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한반도 대전환기에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을 말하다

기사승인 2019.03.19  20:57:05

공유
default_news_ad1

- 황종렬의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를 중심하여

본 글은 위 책을 토대로 자유롭게 풀어 썼다. 단순 요약정리가 아님을 밝힌다. - 저자 주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드리운 이 때 안중근이 주창한 ‘동양 평화론’을 재론하는 것이 무척이나 의미 깊다. 비록 당시는 오해도 많았고 터무니없다고 홀대, 비판되었으나 그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시점에서 재평가되어야 옳다. 이 땅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3.1 선언이 발표된 지 꼭 100년의 지난 시점에서 안중근의 꿈은 다시 생각할 주제가 된 것이다.

주변 강대국에 주권을 유린당했으나 지금 문재인 정권은 주체의식을 갖고 분단체제를 허물고 주변국들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세계평화의 장(場)으로 재건코자 하는바, 안중근의 뜻이 조금은 가시화될 듯싶어 마음 설레며 급변하는 정세를 지켜본다. 주지하듯 안중근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기독교에 입문했으나 이 민족을 하대(下待)하는 선교사들에 저항했다. 동시에 수구적 민족주의와는 뜻을 합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구 열방의 침략에 직면하여 동양에 속한 일본의 역할을 나름 선한 마음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일본 역시 서구를 쫓아 아시아 침략전쟁의 하수인된 것을 보고 큰 좌절 끝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데 그 일로 당시 가톨릭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했고 일본에 의해 귀순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다행히도 10여 년 전 故人 된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복권 되었고 그의 ‘동양 평화론’ 역시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본고는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 황종렬의 책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1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의 본뜻을 찾기 위해서 당시 일본에 의해 강요된 식민지 열등사관의 폐해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 땅을 점령한 일본은 우선적으로 이 민족의 역사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과거 찬란한 역사를 무가치하게 만들었고 일본의 영향사(史)를 과하게 주입시켰다. 광개토왕 비문이 지워졌고 민족의 정신이 담긴 『천부경』 등의 책들을 폐기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열등사관을 통해 이 민족을 일본에 복종시켜 황국(皇國)시민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정황에서 저항적 민족주의 의식 역시 자연스럽게 발현되었다. 열등사관에 반한 영웅사관이 등장한 것이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가 대표적이 경우라 할 것이다.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의 역사로 본 그는 非我에 의해 我의 주체성이 소멸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광개토왕, 강감찬, 그리고 신라의 화랑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호령했고 국가를 지켜냈던 역사 속 위인들을 전면에 내새워 억눌린 민중,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다.

이에 더해 침략자들에 대한 투쟁의식을 강요할 목적도 있었다. 그의 책 『조선 상고사』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힌 명저로 지금껏 칭송된다. 하지만 이후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밝혔듯이 나라를 빼앗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영웅사관으로 식민지 현실을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 전체를 非我로 적대시 하고 투쟁을 요청하는 민족사관은 평화주의를 선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현실을 달리 보는 시각이 필요했다. 이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을 만나게 했던 안중근의 열려진 관점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신채호와 동시대에 태어났고 함께 귀순 감옥에서 처형당했으나 대종교에 몰입한 신채호와 기독교 신앙을 통해 서구와 소통한 안중근 간의 차이는 컸다.

즉 非我인 기독교를 수용했고 그 시각에서 민족을 보았기에 시대와 조우하는 방식에 있어 상호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안중근의 일본이해가 옳았는지에 대한 토론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뤼순 감옥에서 구상한 그의 ‘동양 평화론’은 유럽 통합론과도 견줄 수 있는 미래적 착상이었다.

2

본래 안중근 가문은 천주교가 이 땅에 유입되던 시절, 그 세력에 편승할 목적으로 가톨릭교도가 되었으나 점차 천주교와 민족을 공동 운명체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부언하자면 천주교의 도움으로 한국독립과 동양평화를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면 이토 히로부미 암살 시도에 대한 이해가 해명되어야 할 것인바 그것은 일본에 대한 전후 인식 차(差)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추후 다시 언급하겠다.

안중근은 본래 성리학에 능통한 유교가문의 후손이었다. 선친 안태훈은 동학교도를 폭도로 규정할 만큼 유교 이념에 충실한 선비였다. 이점은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하다. 유교를 非我로 규정한 신채호와 달리 안중근은 이미 유교적 바탕에서 천주학을 수용했고 그 바탕에서 시대와 역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당시 천주교는 천주(天主)사상을 통해 왕권 이데올로기를 뒤엎는 개혁적 단초를 지녔으나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했고 정치탄압으로 기복신앙에 머물고 있었다.

반면 안중근은 당대 천주교의 신앙지평을 벗고 민족과 신앙을 공동운명체로 보는 새 시각을 지녔다. 종교의 보편성과 민족의 특수성을 양자택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민족의 일치를 지향했던 안중근의 출발점은 유교의 천명(天命)사상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발전 과정을 천명의 틀거지에서 바라봤던 유교 가치관이 ‘동양 평화론’의 근저라는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 안중근의 핵심요지를 살필 수 있겠다.

“옛말에 天命을 따르는 자는 이러나고 逆天한 자는 망한다고 했다. 노일 선전포고 조칙(詔勅),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려 한다’고 되어 있어 이것은 천명을 따르는 것이며 일본 황제의 뜻을 따른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일본이 승리한다고 생각한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승리한 것은 ‘하늘의 뜻을 따르면 일어난다’는 이치에서 온 것이었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황제 뜻에 반하는 정책을 썼기에 오늘과 같이 한일 양국이 궁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중근 ‘동양 평화론’의 핵심요지를 접할 수 있다.

3

위 인용문에서 나타났듯이 본래 안중근은 노일전쟁 발발 시 안중근은 일본 편을 들었다. 일본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고 서구 열강에 포위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 하는 것으로 믿었기에 러일전쟁을 天命이라 여겼고 大義가 일본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히로부미를 앞세워 한국 침략의 야욕을 보였을 때 안중근은 평화를 해치는 히로부미 제거를 天命이라 고쳐 다시 생각했다.

이렇듯 유교에서 배운 天命사상은 안중근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했다. 여기서 함께 주목할 것은 안중근에게 있어 일본의 존재와 그 역할에 관한 것이다. 애시당초 안중근은 일본을 非我가 아니라 한국과 공존할 수 있는 이웃, 곧 확장된 의미의 我로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서구에 대해 동양이란 틀에서 친구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지배담론을 등에 업고 탈아입구(脫亞入口)를 외친 일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항거했다. 진실한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은 이런 의식 하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신채호類의 저항적 민족주의와 일정부분 만날 수 있는 여지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본 역사이해는 당시 상황에서 ‘동양 평화론’을 天命으로 인식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유교적 天命과 가톨릭 신앙의 보편정신이 안중근으로 하여금 민족을 중히 여기되 그 지평을 벗게 했던 탓이다. 본래 유교전통에서 지고한 天은 역사적 존재인 민중(民)과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 天을 역사적 실체인 民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이겠다.

마태오 릿치의 『天主實義』가 전래된 이래로 天은 더욱 인격화되어 조선 민중에게 다가왔다. 이런 이유로 안중근에게 있어 天命은 다음의 뜻을 지녔다. “이른바 천명의 본성이란 것은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 주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외다.”

여기서 안중근은 政敎분리를 고수했던 당대 천주교와 달리 인간 본성인 天命을 자신이 처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바라보았다. 조선 독립, 동양평화가 자신에게 天命으로 인식된 것이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문제에 있고 일본 천황의 선전 조칙과 같이 한국으로 하여금 독립을 견고케 하는 것은 나의 종생의 목적이며 또 중생의 일이다...”

4

이처럼 안중근은 천주교 신앙에 근거하면서 역사발전과정을 유교적 天命으로 내재화시켰다. 天命의 역사적 실체가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의 ‘동양 평화론’이다.

天命으로 체화된 ‘동양 평화론’은 하지만 좌절된 문명론적 아시아주의였다. 안중근은 자주 독립을 유지하되 한중일 간의 아시아적 연대를 꿈꿨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동서양간의 문명 교섭을 민족 간 갈등으로 여긴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안중근 속의 天主 신앙은 평화적 아시아주의를 위한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 수 있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다음처럼 구상되었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 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며 서로 다투는 마음 없이 제 땅에서 편안이 생업을 즐기면서 태평을 누리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를 일양화(一樣化)시키는 미국식 세계화에 맞서 대안적, 다원적 가치 창출이 필요한 시점에서 안중근의 본 구상은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의 지평에서 아시아 지역 통합론을 요청한다. 유불선으로 대표된 종교문화의 공통성이 지역통합의 근거이자 정치, 문화적 다원주의를 활성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획일화시키는 야만(서구)적 지구화가 아니라 제각기의 삶의 양식이 존중되는 문명적 지구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던 셈이다.

이렇듯 각각의 차이에 근거한 문명적 세계화, 이것이 안중근에게 天命이었다. 남북 간 분단체제가 허물어지는 이 시점에서도 이런 시각은 여전히 중요하다. 미국에 맞서고자 핵을 통해 살길을 찾았던 북한이 핵 포기를 선언한 마당에 한중일의 평화공동체 구상은 당면과제일 수밖에 없다.

5

그럼에도 안중근의 天命觀에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사형직전 까지도 안중근은 일본 천황의 존재를 부정치 않았다. 일본의 제국적 침략을 천황의 뜻을 어긴 이토 히로부미의 죄과로만 보았다. 이런 실책 역시 천주교의 上帝, 나아가 유교적 君主論에 기인한 것이다.

▲ 안중근 의사 ⓒGetty Image

『天主實義』에 근거 펴낸 조선서 중엽의 교리서 『上帝上書』에는 天主와 君主의 관계가 권한의 大小에 따라 명시되었다. 천주의 통치영역은 전 우주에 미치고 군주는 한 국가에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당시 천주교가 上帝를 신앙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교적 군주제를 용인했음을 보여준다.

天主의 다스림 속에서 만인 평등을 설(說)했음에도 천주교 자체가 개혁 실천적 종교가 되지 못한 반증일 것이다. 물론 안중근의 천주신앙이 프랑스 선교사의 틀을 벗어나 있었으나 국가 안에서 구주의 절대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君主는 그에게도 축소된 天主로 여겨졌던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인 天主를 경배하듯이 일국의 지배자 君主에 대한 충성도 백성이 감당할 덕목이었다. 이는 신앙과 忠 그리고 孝가 일맥선상에서 이해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천주교적 군주론의 맥락에서 안중근은 일본의 천황을 이해했다.

물론 일본인들도 한국의 군주에게 동일한 존경심을 표한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그렇기에 서구 문명에 일찍 접한 일본천황이 한국 독립을 위해 서구 제국주의와 전쟁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안중근은 사형집행 순간에도 일제 침략을 천황 뜻이 아니라 여겼다. 천황을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붙잡은 것이다.

이것은 大日 인식의 치명적 한계가 아닐 수 없었다. 침략전쟁의 배후가 천황이라 생각 못한 것은 유교와 접합한 천주교 上帝신앙의 태생적 한계라 할 것이다. 천주교 상제신앙이 한국 독립을 언급한 일본 천황의 조칙(詔勅)을 낙관적 신뢰로 귀결시켰던 까닭이다. 유학을 바탕 한 천주교 신앙이 天命이란 이름으로 민족 독립을 넘어 ‘동양 평화론’을 정초했으나 시대착오적 군주론 탓에 시대 인식의 또 다른 한계를 들어 낸 것에 크게 가슴 저리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당대 아시아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시기적으로 앞선 위대한 사상의 열매였다. 아직도 해결과제가 많이 남겨져 있으나 유럽 통합은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를 예시했다. 주지하듯 아메리칸 드림 대신에 유로피안 드림의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가 되었다. 언어, 종교, 인종 나아가 이념까지 상호 달랐으나 이들은 국경 없는 하나의 세계를 이뤘던 까닭이다. 화폐도, 정책도 교육도 공유하는 새로운 지경을 열었다.

이에 비한다면 한중일이 위치한 동북아 지역은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는 데 있어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본래 한반도는 분단돼서는 아니 될 땅이었다. 분단은 의당 패전국 일본의 몫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 땅의 분단에 큰 뜻을 부여하는 목소리가 왜 전부터 생성되어져 왔다. 세계 대전 이후 이념대결로 치달은 세상(죄)을 위해 속죄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이 강대국들의 분할 통치로 인해 상처받은 역사가 벌써 70년이다. 6.25 전쟁으로 희생된 남북 동포들 숫자가 독일 홀로코스트 희생자들만큼 된다는 통계도 있다. 70년 분단체제로 인해 수없는 사람들이 이념의 희생양 되었다.

이제 촛불의 힘을 입은 문재인 정권이 남북의 장벽을 허물고 있다.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행사하는 중이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협조도 얻고 있다. 휴전협정이 종전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개정되어 남북의 왕래가 시작되면 안중근이 꿈꾼 ‘동양 평화론’을 넘어 세계평화를 위한 첫걸음을 이 땅에서 시작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 빈번하게 왕래했고 문화적으로 동근원적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상호 소통가능한 문자를 공유하는 한중일 세 나라가 정치, 경제적으로 협력할 시(時), 세계 평화는 아시아로부터 가능해 질 것이다.

감옥에서 안중근이 꿈꿨던 ‘동양 평화론’이 3.1 독립 선언 100주년을 앞둔 이 시점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예사롭지 않다. 한반도에 임한 평화의 기운은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의 기운일 수도 있겠다. 이러 꿈을 고통 속에서도 품을 수 있었던 안중근을 조상으로 둔 이 나라 앞날이 크게 밝을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