를 지혜로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적이고, 나라를 지혜로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이다. 이 둘을 아는 자는 역시 법식을 상고하니, 항상 법식을 상고하는 것을 일컬어 현덕이라고 한다. 현덕은 깊구나! 멀구나! 물정과는 반대로구나! 그런 이후에 큰 따름(순조로움)에 이르게 된다.”
- 노자, 『도덕경』, 65장
(故)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亦稽式, 常知稽式, 是謂玄德, 玄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이든지 알지 않고 살 수 없다. 지식이 있어야 살 수 있고, 지혜가 있어야 함께 살 수 있다. 그런데 노자는 도(道)를 제대로 펼치는 사람은 백성을 어리석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에 어리석음은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잘 이해할 때에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천하를 지배하려는 임금들은 부국강병의 지식을 구하였고, 그러한 지식을 갖춘 자들을 벼슬에 등용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너도나도 경쟁하면서 지식을 습득하려했다. 그 지식은 함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싸워서 이기고 큰 나라를 만들기 위한 지식이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지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인민의 원한이 높아지고 깊어지기 때문에 노자는 그러한 지식은 나라의 적이라고 하였다.

▲ 권력과 지식인들로부터 기민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Getty Image

어리석음과 지혜의 차이는 아는 것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의 목적에 있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을 현덕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세상 물정은 점점 더 현덕과 멀어지기만 한다. 노자는 이러한 세태를 한탄한다. 현덕이 멀어지고 깊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순조로움을 벗어나서 혼란과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지금의 역사는 그 멀어짐의 연속선상에 있다.

세상은 나를 어리석다 욕하지만
나는 세상에 지혜 많은 것을 탄식한다.
지혜로운 자들은 어찌 그리 간교한고?
간교한 자들은 어찌 그리 속이는가?
지혜로운 자들은 귀하게 떠받들리고
어리석은 자는 천하게 버림받지만
천하게 버림받음을 오히려 달게 받고
귀하게 드러나는 것을 꾀하지 않노라.
내 어리석음을 스스로 아노니
義에 죽는 자, 그 무엇에 像하리?
- 심산 김창숙

춘주전국시대에 활동했던 제자백가들의 사상은 그들의 지혜를 자랑하거나 깊은 철학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군웅할거의 시대에 나라를 더 크게 확장하고 인민을 통치하고 다스리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다스림의 목적이 때로는 인민을 위한 것일 때에도 더러 있었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소수의 권력과 부를 위해 인민을 통치하려고 하였다. 그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배자를 전제군주나 독재자라고 한다. 그들은 인민을 교묘하게 속이면서 통치하거나 무력으로 억압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나치독일의 선전상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은 정부 소유의 피아노다. 나에게 한 음절만 달라 그 누구든 영웅으로 만들 수 있고 범죄자로도 만들 수 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아무리 SNS가 보편화된 오늘에도 여전히 거짓에 속는 사람들이 많고, 정보의 홍수라고 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권력자에게 휘둘리는 사람들은 많다.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려는 것은 “기만의 그물망”(Web of Deceit)을 짜고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기만의 그물망은 언론과 방송이 권력과 자본의 지휘 아래 놓였을 때 가능해진다. 권력과 자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미디어는 그들의 선전선동의 매체가 될 뿐이다. 이것이 노자의 탄식이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지식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는 없다. 다만 그 지혜와 지혜의 목적과 지향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로 일컬어지는 유대의 지배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 궁리를 합니다. 그들은 무리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리가 강하게 저항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두려움의 원인 제공자인 예수님을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거하려 합니다. 속임수를 써서라도 제거해야 합니다. 속임수(기만; 欺瞞)는 지배자들이 백성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지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이에 대응해서 백성들이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방법은 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히 새로운 탈출(해방)을 안겨다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해방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한 것처럼 지배자들은 그들의 욕심을 위해서 계속적인 희생양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지배자들이 희생을 요구할수록 민중은 그 요구를 새로운 세상을 향한 몸부림과 울부짖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분명한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예언자들과 예수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러한 희생은 새로운 출발의 바탕이요, 밑거름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지배자의 속임수와 민중의 부르짖음”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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