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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를 행하고 無事를 일하고 無味를 맛본다”

기사승인 2019.03.18  18: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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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63

“無爲를 행하고 無事를 일하고 無味를 맛본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이 있으니,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다. 어려운 일은 그 쉬운 데서 헤아리고, 큰 일은 그 작은 일부터 한다. 천하에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비롯되고, 천하에 큰 일은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항상 큰 일을 하지 않음으로 능히 그 큰 일을 이룬다. 대저 쉽게 허락하면 반드시 믿음이 적고,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운 일도 많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그것을 오히려 어렵게 여기므로 항상 어려움이 없구나.”
- 노자, 『도덕경』, 63장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큰 나라는 무력으로 작은 나라를 복종시키고, 지식으로 벼슬을 얻은 자는 그 지식으로 백성을 착취하며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있다. 작은 나라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배우지 못한 자가 감내해야 하는 삶의 고통은 도덕경 하편 곳곳에 나타나 있다. 대국과 소국, 많은 자와 적은 자 사이의 원한과 갈등에 대해 노자는 무위의 덕으로써 가라앉혀야 한다고 도가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해결책은 역설적이다. 무위는 지식으로 다스리지 않는 정치이다. 일이 없는 정치를 하니 착한 자를 구하지 않는다. 맛없음을 맛보니 나라를 다스리되 재물과 쾌락을 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치를 그치는 것이 곧 천하에 가득한 원한을 가라앉히는 길이다.

▲ 도덕경 63장 ⓒGetty Image

공자는 以直報怨(이직보원)이라 하여 ‘바르게 함으로써 원한을 갚으라.’라고 했다. 인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시비를 따지고자 하는 공자의 태도와 자연의 그러함에 따르는 노자의 덕성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을 겉모양으로 볼작시면 크고 작은 게 있고
수를 헤아리기로 하면 많고 적은 게 있다.
이렇게 보고 이렇게 헤아리는 데서
怨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만 도는 모양도 아니고 수도 아닌지라
성인이 이로 더불어 하나가 되어,
하지 않음으로써 함을 삼고,
일 없음으로 일을 삼고,
맛 없음으로 맛을 삼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모두 버리고
거룩함과 속됨을 함께 벗어나
담담하게 性宅에 머무르니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을 하나로 써 보는데
어찌 怨을 갚겠는가?
오직 덕으로써 모두 받아들일 따름이다.
- 노자, “초씨필승”

無爲를 행하고, 無事를 일하고, 無味를 맛보듯이, 종말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끝이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변화된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성서적 종말이다. 그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 나라 도래라는 천지개벽에 참여한 공동체이다.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선포에 호응하여 모인 예수님의 공동체이다.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는 이 종말적 순간에 모인 공동체이며, 지금 실현되고 진행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하느님 나라 도래 사건에 놀라 모여든 무리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시작이지, 아직 완성이 아니다. 현실은 아직도 하느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멀다. 현실에서 할 일은 작은 일, 쉬운 일부터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큰 일과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려움은 없다. 고난을 고난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고난은 없다. 그저 현실이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종말신앙의 핵심입니다. 기다림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산다는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기다림으로 가능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살았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다림은 구체적인 대상과 약속, 또는 그 약속의 담보를 분명히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미 만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고, 처절함 몸부림이 있습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로 부름 받았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메시아적 선교를 위해 애쓰는 우리도 이 새벽의 닭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우리들이 할 일이고,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찮은 닭 한 마리의 외침이 온 동네를 깨워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민중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거룩한 영이 부어주시는 것이 종말성과 자기초월성입니다. 종말성과 자기초월성은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더 나은 공동체로 갈 수 있도록 단(斷)하는 힘입니다.
자기초월성은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를 목적으로 않습니다. 또한 자기를 돌아보는 깊은 성찰을 전제로 합니다. 자기초월성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메시아적 선교에 든든한 터전이며 근거이며 힘입니다. 자기초월성은 밖을 향해 손을 뻗어서 연대하고, 안으로 힘을 모아서 자기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메시아적 선교를 위해 정체성과 주체성을 다지기 위해 자기초월성으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에서 더 많이 생깁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종말적 공동체, 메시아적 선교”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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