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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약함과 낮아짐에서(전 9:11-18; 고후 11:19-30; 마 23:1-12)

기사승인 2019.03.21  19: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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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셋째 주일(3월24일)

1. 떠돌이로 살다, 떠돌아 간 문동환 목사

지난 2019년 3월 9일 문동환 목사님께서 향년 98세로 별세하셨습니다. 우리 기장 교단의 큰 어른 한 분이 또 다시 하나님 나라로 간 것입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민족주의 운동과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명동촌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서부터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과 기독교 목사로서의 삶에 뜻을 두었습니다.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서울의 수도 교회에서, 또 갈릴리 교회 공동 목회도 하셨습니다. 뜻이 맞는 청년들과 함께 ‘새벽의 집’을 열어 생명문화를 일구기 위한 나눔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해직과 감옥 생활을 통해, 민중의 실체에 대해 통찰하면서 민중신학에 입각한 민중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신대 정년 퇴임 후에는 재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던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역임했고,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정치 활동을 접은 1991년 이래로, 미국에 살면서 성서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특히, 고향에서 밀려나 저임금 노예로 팔려가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런 비참한 삶의 구조적 원인인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88세 때 쓰신 자신의 『자서전』 (삼인, 200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퇴한 뒤 나는 아내를 따라 미국에 왔다. 수채화나 도자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좀 여유 있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휴지 조각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온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참사가 완전히 나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도처에서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의 악랄한 횡포가 나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했다.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고향에서 쫓겨나 세계 곳곳에서 유리방황하는 떠돌이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주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족을 보면서 아파하던 기억을 지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혔다. 박정희 독재 밑에서 신음하던 민중을 보면서 분노하던 기억을 지닌 내 마음에 다시 불을 질렀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20세기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암담함을 느꼈다. 앞으로 닥칠 21세기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은퇴한 후에도 여생을 즐기지 못하고, 시대의 암담함에 분노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달았던 목사님은 자신의 신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런 암담한 심정으로 고민하는 나에게 성서는 또다시 새로운 불꽃을 던져주었다. 하느님은 이런 암흑의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고향에서 밀려난 떠돌이들을 부르셨다. 한국에서는 그들을 ‘민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민중 대부분은 아직도 현재의 제도 안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현재의 제도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떠돌이들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떠돌이 신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떠돌이로 살다, 떠돌이와 연대하다, 하늘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문동환 목사님의 생은 말 그대로 약한자들과의 연대이며 낮아짐을 통한 겸손의 결정체였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약함과 낮아짐에 관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참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죄인 한 사람과 참 지혜자: 바벨탑과 떠돌이

구약의 말씀은 참 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인 전도서는 지혜문학이죠? 따라서 잠언, 전도서, 욥기가 지혜문학에 해당됩니다. 지혜문학은 구두전승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준 왕조시대 이전의 ‘부족지혜’, 솔로몬 시대 엘리트 교육으로 정부 관리를 양성하는 ‘궁중지혜’, 왕조쇠퇴 이후 율법과 지혜의 동격화, 및 지혜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신학적 지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우주적인 질서와 조화롭게 사는 삶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인 전도서는 세상의 쾌락, 노동, 부귀, 지혜 등을 모두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된 지혜를 찾지 못하는 인간 삶의 허무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본문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 9:11-12)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은 인생에, 재앙의 날이 임할 것이니, 참 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한 예를 들려줍니다.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전 9:13-15)

위험에 처한 성읍을 구원한 참지혜자를 알아보지 못한, 곧, 참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인생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왜 그럴까요? 죄인 한 사람 때문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one sinner)’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 9:16-18)

참 지혜는 선을 이룰 것이지만, 죄인 한 사람이 선을 무너지게 하고, 지혜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문동환 목사님이 93세 때 쓴 책 『바벨탑과 떠돌이』 (삼인, 2012)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과 죄인의 길을 걷는 삶을, ‘떠돌이’와 ‘바벨탑’의 은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놀랍지만 핵심을 찌르는 통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 인물들을 바벨탑을 추구하는 인물과 떠돌이의 삶을 살았던 인물로 구분합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다윗과 바울은 역적이다. 바벨탑의 삶이었다. 다윗은 왕정 체제라는 바벨탑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다. 바울과 베드로도 ‘메시아 왕국 대망론’이라는 잘못된 신학을 만들었다. 그들은 대단한 이단이다. 칼빈과 루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종교 제국을 만들었다. 교회를 착각하게 했다. 그리고 예수의 재림으로, 마지막 날 세상을 청소해 버린다는 것은 ‘힘의 철학’이다.”

 

간단하지만, 핵심을 포착하는 경륜입니다. 그 경륜이 들어간 ‘바벨탑과 떠돌이’는 창세기에서 시작해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 등의 구약성서 인물들과 바울과 베드로, 예수님의 삶에 비춰 ‘바벨탑의 삶’과 ‘떠돌이의 삶’에 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떠돌이는 “사회 질서에 수난당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 순례자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역사를 운영하시는 하느님은 각 시대마다 ‘힘의 철학’으로 바벨탑을 쌓으려는 악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떠돌이’를 전위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바벨탑에서 탈출하여 생명 공동체를 이룩한 사건이 바로 새로운 세상을 창출한 원형인 것입니다.

기존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이 체제 내적이고, 다소 정적인 성격이었다면, 문목사님의 떠돌이 개념은 보다 급진적이고, 체제 자체에 대해 저항적이며, 탈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기존의 민중이 단지 가진 자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면, 떠돌이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골짜기 자체를 메우고 새로운 동산을 건설합니다. 따라서 문동환 목사님의 ‘떠돌이신학’은 민중신학의 발전적 계승이자, 심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3500만 원이며, 4인 가족 기준으로 1억 4,000만 원입니다. 인구가 5000만 명이 넘는 국가 중에서 일곱 번째로 3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합니다만, 소득불평등으로 인해 체감되지 않습니다)에 떠돌이, 즉 억압받고,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멸시당하고, 힘겨운 삶을 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느님이 진정 역사 진보와 변혁의 맹아로 인정한 이들입니다. 이러한 떠돌이들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기득권자들의 권력을 단지 승계하거나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떠돌이들의 탈주로부터 오늘날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 곧 새로운 생명공동체, 평화공동체를 꿈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이기고, 새로운 꿈을 만들었던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눔’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만든 것은 ‘나눔의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문목사님의 말을 들어볼까요? “떠돌이로서 짓밟히고 아파하는 사람을 하느님이 함께 아파하고, 그 사람이 계속 질문을 던지다가 결국 새로워진다. 그 사람을 통해 세상 또한 새로워진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예수님이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문동환 목사님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아파하고 아파하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파하고 끝없이 묻고 회개하며 떠돌이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명공동체, 평화공동체를 요청하고, 힘껏 싸우라는 것입니다. 문동환 목사님의 말입니다.

“이제 새로운 출애굽 사건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3,000여 년 전에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출애굽 사건이 재생되어야 한다. 2,000년 전에 갈릴리에서 일어나 지중해 연변에 확산되었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재현되어야 한다. 거대 도시들을 조성한 오늘의 바벨탑에서 탈출하여, 다시 가나안 복지인 갈릴리로 가야 한다. 더불어 생산하여 나누는 농촌으로 가야 한다. 서로 이웃사촌이 되어, 나누고 도우면서 사는 생명공동체를 이룩해야 한다.”

3. 약한 자와의 연대

따라서 참 지혜는 ‘약한 자’와의 연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잘 말해주었습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29-30).” 사순절 첫째주일 ‘금식(禁食)의 죄?’에서 말씀드렸듯이, 고린도 후서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인 1-9장을 ‘화해의 편지’, 10-13장을 ‘눈물의 편지’로 나눕니다. 따라서 고린도 후서를 읽을 때는 뒷부분 10장부터 읽고, 다시 1장부터 9장을 읽으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럼, 왜 눈물이고 화해입니까? 싸움이 났으니 눈물이고, 다시 오해가 풀렸으니 화해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왜 싸움이 났을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가짜 사도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등등 가짜 뉴스를 퍼 날랐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짜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악평을 하고 이간질을 하니,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 가짜 뉴스의 근원지는 누구입니까?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유대교 교사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유대교 전통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제자인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마침내 디도가 돌아와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오해를 풀고, 회개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따라서 기뻐하며 써내려간 편지가 1-9장의 ‘화해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눈물의 편지(10-13장)’를 통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오해했던 부분들을 해명합니다. 개인적인 ‘신비체험(고후 12:1-4)’까지 언급한다는 것은 바울이 화가 많이 났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본문인 11장은 눈물의 편지입니다. 바울의 울컥한 심정이 오늘 본문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거짓 유대교 교사들은 용납하고, 참 사도인 자신을 왜 그리 믿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19-20).”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지혜를 소유한 고린도 교인들이 바벨탑의 가치를 지닌 거짓 선생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바울의 서글픈 심정을 계속해서 들어볼까요?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후 11:21).” 말이 참 어렵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정확합니다. 19절부터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그렇게도 잘 받아주니, 여러분은 어지간히도 똑똑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삼아도 그만, 잡아먹어도 그만, 착취해도 그만, 깔보아도 그만, 뺨을 쳐도 그만, 여러분은 그저 참아주기만 하니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무 약해서 그런 짓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무슨 자랑을 한다면 나도 그와 똑같은 자랑을 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물론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치고 하는 말입니다.”(고후 11:19-21)

거짓 선생들이 거짓 자랑을 늘어놓고, 바울을 비판하고, 그릇된 말씀을 전했는데, 당신들이 그 말을 참도 잘 믿었다! 그러나 봐라! 내가 이런 사람이다. 자랑할게 많다. 뭐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바울의 자랑을 들어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고후 11:22-27)

짠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바울의 이 모든 일은 복음 사역, 곧 약한 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당한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를 위한 염려입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고후 11:28).” 그렇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바울의 고민입니다. 약한자들과의 연대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거짓 교사들은 시기하고, 분열을 일삼지만,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은 약한자와 연대한다는 것입니다.

문동환 목사님이 97세 때 쓴 책, 『두레방 여인들: 기지촌 여인들과 치유와 회복의 시간, 두레방 신학』 (삼인, 2017)은 바울과 같이 약한 자와의 연대를 잘 보여줍니다. 두레방은 문목사님의 부인인 문혜림(Harriett Faye Moon) 사모가 1986년 의정부에서 미국 연합장로교의 협력을 받아 한국신학대학 졸업생 유영님과 함께 미군에게 몸을 파는 불행한 한국 여성을 돕기 위해 설립한 민간단체입니다. 설립 이후 줄곧 성매매 문제들, 군사주의로 인한 폐해들, 특히 기지촌(基地村, 주한미군이 주둔한 기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서비스업 위주의 군사취락) 성산업에 유입된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양공주’, 심하게는 ‘양갈보’라는 모멸적인 별칭으로 불리는 이 땅의 여인들의 이야기에, 그 어떤 신학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대부분 가난한 이 땅의 농촌에서 태어나, 한 편으로는 구로공단 등에서 산업전사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몸뚱어리를 혹사하거나 아니면 그럴 사정도 되지 않아, 기지촌에서 몸을 파는 여성이 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감히 어떻게 ‘~신학’이라는 관념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문동환 목사님은 두레방 여인들을 ‘현대의 사마리아 여인’에 비유하며 성서적인 근거를 찾습니다. 우물가에서 메시아를 발견한 것이 기뻐 동네 사람들에게 뛰어가, 메시아의 존재를 알린 그 순박한 사마리아 여인 말입니다.

▲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사진 위)과 “사마리아 여인”(사진 아래)

사회문화적인 시선으로 기지촌 여성들을 설명하고 이들을 돕는 활동의 근거를 기독교 교리로 증빙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전하는 이러한 두레방 여인들의 솔직한 삶의 기록을 읽다 보면 그들이 바로 오늘의 성경 속, ‘하비루(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족의 기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의 말입니다.

“억눌렸던 하비루들이 이집트 폭정을 박차고 탈출하여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오늘의 하비루인 두레방 여인들이 인류의 새 내일을 여는 역사적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 하느님은 억눌리고 수탈당하는 약자와 더불어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셨다는 성서의 증언이 그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11장에 있는 이른바 원 역사에서 갈릴리 청년 예수에게 이르기까지 히브리 민중의 도도한 생명사랑에서 우리는 인류의 희망을 본다.”

4. 낮아짐의 연대

오늘 신약 본문 말씀은 또 다른 연대인 ‘낮아짐’의 연대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1-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모습을 본받지 말고, 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낮아짐의 연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섬기는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수직적 계층을 만들어 계급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8-12)

『아리랑 고개의 교육』 (한국신학연구소, 1985)은 문동환 목사님의 낮아짐의 연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목사님은 한국 민중이 이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가슴에 품어야했던 한(恨)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이란 삶을 짓밟는 악한 세력을 향한 영혼의 꺼질 줄 모르는 분노의 불길이요, 못다 산 삶에 대한 끊을 수 없는 미련의 줄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달라는 영원한 호소라고 말하고 싶다.”

민중교육자로 민중교육의 목적도 이렇게 말합니다. “민중교육의 목적이란 민중과 더불어 그의 뜻이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고 오늘도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민중으로 하여금 새 역사 창조 대업에 주체가 되도록 협조하는 일이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민중 신학을 하려면 한 맺힌 무리들의 후예로 태어나서 그 한을 호흡하면서 살아야 한다.”라는 문동환 목사님의 고백은 민중의 한을 추구하는 신학자로서, 그 자신이 한 맺힌 자가 되어야 하고, 그 자신의 삶이 한풀이의 삶이 되어야 하고, 그 자신이 한을 풀어 새날을 이루어야 하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문동환 목사님의 민중교육의 목표는 민중을 ‘버림받은 자들이 아니라, 서로를 위로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새날을 꿈꾸고 창조해 나가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恨)에 대한, 끊을 ‘단(斷)’을 통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마침내 민중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역사, 새날을 창조하고자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문동환 목사님은 민중의 부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맺힌 무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영에 사로잡힌 무당(메시아)의 희생적인 도움으로 한을 풀고 그를 중심한 새 공동체에서 새로운 삶을 즐기게 될 뿐 아니라, 다시 한풀이 전사가 되어서 세상을 향하여 나가게 된다. 작은 신들린 자가 되어(메시아가 되어) 악령 추방의 길에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중의 부활이다.”

5. 약함과 낮아짐의 연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단의 큰 어른을 잃었지만, 그분이 남겨준 책과 글, 살아생전 선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고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가로서, 신학자로서, 민중운동가와 정치가로서 다양한 삶의 여정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 문동환 목사님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그때까지 바벨탑의 가치가 아니라, 떠돌이의 가치, 참 지혜의 가치인 약함과 낮아짐의 연대를 통해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살아내며,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마지막 부활의 아침에 함께 만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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