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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 돌아와 함께 한다” - 德交歸焉

기사승인 2019.02.25  21:4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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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60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 도로써 천하에 임하면, 귀신이 신령하지 않고, 귀신이 신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신령함이 사람(벼슬아치)을 상하지 못한다. 신령함이 사람을 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이도 역시 사람을 상하지 못한다. 이 둘이 서로 상하지 못하므로 덕이 돌아와 함께 한다.”
- 노자, 『도덕경』, 60장
治大國 若烹小鮮, 以道涖天下, 其鬼不神, 非其鬼不神 其神不傷人, 非其神不傷人, 聖人亦不傷人, 夫兩不相傷 故德交歸焉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구울 때에 마음을 모아서 생선이 익어가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큰 나라를 다스린다고 해서 작은 나라를 빼앗을 욕심이 일어나면 잘 다스릴 수 없다. 이를 한비자는 이렇게 말한다.

“작은 물고기를 조리면서 자꾸 뒤적거리면 요리를 망친다. 큰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꾸 법을 바꾸면 백성이 고달퍼 진다. 이런 까닭에 도를 모시고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고요함을 귀하게 여기고 나라의 법을 거듭 고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큰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작은 물고기 조리듯이 하라고 말한 것이다.”
- 노자익 한비자

도로써 천하를 대하는 것은 자연의 덕이 돌아와 함께 하게 하는 길이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누군가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리,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새겨들을 말이다. 자기보다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작은 생선을 굽듯이 마음을 모아서 자상하게 대해야 한다. 장자는 이에 덧붙인다.

“지극한 사람이 마음을 쓰는 것은 거울과 같아서 사물을 보내지도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사물에 응하되 감추지 않는다. 능히 외물에 흔들리지 않고 상처 내지 않는다.”
- 응제왕편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우는 데 지날 뿐일까요.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 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놓아 울겠습니다.
세상은 해를 거듭 포성에 떠들썩하건만 극히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 동산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종전의 ×가 있는 것은 시세의 역효과일까요.
봄 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 -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 윤동주, “화원(花園)에 꽃이 핀다”, 중에서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있는 모든 사람의 행동은 늘 연약한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님이 성전에 있을 때에 자기의 전 재산인 동전 두 개를 연보궤에 넣은 과부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힘없는 과부가 자기의 전 재산을 남을 구제하기 위해 바쳐야 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연보궤가 있었다. 성전의 바깥뜰인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용도가 표시된 열세 개의 나팔 모양을 한 연보궤가 늘어서 있었는데 성전에 예배하러 왔던 사람들이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이 연보궤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말의 “연보(捐補)”는 단순히 돈을 바친다는 의미의 헌금보다는 원어의 뜻을 더 잘 살려서 번역한 것이다.

▲ João Zeferino da Costa, O Óbolo da Viúva(The Widow’s Mite, 1876) ⓒWikipedia

‘연’은 “버린다,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인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 타인에게 내 놓거나 바치거나 기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는 원래 “깁다,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연보는 “자기 것을 버려서 헤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된다. 자연의 덕이 돌아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미치도록 하는 일이다.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기금이나 모금의 형태가 구약성서의 십일조의 의미와 가장 가깝다. 엄격하게 말하면 십일조는 우리의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이며,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그 중의 일부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신앙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기의 소유를 약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동이다. 단순히 교회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인 생명들을 살리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한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까지도 구제비로 내놓아야 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입니다. 하느님 계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 대상입니다. 요즘 말로 생활보호대상자나 차상위 계층입니다. 하느님이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잘 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대개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 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고 그러한 행위를 권장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없게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과부의 생활비를 삼키는 율법학자들이나 많이 넣음으로써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신년제의 기간 동안에 금식, 기도, 구제(자선)의 의무를 다하면 그것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그 헌금을 예수님이 칭찬했을까?”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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