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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태풍을 거스를 아시아 공동체 연합을 마지막까지 꿈꾼 사람

기사승인 2019.03.12  17: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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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동환 목사님을 추모하며

“민중 속에 묻힌 하나님의 영이 깨어 일어나기 위해 한평생 새벽길을 달려온 분”

어릴 때에 중국 용정 명동촌에서 우물가에 갔다가 한 여인이 “너는 왜 그리도 못 생겼냐?”는 한마디 충격에 트라우마에 시달렸다는 그가 전혀 다른 멋쟁이로 돌아왔다. 미국 유학시절 강의실에서 자신 있게 방귀 뀌는 문동환과 결혼해 주었다는 예쁜 미국인 색시를 데리고 수유리 캠퍼스에 나타났다. 특히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똑같은 것을 다르게 바라보셨던 분

군대를 다녀와서 한신대에 복교한 나는 9시에 시작하는 문 선생님의 <자아확립> 시간에 매번 지각을 하였다. “학생 앞으로 나오세요. 학생은 수업을 들으러 오는 거요, 출석을 체크하러 오는 거요. 왜 매번 늦죠?”

나는 봉천동에서 3번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 이상을 걸려오기에 늦는다는 변명을 하였다. “그러면 학교를 당신 집 앞으로 옮기던지 학생 집을 학교 앞으로 옮기던지 해야 하지 않나요?” 한 것이 내가 결혼해서 봉천동에 구멍가게를 하면서 이제 막 첫딸을 키우던 때였다.

▲ 문동환 박사(사진 왼쪽)님 <예수냐 바울이냐>에 관한 주제로 발제를 하실 때 사회를 보았던 필자(사진 오른쪽) ⓒ이해학

문동환 선생님은 발상의 천재. 나는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였던 제자이기도 하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봉천동 집을 처분하고 수유리 한신대 앞으로 옮겨 <가나안>이라는 식품 가게를 열었다.

그분은 꿈쟁이셨다. 그 뒤로도 나와 수차에 걸처 도모한 음모가 있다. 내가 시장 사람들이 단합하여 세무직원들을 매수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것은 불의라고 생각하고 상의 드렸을 때 문동환 선생님은 내 시각을 뒤집어주셨다.

세금을 적게 내려는 동맹은 부당한 세금을 절감하려는 노력일 수 있다. 오히려 목회적인 시각은 그들이 목표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을 활용하여 그 조직을 선한 힘으로 유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교회목회보다는 사회목회, 특수목회를 구상해보라고 권고하시었다. 나는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출발하기 직전에 학교는 매일 교련반대와 언론규탄데모로 수업을 거의 못할 때였다. 문교부장관이 전국대학에서 데모 주동자 173명을 제적하라고 명한 위수령파동이 발발되었다. 내가 군제대 후 복교하여 3학년 2학기인 71년 10월 연대, 고대와 함께 한신대가 문교부 명령을 거부하였다.

한신 교수들은 우리는 제자를 강제로 퇴학시킬 권한이 없다고 교무실에서 철야농성을 하며 항거하였다. 나는 수유리 경찰에서 조사받으며 기소가 되었지만 후에 기록을 보니 3번이나 부당한 문교부처사를 바꾸어달라고 청원한 자료가 있다. 나는 비록 만학마져 차단되었지만 이런 교수들을 만난 축복을 늘 감사한다.

나는 학교에서 제적이 되고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 실무자훈련을 받았다. 한번은 실무자교육에서 신혜수 님이 중국의 5.4운동을 발제하고 문동환 선생님이 남미의 민중교육가인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를 소개하였다. 지배자의 교육에서 억눌린 자가 주인되는 교육으로 전환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게 너무도 행복하여 감옥에서 이불을 쓰고 영어판 페다고지 (Pedagogy)를 몰래 읽은 것을 비롯 해방신학에 빠져갔다.

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발표 되었다.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서남동, 이우정, 문익환, 문동환, 함세웅, 김지하, 윤반웅 등 전원구속이 결정되었다. 이 당시 검사장인 서정각은 이들이 내란예비음모를 하고 국가전복을 시도하였으므로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이 사형을 당한다는데 참을 수 없어 청년회장 김금용과 상의하고 민주구국선언문을 복사하여 돌리다 김금용과 검거되어 3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선생님들에 대한 의리였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투지였다.

구조의 혁명을 꿈꾸셨던 분

첫 번째 감옥에서 나온 해 여름 강원도 현리에서 권호경, 김동완, 모갑경, 이규상, 허병섭 등과 함께 닭과 솥단지를 들고 가서 수련회를 하였다. 문동환 선생님이 특강에서  에른스트 슈마허(E. F. Schumacher)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소개한 것이다.

빈민의 인간화운동은 그것 자체로가 아니라 지구촌의 구원을 지향해야한다. 그 실천이 생태경제시스템 회복이다. 나는 너무도 자극을 받아 엉엉 울었다. 내가 보수적 교회에서 숙달된 축복론은 성공하는 인간이어야 하며 약자로서 큰 것 지향적 삶을 산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슈미허의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지향은 옳다는 공감이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 주민교회 교우들과 함께. ⓒ이해학

그래서 나는 당시에 한국교회가 관심 갖지 못한 3.1절 행사 때마다 교회창립행사와 기미독립만세를 함께 기리며 시민축제가 된 <꼴찌마라톤>을 시작하였다. 우리사회는 선수만 뛰는 것이고 우리는 구경꾼으로 전락되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마라톤은 잘 뛰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5인 1조가 함께 뛰어야하고 꼴찌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환영받고 상을 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라 선수이다” “우리는 축제의 중심이고 세상의 주인이다.” “꼴찌도 같이하면 부끄럽지 않다.”를 연습하는 것이다.

청계천에는 우리의 아지트가 있었고 무허가 빈민촌이 즐비한 긴 천변은 우리의 훈련장이었다. 여기에서 오재식 선생은 민중조직론을 말씀하시곤 하였다. 문동환 선생과 청계천을 걸으며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에 소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 빈부의 양극화는 구조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들을 성급하게 조직하여 세력을 만들려는 것은 욕심이다. 모세의 열 번의 재앙이 그것이다. 그들을 정성으로 섬기며 스스로 분노할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침묵하는 민중의 깊은 잠을 깨워 그들을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 조직가들의 책임이다. 우리의 유혹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말라. 허병섭은 <민중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라는 책으로 보답하였다.

노동자의 편에 서셨던 분

문동환 선생님은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노동자를 버리고 기업인의 배만 불린 대표적 사건이 면목동 YH사건이다. 오래동안 노동자들의 억울한 호소에 종교인·관공서·언론인 모두 외면하였다. 그녀들이 투쟁에 손잡은 문동환 선생님은 바빠졌다.

당시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씨를 설득하여 그들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할 수 있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김경숙이라는 노동자가 추락사함으로 봉쇄된 언론의 봇물이 터졌다. 이를 묵인 격려한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고 그 결과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의 오른팔인 김재규 장군을 내려보내 상황파악을 시켰다. 현장에 가서본 김재규는 박정희 시대의 끝을 본 것이다. 그길로 올라와 궁정동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함으로 유신을 끝장내었다. 79년 10월 29일이다.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살해한 그날인 것은 우연인가? 이 역사 드라마에서 문동환 선생님의 역할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자본주의의 대안을 공동체에서 찾으셨던 분

내가 민주인사 인터뷰 차 미국에 갔을 때 워싱턴 선생님 댁에 방문하였다. 내가 가면 외로운 선생님은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신간을 내놓고 “봐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주도하는 미국제국주의는 반듯이 망하게 되어 있어. 지금은 화려하고 크고 무섭지만 결국은 바벨탑이라구!!” 하며 팔레스타인, 이란, 이라크, 시리아, 한반도 등 미국의 폭력이 개입되는 국제관계와 지구온난화 핵문제로 지구가 망할거라는 촘스키의 예언을 상기시켜 주셨다.

▲ 얼마 전 병석에 계신 문동환 박사님을 찾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해학

여기에 대한 대안을 공동체에서 찾았다. 그분이 새벽의집이 실패한 데 대한 아픔을 늘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만이 시대적 대안이라고 믿었다. 여러 차례 나를 불러 공동체운동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물었다. 최철호 목사의  아름다운마을공동체를 방문하시기도 하였다.

선생님의 공동체에 대한 꿈은 한국교회의 병든 행태에 대한 대안이고 세계민중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셨다. 또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을 경고로 생각하셨다. 그것은 다윗의 제국으로도 아니고 바울의 개인주의적 구원도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강조하셨다.

어느 해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쉬고 필라델피아의 선생님 댁에서 잠을 자는 데 선생님께서 손수 만드신 나무침대가 밤새 삐걱거려 잠을 이루지 못해도 행복하였다. 나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공동체가 하늘나라라고 믿고있는 큰 꿈쟁이를 나는 만났다!”

마지막 병상을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나의 고백은 당신은 민중 속에 묻힌 하늘의 영이 깨어 일어나기 위해 한평생 새벽길을 달려온 분입니다.

▲ 문동환 박사님과 문혜림 사모님 ⓒ이해학

이해학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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