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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이 살해한 것은 신이었다

기사승인 2019.03.24  17: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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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주의 시대 신(神)의 자리-베른하르트 벨테의 종교경험에 대하여(2)

우리의 일상은 기술과 과학에 의해 철두철미 통제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노트북에 의존하고 있으며 추위를 아내려고 온열기를 틀어놓고 책을 읽기 위해 탁상 전등을 켜놓고 있다. 수시로 전화로 외부와 연락하며 필요에 대기하고 있다.

‘있음’에만 관심을 가진 시대의 폐해

이러한 기술적 문명의 편의를 우리는 과학에 힘입고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니 이제는 과학에 우리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몽땅 맡겨야 할 판국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를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과학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생활세계는 철저히 과학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다.

그런데 과학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학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한다.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존재자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존재자일 뿐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아니다.”(1)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자가 아닌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이냐고. 여기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존재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일 테니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말도 할 수 없고 경험도 할 수 없을 것 아닌가. 그러니 엄밀함과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이 ‘존재하는 것’만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고 과학에 걸맞는 태도이다.

과학이 살해한 것은 신

그렇다면 방금 앞에서 쉽게 얘기한 “있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즉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는가? 무슨 황당한 질문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있음과 없음을 구별 못할 무식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오히려 화를 낼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먹고 즐기고 하는 그것들은 다 존재하는 것 아니냐고.

▲ 공 혹은 무를 형상화한 작품 ⓒGetty Image

그렇다면 존재의 기준은 내가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원자는, 전자는, 뉴트론은 없는 것인가? 수는? 생각은? 고민은? 역사는? 문화는?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더 나아가 “신”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흔히 당연한 것으로, 누구나 다 아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있음”의 기준은 전혀 자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어떤 “있음”의 기준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기준마저도 과학에게 떠넘기고 과학이 결정하는 대로,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 한다. 그렇지만 과학은 그것을 결정할 자격도 권한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결정사항을 전혀 권한과 능력이 없는 과학에게 맡기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는 이렇게 있음의 기준을 정하고 없음을 그 있음의 울타리에서 몰아내고 경험과 서술의 테두리 밖으로 쫓아낸 ‘없음을 없앤’ “무 제거의 역사”였다. 없는 것은 이미 없는 것인데 그 없는 것을 어떻게 또 없애느냐고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 제거의 역사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신”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것이 몹시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과학적인 사유방식과 생활태도에 의해 일상세계에서 점차로 쫓겨난 신을 니체는 “신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없음’을 없다고 한 시대에 남아 있는 것

현대는 존재하는 것에만 파묻혀 무를 망각한 현대인들이 ‘무의 망령’에 의해 시달리는 시대이다. 백 년 전 니체는 현대의 이와 같은 상황을 예언하였다. 그 때 그는 앞으로 2백년 동안 허무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그리고 세계를 덮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존재자에만 매달려 모든 것을 존재자에 건 현대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도대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끝없는 무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더더욱 보이는 쾌락 사냥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없음”이 단순한 아무것도 없음도 아니고 우리의 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무차별한 무기력한 없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그 모든 존재자와의 관계맺음이 다 없음의 바탕 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바로 우리가 이 없음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니체 이후 철학자들은 서서히 무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하이데거는 무를 ‘존재의 너울’이라고 이름하고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라고 명명하면서 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의 마당을 열었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벨테는 스승의 이러한 사상을 한 단계 더욱 발전시켜 인간의 ‘무의 경험’을 거꾸로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발받침대로 삼는다.

다음 글에서는 벨테의 이러한 사유의 단계를 차근차근 뒤밟아 보기로 하자.

미주

(미주 1) 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5, 65.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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