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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정신과 기독교 신앙 개조 (2) 기독론(구원론)의 개조

기사승인 2019.02.24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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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7

2. 기독론(구원론)의 개조-여성그리스도(female christ)를 허하라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진 예관 신규식(睨觀 申圭植, 1879-1922)은 한민족이 나라를 잃은 이유를 역사의 망각과 ‘주인의식’의 상실로 보았다. 그의 『한국혼』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신 역사의 근거와 거기서의 뛰어남과 치욕을 잊고서 스스로를 대접하지 않으면서 주인의식을 잃고 종처럼 사는지를 여러 가지로 지적했다.

주체의식이 아닌 주인의식

나는 여기서 신규식 선생이 지적한 ‘주인의식’은 일반적인 주체의식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각자가 최고의 궁극자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하면서 뛰어난 ‘주체의식’을 회복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 주체의식은 자칫 또 다른 개인주의나 사적 이기심으로 변질한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유학자들이 서학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많이 지적한 사항이 그것이고, 또한 동학의 최제우도 서구 기독교가 그렇게 하느님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하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자기 자신 속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것이 있다.(1)

이러한 비판적 지적에서도 보듯이 한국 기독교 신앙의 주체의식과 자아의식은 맹점을 드러내고, 그에 반해서 민족적 독립 운동가들이 강조한 주인의식은 자신의 보다 더 근원적인 시작과 근거의 긴 역사를 아는 의식이므로 거기서의 자아는 “결코 불행을 도피하지 않”고, 민족적 상황에 대한 책임의식을 크게 느껴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행위 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특히 오늘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대처 등을 위해서는 단지 서구적 주체의식이나 자주, 자립, 독립만을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다시 이 주인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신이 속해있는 민족적 공동체의 역사와 그 생각할 수 있는 기원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일이 요구된다. 앞에서 언급한 맥페이그도 그런 의미에서 인류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게 된 빅뱅의 창조이야기와 더불어 하는 지구신학의 등장이 바로 1960년대 이후로 전개된 ‘해방신학’의 확장이라고 이해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 기독론

지난 80년대부터 서구 신학에서 이상의 기독교 절대주의를 상대화시키고, 거의 ‘그리스도 우상주의’에 빠진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기독론)을 급진적으로 새롭게 보는 일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연구이다. 그 연구팀의 신학자 존 쉘비 스퐁(J. S. Spong)은 2013년 한 요한복음 연구를 통해서 어떻게 예수를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보수교회가 하듯이 그렇게 실체론적으로 우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참된 인격과 메시지를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다시 보여주었다. 원 제목이 “제 4복음서: 어느 유대인 신비가의 이야기(The Fourth Gospel, Tales of a Jewish Mystic)”로 되어 있는 스퐁의 요한복음 연구는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요한복음이 그 앞의 공관복음서들(마태, 마가, 누가복음서)과는 달리 유대인 초대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이방인들 공동체를 위한 복음서로 읽혀져 온 것에 반대한다.

스퐁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오히려 매우 유대적인 책으로 핵심까지 유대적이며, 특히 “유대 신비주의”의 책이라는 것이다.(2) 그리고 그 안에 기독교 신앙이 지금까지 예수의 유일회적 배타성을 주장할 때 주로 써왔던 “나는 ...이다”(ego eimi,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하느님과 동등하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다 등)라는 언어는 회당에서 출교당한 유대인 예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깊은 예수 체험을 유대 신비주의적으로 보다 보편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언어는 결코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를 기술하는 헬레니즘적 영지주의의 이원론의 언어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체험하는 신비의 진술이라는 것이다. 스퐁에 따르면  거기서 유대 신비주의란 유대 민족이 바벨론 포로 기간 이후에 하나님의 부재와 고통 속에서 얻게 된 지혜전승 속에서 나온 것이다.(3) 그 지혜란 인간이 하느님과 가질 수 있는 “신비한 합일”(the mystical unity)의 표현으로서(4) 요한복음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지혜”가 모두 예수 안에 현존해 있으며 그 예수라는 인물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머물게 되었다는 신비한 확신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5)

이렇게 요한복음의 언어를 유대 신비의 언어로 보면서 내면적인 인격의 언어로 보는 것은 요한공동체 당시 뿐 아니라 그 이후 초기 교회사에서 점점 더 역사적 예수의 한 점을 문자주의적으로 왜곡시켜 신격화하는 모든 시도들을 물리치게 한다. 그러한 문자주의적 이해는 예수에 대한 이해를 마치 하느님이 가짜로 육신을 입고 인간인 척하면서 나타난 것처럼 보는 ‘가현설’(docetism)의 기독론에 빠지게 하는데, 스퐁에 따르면 요한복음이야말로 그러한 문자주의의 가현설에 가장 반대하는 복음서이다. 오히려 여기서의 하느님 이야기는 “진화하는 이야기”(as an evolving story)로서 예수는 “하느님의 부분”(Jesus as being part of who God is)이며, 우리 자신도 그렇게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일에 초대하는 신비이다.

일찍이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류터도 그녀의 책 『신앙과 형제 살인(Faith and Fratricide, 1974)』에서 기독교가 헬레니즘의 잘못된 이원주의에 빠져서 복음의 원래 의미인 “종말론적인 사건(신비)”을 부조리하게 역사화해 왔다고 비판하였다. 그 일을 통해서 기독교는 자신의 형제인 유대교를 악마로 몰아왔고, 이후 모든 ‘다름’과 교회 밖과 약자에게 악을 행하는 거대한 제국주의적 전체주의의 종교로 화해왔다는 것이다.(6) 그녀도 지적했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한 행태가 지속되고 있으며, 오늘 미국이나 한국 기독교 보수신앙이 빠져있는 오류도 유사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 핵심 관건이 바로 모든 기독교 기독론(구원론)의 중심에 놓여있는 종말론적 신비 사건의 문자주의적 왜곡과 잘못된 역사화인 것이다.(7)

여성그리스도와 한국 교회의 성(性)

나는 오늘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왜곡이 가장 무의식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장소가 바로 여성과의 관계에서라고 본다. 물론 오늘날의 심각한 생태위기 상황에서 개별적인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인간적인 의식의 차원에 한정해서 본다면 그것은 여성과의 관계일 것이다. 아무리 오늘날 교회 내에서 양성평등을 말하고, 여성리더십과 성해방과 평등을 말해도 아직 ‘여성그리스도’(women christ)에 대한 의식은 거의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 He Qi, “Disciples of Christ” ⓒhttps://theodepot.wordpress.com/tag/christology/

하지만 우리가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기독교 제국주의의 핵심에 바로 한 유대인 청년 남성예수를 유일회적이고 실체론적으로 그리스도화한 것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 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남성적 독점을 흔드는 일이 긴요하고, 그 일에서 ‘여성그리스도’를 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라는 묻고 싶다.

2천년 전 예수의 실제(reality)를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회적인 하나 됨의 사건으로 실체화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것(靈)의 신비로서 내면적 인격의 일로 본다면 ‘복수’(複數, plural)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여성 그리스도’의 도래는 그래서 결코 어불성설의 일이 아니다.(8) 올해 한국교회협의회(KNCC)가 한국 사회의 ‘미투운동’을 촉발시킨 공로로 서지현 검사에게 인권상을 주었고, 양성평등의 일을 더욱 이루기 위해서 “교회 성폭력, 이제 그만”이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다방면에서 힘쓰고 있지만 그런 노력들을 더욱 더 근본에서 근거지우는 일은 바로 기독론의 여성주의적 해체와 개조인 것이다.(9) 그렇지 않고서는 교회 내 성폭력과의 싸움은 단편적이기 쉽고, 그래서 오늘날처럼 교단의 대표뿐 아니라 신학대학의 교수도 자신들의  성폭력과 악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이 계속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오늘 종교인개혁연대가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해서 종교를 개혁하고 그것으로써 한국 사회의 희망을 다시 말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각 종교에서 핵심적인 신조의 기본 틀을 흔드는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을 제2의 독립운동처럼 수행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앞의 기독교 신론의 개조에서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 종교 안에서만 머물러 있어서는 어렵고, 과감히 밖으로 나가서 이웃종교들과 연대하고, 대화하고, 함께 겨루면서 이루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나는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프로세스에서도 이러한 종교적 근본의 개혁과 개조가 어느 다른 일보다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지금까지의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을 진행시켜왔던 한국 사회 진보주의자들의 의식에서도 종교적 근본을 다르게 보는 性과 여성의식은 거의 일깨워져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종교의 신인(神人) 이해

예를 들어 한반도의 대종교 경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셋이 곧 하나인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의 그리스도와 견줄 수 있는 ‘신인’(神人) 이야기를 하는데, 그 신인의 현현을 단군왕검뿐 아니라 인간 누구나의 지향점으로 보면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신적 가능성인 거룩의 ‘씨(性)’을 일구는 일로 보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오늘날 기독교가 빠져있는 예수에 대한 실체론적 ‘그리스도 우상주의’를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대종교는 그러한 의식으로 항일운동도 그렇게 치열하게 수행했고, 대종사 나철뿐 아니라 대표적 지도자들인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서일(白圃 徐一, 1881-1921) 등이 모두 스스로 숨길을 닫는 순절로써 나라의 독립과 인류의 하나 됨을 위해서 저항했다는 것은 그들의 신비의 인격적 체현이 어느 정도인지를 지시해 준다. 일제는 그러한 종교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그 부대원의 대다수가 대종교의 수행으로 다져진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의 청산리대첩(1920) 등을 계기로 대종교인 10만 명 이상을 참살했다고 한다. 오늘 한국의 기독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또한 이에 더해서 내가 들고 싶은 이야기는 안창호 선생이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만일 그 얼굴이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바라보라. 곁눈으로 엿보지 말아라, 그리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라고 하면서 마음의 밀실에서라도 아내 아닌 이성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세계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느라 오랜 동안 아내와 가족과 떨어져서 살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고, 여성들은 그에게 친근하였고 존경의 마음을 깊이 품었다고 한다.(10) 안창호 선생은 정신 통일의 훈련과 의지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참선의 수양을 하였고,(11)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면서도 사람들에게 각자가 “저마다 가진 신앙을 따라서 기도”하라고 권했다고 한다.(12)

미주

(미주 1) 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동학 읽기”,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동경대전》, 71.
(미주 2) 존 쉘비 스퐁 지음,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 변영권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8, 44-45, 93.
(미주 3) 같은 책, 83-84.
(미주 4) 같은 책, 89.
(미주 5) 같은 책, 92.
(미주 6) 로즈메리 류터, 『신앙과 형제 살인-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 장춘식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1, 328.
(미주 7) 같은 책, 342.
(미주 8) 이은선,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와 한국적 聖性誠의 여성신학”,『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332.
(미주 9) 생평마당 엮음, 『한국적 작은교회론』, 대한기독교서회, 2017, 360-383.
(미주 10)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안창호 평전』, 도서출판 청포도, 2007, 348.
(미주 11) 같은 책, 23.
(미주 12) 같은 책, 265.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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