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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픔 · 공동체 · 떠돌이신학

기사승인 2019.03.11  19: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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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동환 목사님을 추모하며

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대표 이해학 목사)에서 문동환 목사님 추모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해왔습니다. 처음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어제(9일) 소천한 선생님은 목사이자 교육자, 신학자였고, 민주화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워낙 유명한 분이라 추모글이 많이 게재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저까지 추모글을 쓴다는 것이 조금 번잡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선생님 추모글을 쓰는 것이 제자로서 고인에 대한 도리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떠돌이 신학자와 떠돌이를 위해 사는 목사의 관심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과 무척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제 결혼식에 주례를 서신 목사님, 저에게 선교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도록 하신 선생님, 그리고 제 삶의 좌표를 주시고 격려해주신 스승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 대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보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련했던 부분만 몇 가지 적어 추모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

선생님과 가장 가깝게 지낸 것은 문 목사님께서 2013년 미국 생활을 접고 다시 귀국하신 후입니다. 선생님은 당시 스스로 ‘떠돌이 목자’라 불렀듯이 떠돌이에 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이주노동운동을 하는 저를 불러내서 제가 하는 이주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 사회적 기업 트립티 까페에서 문동환 선생님을 모시고 10여 차례 “예수냐, 바울이냐”를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최정의팔

선생님은 이 때 당신의 신학을 ‘떠돌이신학’이라고 명명하시고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이주노동자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2009년 펴낸 자서전 부제도 ‘떠돌이 목자의 노래’였습니다. 선생님은 하느님께서 고향에서 밀려난 떠돌이들을 부르셨다며, “떠돌이들은 대부분 현 체제 하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현 체제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민중인 떠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이주노동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자 설립된 트립티 까페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10여 차례 “예수냐, 바울이냐”를 주제로 강연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강의는 2015년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 연세가 94세였는데, 두어 시간을 열정적으로 강의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령에도 불구하고 논리 정연하게 강의를 전개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이 때 가장 놀란 것은 강의 내용입니다. 전통적으로 바울을 기독교 전파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간주하는 풍토에서 선생님은 바울이 예수를 오염시켜 기독교를 타락시켰다는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90세가 넘은 연세에도 그렇게 과감하게 도전하시는 모습에 저는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 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오늘도 94세 문동환 목사님 강좌는 많은 도전을 던졌다. 성서에 그릇된 것이 많다. 그렇게 그릇된 것을 깨닫고 그릇된 것이 성서에 포함된 이유를 알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출발이다. 이웃의 고통에 아파하면서 예수를 따라 살 때 그 믿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강좌를 진행할 때 저는 선생님을 댁에서 트립티 까페까지 제 차로 모셨습니다. 선생님은 대부분 사모님과 동행을 하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사모님과 함께 가면 선생님께서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음에도 이렇게 늘 동행한 이유는 사모님께서 목사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모님께서는 노환으로 한국어를 잘못 들으셔서 강의 듣는 것을 재미없어하셨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지루한 표정을 짓는 사모님께 아이스크림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겨울철이라 사모님이 아이스크림을 잡수시고 감기가 들지 않을까 말리셨지만, 결국 사모님 고집을 꺾지 못하시고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드시는 사모님을 지켜보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런 목사님을 보면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과의 인연의 시작 그리고 삶의 변화

사실 제가 선생님께 사랑을 받은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처인 한국염의 한신 스승이셨고 대학원 논문 지도교수였습니다. 1975년 저희 결혼 주례를 기억하느라 장준하 선생님 아들 결혼주례를 깜빡하셨다고 문익환 목사님께 야단을 맞았다고 하니 저희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혼식에서 목사님은 통상 주례자가 읽었던 성귀(에배소서 5장 23절) 대신 가나안 혼인잔치 비유를 읽고 가정에서 남녀 평등한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1975년 유엔이 제정한 여성의 해에 딱 맞는 주례사였습니다. 저는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남녀가 평등한 삶을 사느라고 무척 힘들었습니다. 제가 연탄을 갈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등 이제까지 하지 않던 집안 일을 하면서 무척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 한국염 목사와 결혼식 당시 주례를 서 주셨던 문동환 선생님 ⓒ최정의팔

우리는 결혼 후 아내 제안으로 선생님이 계시는 방학동 ‘새벽의 집’ 근처에 방 한 칸을 전세방으로 얻어 살게 되었습니다. 한신대학 교수였던 목사님은 1972년도부터 지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치면서 생명문화공동체 ‘새벽의 집’을 열었습니다. 극단적인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살겠다는 시도였습니다.

이 새벽의 집에 입주한 사람들은 모두 소득을 공유하고 소비도 공유하는 초대교회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모든 가사 일(세탁, 설거지, 청소 등)도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입주자가 똑같이 분담하였습니다. 저는 새벽의 집에 비교적 자주 놀러 가서 선생님의 삶을 배웠습니다. 제가 공동체 문화에 관심갖게 것도 새벽의 집을 통한 문박사님 영향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초대교회 공동체 실험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에게 보여준 선생님 모습은 글자 그대로 소박한 삶이었습니다. 한신대학교 사건으로 해직되고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민주화 투사 모습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습니다. 새벽의 집에서 선생님께서는 다른 분들과 똑같이 직접 설거지를 하셨습니다. 교수로서 가장 많은 수입을 벌어 그 돈을 모두 집에 가져오시는데도 전혀 특별대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7남매 중 6번째로 가부장 문화에 젖어있던 제가 그나마 청소와 설거지를 하게 된 것도 선생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이 때 선생님이 신는 양말은 언제나 짝이 맞지 않는 짝짝이였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짝짝이라고 놀리면 선생님은 그저 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멋있게 보였던 것은 무슨 탓일까요? 제겐 그 모습이 자유로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떠돌이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

한국신학대학 부설로 1975년 기장 총회가 인정하는 선교신학대학원 과정이 만들어지고 문동환 박사님이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이 대학원 과정은 문교부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다양한 사회 인사들이 등록했습니다. 교육학을 전공하신 선생님께서 원장으로 취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문 박사님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에 입각해 세운  선교신학대학원에 여성분과, 사회분과 등 다양한 분과를 조직적으로 모아 대학원 과정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당시 여성학과는 이효재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한명숙, 이미경, 정숙자 등이 공부했고, 사회학과는 장일조 선생님 지도 아래 저를 비롯해 YWCA 총무, 김용희 관장, 홍유수 박사 등이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당시 기독교인으로 사회개혁에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사회분과에 들어가서 공부하였고 후에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기독교 동체주의의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고 졸업했습니다. 사실상 제 이 논문 제목도 문 박사님 영향이 컸습니다. 이 선교교육원 대학원 과정은 해직된 서남동 목사님이 원장으로 취임하시면서 감옥에 갔던 분들을 교육하는 대학 과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명동성당 3.1성명서 발표 후 선생님은 영어의 몸이 되시고 제 아내는 재판 방청과 재판정 밖에서 하는 가족들의 시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제 아내는 아이를 임신 중이었습니다. 정보부 사람이 제 아내를 불러 “임신한 몸에 남편이 독일유학 가야 하는데, 그러면 독일 가는데 지장이 있지 않겠느냐”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그때 제 아내는 “선생님이 잡혀가 있는데 유학 가자고 법정에 안 가는게 말이되느냐”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문동환 박사님을 비롯한 당시 교수님들은 우리에게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사회변혁을 꿈꾸던 선생님이 평민당 부총재가 되시고 국회의원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독일로 유학가던 첫 해 선생님께서 독일 교민운동가 초청으로 독일 보쿰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정치에 들어가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 이제 고인이 되신 문동환 선생님 ⓒ최정의팔

그때 선생님꼐서 대답하신 말은 “김대중 선생님 부탁은 거절했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눈앞에 김대중, 박영숙 선생의 비통해 하는 얼굴이 나타나더라. 그 아파하는 모습에 거절을 못하겠더라.” 그렇게 선생님은 사람을 중시하던 분이었습니다. 당시 박사님께서 강조하시던 단어 중의 하나가 “아픔”이었습니다. “민중이 당하는 고통에 “아파해야 해요.” 그 아픔으로 정치에 뛰어드신 분입니다.

미국생활을 하시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떠도는 이주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신학을 하시던 선생님은 두레방 20년사에 떠돌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떠돌이로 삼으신 선생님은 떠돌이 이야기로 자서전을 내시고 떠돌이와 바벨탑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댁을 방문하면 긴 시간 하시던 말씀은 우리나라 여러 공동체를 방문하신 이야기, 세계 곳곳의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공동체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새벽의 집에 담으셨던 꿈이 말년의 꿈으로 다시 살아난 듯 합니다. 다만 그 공동체가 세계화 시대의 지구 공동체로 넓어졌을 뿐이지요. 말 년에 “예수냐, 바울이냐”를 갖고 씨름하시면서도 그 줄기는 공동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신학의 처음에서 선생님께 들은 단어가 공동체였고, 마지막으로 들은 단어도 공동체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떠돌이 이주민들을 생각하며 지구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선생님 꿈이 제 삶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요?

- 공정무역 사회적 기업 대표 최정의팔 올림

최정의팔 대표(사회적기업 트립티) smc@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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