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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난민이었다

기사승인 2019.02.20  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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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난민이 너희 땅에서 네 ‘곁에’ 체류하거든 너희는 그를 억압하지 말라. 너희는 너희와 함께 있는 난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고, 너는 그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난민이었었다. 나는 야훼 너희 하나님이다.(레 19,33-34)

히브리어 게르는 전쟁, 기근 등의 이유로 자기 땅을 떠나 남의 나라에 가서 권리의 제한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기에 거류민이나 나그네 등 보다는 난민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선주민들은 그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거나 저임으로 일을 시키거나 이유없이 학대하거나 하는 일이 흔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같은 난민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낯선 것에 대한 거리감과 손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서입니다. 이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그래도 좋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에 대해 무비판적일 때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나 동경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같은 일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아주 작은 규모의 사건들은 사실상 비일비재합니다.

▲ 앙골라 루렌도 가족의 입국 허가 및 체류 보장을 촉구하며 홍주민 한국디아코니아 대표가 인천국제공항에서 함께 하고 있다. 앙골라에서 택시운전을 한 루렌도씨는 앙골라 내전시 콩고로 피난갔다가 다시 앙골라로 돌아왔지만 콩고 정부가 반군을 지원해 앙골라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지난해 12월27일 앙골라를 떠났고, 현재 인천국제공항에서 두 달째 생활하고 있다. ⓒ홍주민 대표 제공

그런데 하나님은 집단적으로는 그를 억압하지 말고 오히려 동족처럼 대하고 그와 가까이 있는 개인은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타인이 아니라 동족이고 이웃이며 ‘네’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웃의 범위를 손익의 관점에서 배타적으로 좁히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거북하고 더나아가 피하고 싶은 명령일 것입니다.

이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된 이웃을 네 자신 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서로’가 ‘끼리끼리’라는 뜻으로 이해될 때 그렇습니다. 사마리아아 사람의 비유가 그 명렁의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그들이 난민으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찾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경험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때 ‘노예’로부터의 해방은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내(~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대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그러한 사랑은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 길 위로 부르십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사랑을 일깨우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삶이 풍성해지는 오늘이기를. 난민을 비롯한 약자들에게서 아픔과 고통을 보고 이를 감싸안는 사랑이 너와 나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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