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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실패”

기사승인 2019.03.15  18: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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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a Dolorosa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프랑스 북부 루앙지방의 한 작은 교회에 1820~30년쯤부터 걸려있던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14처」, 그 열네 작품이 한 소장가의 창고에서 나와 십수 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2017년 5월 U.H.M. 갤러리 단해기념관 오픈전에 전시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사순절 기간 동안 생애 처음으로 「십자가의 길 14처」를 묵상할 수 있었다. 작품해설준비를 이유로 홀로 마음껏 묵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이른 아침 갤러리에서 작품의 핀 조명만을 켜고 기도로 시작했다. ‘주여, 이 작품들을 통해 제게 말씀하소서.’ 그리고 주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다. 그러다가 어떤 작품에 마음이 끌리면 멈춘다. 그 작품 앞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눴다. 왜 마음이 끌렸는지 찬찬히 음미하며 기도를 올렸다. 그 작품을 통해 이백 년이 넘도록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도를 올렸을까? 그 기도의 물결에 빠져들었다.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앞에 멈추게 된 날, 물음이 먼저 떠올랐다. ‘주님, 왜 세 번입니까?’ 성경 어디에도 십자가의 길에서 넘어지셨다는 구절은 없다. 물론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으로 볼 때, 분명 넘어지셨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굳이 세 번이다. 왜일까? 밑도 끝도 없이 그 물음을 붙잡았다. 어쩌면 붙잡혔는지도. 

▲ 작자 미상, 십자가의 길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단해감리교회

14처는 십자가 고난의 길을 사순절 동안 묵상하도록 핵심 장면만 추린 것이다. 십자가 고난의 길에 담긴 사랑과 구원의 신비를 가슴에 새기고 삶으로 이어가려는 의도다. 14, 15세기 경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처음 고안한 이유가 있다.

이슬람 국가가 예루살렘을 정복해 성지순례를 갈 수 없게 되었다. 궁리 끝에 주요 장면을 요약해 그려두고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널리 퍼져 정착한 전통이 「십자가의 길 14처」다. 각 교회에서 고난의 길 영적순례를 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17세기까지는 정해진 개수 없이 17개였던 적도 있지만, 클레멘스 12세(1730~1740)가 14처로 고정시켰다. 그러니 넘어지심을 세 번으로 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넘어지심을 의미한다는 어느 가톨릭 신자의 설명을 한참 뒤에야 들었지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하나님께 왜 세 번이냐고 묻고 그저 침묵에 기대어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떠오른 것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과 “부활하신 주님의 세 번 물음”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신 주님의 마음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베드로야, 나를 세 번 부인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실패한다. 나도 십자가를 지고 세 번 넘어졌지. 너도 세 번 넘어진 것일 뿐이다. 내가 다시 일어난 것처럼 너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그 사랑의 손 붙잡고 다시 일어나렴.’

신비한 음성으로 주님 주신 대답 같은 것은 아니다. 갑자기 마음속에 펼쳐진 풍경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한 날 그 묵상의 여운이 계속 되었다. 주님의 넘어지심, 주님의 실패… 예수님께서 실패하신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는다. 물 위를 걸으시고, 웬만한 병은 스치기만 해도 낫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신다. 그런 주님께 실패는 너무나 어색하다. 그러나 넘어지신 주님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실패가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어 스스로도 놀라신다(막6:3~6).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요7:48)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처럼 종교권력자들을 전도하는 데 철저히 실패하셨다. 니고데모는 애매하지만, 복음서만으로 볼 때 표면적으로는 한 명도 없다.

어디 그뿐인가?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주님의 뜻과 길을 이해하지 못했다. 측근인 열두 제자조차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고, 다 도망가 버렸다. 제자 교육과 훈련에 실패한 것이다. 실패할 줄 모르셨을까? 아셨지만 기꺼이 실패하신 게 아닌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고 물위도 걷는 정도의 능력치에서 보면, 너무 큰 실패가 아닌가.

▲ 작자미상, 십자가의 길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 ⓒ단해감리교회

교회는 그간 그리스도의 실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죽음을 이겨내신 예수님의 신성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왔다. 예배나 부흥회의 설교는 더욱 그렇다. 성취, 능력, 승리의 그리스도에 치우쳤다. 그러나 주님의 삶에는 능력에 비해 적지 않은 실패가 있다.

1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눅4:1~2)

성령 충만으로 행하신 첫 번째 일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일이다. 그 첫 번째도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거부하신 일이 아닌가.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기적 역시 거부하신다. ‘기적의 거부’라는 기적적인 모습이 성령 충만의 승리였다.

시작만 그런가? 십자가 위에서도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알파와 오메가는 ‘기적으로 이겨낸다’는 관점에서 보면, 거부이자 실패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으니 실패가 아니지만, 기적을 기대하는 욕망에게는 실패와 다름이 없다.

세 번째 넘어지심을 통해 시작된 묵상은 그리스도의 실패를 통해 깊어갔다. 신앙이 너무 성공지상주의의 틀 안에 갇혀있음을 발견했다. 사랑은 불가능해도 감행하는, 가능해도 포기하는 자유다. 성공의 틀에서 보자면 무모해도 감행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시도하고 기꺼이 실패한다.

사랑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까지 해주고 싶어 한다. 달도 따다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이 100점이라고 하던가. 늘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마음이 부모다. 자신의 한계 너머를 약속하고 달려간다, 실패할지라도. 한계 너머임에도 실패하면 너무나 미안해한다. 해준 것으로 당당해하기보다 더 해주지 못해서 죄스러워 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실패라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세상보다 한 두 걸음 앞서가면, 리더로서 이끌어 가며 성공을 누릴 수 있다. 열 걸음, 스무 걸음쯤 앞서가면, 고생을 할지언정 선각자, 선구자라는 칭송과 추앙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백 걸음, 천 걸음 앞서 가면 어떨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고, 살해당하기 쉽다. 미친 세상에서 제 정신인 삶은 오히려 실패하는 게 자연스럽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어떤가? 세상과 너무 보조를 잘 맞춰 성공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세상의 성공과 안락을 보장해줄 것만 같은 교회, 목회자, 신앙만 추앙 받는다. 기꺼이 감당해야 하는 실패의 십자가를 외면한다. 실패가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갈 수밖에 없는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주님조차도 좁은 문, 좁을 길에서 실패를 감당하셨다. 그럼에도 교회와 신앙이 부흥의 가면을 쓴 성공만 쫓는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다. 사순절, 회피한 실패들을 돌이켜볼 기회다, 넘어지신 주님 곁에서.

▲ 작자미상, 십자가의 길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 ⓒ단해감리교회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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