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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이 아래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 大者宜爲下

기사승인 2019.03.04  1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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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61

“대국이 아래로 흐르면 천하의 벗이고,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써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대국은 소국 아래에 있음으로써 소국을 얻는다. 소국은 대국 아래에 있음으로써 대국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는 아래가 됨으로써 얻고, 어떤 나라는 아래가 되어서 얻는다. 대국은 포용하여 사람을 기르려고 하는 데에 불과하고, 소국은 들어가서 사람을 섬기려고 하는 데에 불과하다. 대저 두 나라가 각각 바라는 바를 얻으니, 큰 쪽이 아래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 노자, 『도덕경』, 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於)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

노자는 큰 나라가 아래가 되고 암컷처럼 천하를 품어야 한다고 자연적 조화의 근거를 제시한다. 노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빼앗고 작은 나라는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큰 나라와 싸울 수밖에 없는 춘추전국시대의 현실에서 이 문제를 말하고 있다. 약육강식의 세계처럼 보이는 이러한 현실에서도 자연의 흐름을 본받으면 공존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자연은 순리를 거스리지 않고 움직인다. ⓒGetty Image

암컷은 아래로 흐르면서 고요함을 천하를 품는다. 이러한 암컷의 자연적 태도를 따라서 큰 나라가 고요함을 지키고 아래가 될 때에 작은 나라와 싸우지 않고 좌화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크고 작은 나라간의 관계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연약한 사람을 북돋우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아라한이면서도 凡夫의 자리로 내려오지 않으면 菩薩일 수 없다.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 정호승, “연어”

오늘 모든 인간관계에서 노자의 큰 것은 아래로 흐르고 암컷이 되어 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정글의 법칙 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약육강식”이다. 이를 인간 사회에 받아들여서 강하고 권력 있는 사람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다스리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적어도 묵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글은 잉여가 없다. 맹수들도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고, 오직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채울 뿐이다. 지금 인간의 모습은 생존과 필요보다는 욕구의 충족과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서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을 착취한다. 탐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잘못된 근거를 대지 말라. 인류가 살 길은 전쟁과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환대이다.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분쟁의 터전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여 사제들의 탐욕을 위해 존재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이야기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터전)”이라는 의미이다. 3000년 전 이스라엘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번갈아가면서 성지로 삼은 “거룩한 땅”이다. 하지만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지금까지 갈등과 분쟁,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통곡의 벽 앞에서 수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순례를 하고, 무슬림은 성전 산 위에 있는 ‘바위 사원’에서 알라에게 예배를 드린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에서 “제3성전”을 짖겠다고 하면서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수님이 성전을 파괴하려고 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한 기소이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행위는 후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주요한 죄목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대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었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권력을 행사하면서 민족을 팔아먹고 민중들을 착취하던 사두개파 사람들과 율법으로 민중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바리새파 사람들, 종교뿐만 아니라 현실 생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산헤드린의 무자비와 불의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기다리게 하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그 이름을 따라서 그런지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분쟁지역이 되었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서 평화는 간절해집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평화의 터전”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시작부터 평화를 깨뜨리고 차별과 분쟁을 일으키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성전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원하지 않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남의 평화를 깨뜨리고 분쟁과 차별을 조장한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평화의 터전이 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차별이나 지속적인 분쟁이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무너진 평화의 터전, 예루살렘 성전”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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