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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정신과 기독교 신앙 개조 (1) 신론의 개조

기사승인 2019.02.17  00: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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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6

이상에서처럼 다소 긴 탐색을 거쳐서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거기서의 핵심 정신은 무엇이고, 그 전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었고, 재외국민들의 참여와 지원, 이웃나라 중국과 미국 종교계와 교육계, 영국, 프랑스, 체코의 친한(親韓) 그룹 인사들 등, 세계가 함께 했고, 그들은 매우 놀랐다. 많이 지적되었듯이 3.1운동은 세계 피압박 약소국가 민족해방운동에도 선구적 실례가 되어서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운동, 베트남이나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1)

하지만 그래도 모두 알다시피 3.1운동으로 한민족은 구체적인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이후 독립운동의 전선은 심하게 갈라져 갔으며,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고문과 회유를 이기지 못하고 훼절했고, 국민들의 삶은 이어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제 황국 신민화 정책의 폭압으로 창씨개명과 징용, 징병, ‘일본군위안부’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고, 온갖 고초 후에 1945년 8월15일의 해방을 맞이했지만, 그러나 곧 이은 남북분단과 여운형, 김구 등의 암살, 6.25 동족상잔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이후 21세기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의 삶을 가장 옥죄는 것은 남북분단이고, 심하게 왜곡되고 뒤틀려진 이데올로기 문제이며, 오늘날은 거기에 더해서 냉전체제 이후 점점 더 심화된 세계 신자유주의 착취의 문제로 인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동안 남한 사회에서 한국 개신교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였다. 3.1운동 당시 조선에는 약 400명의 외국 선교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반대로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지적은 개신교 신도수의 감소를 말하지만 당시 30여만 명에서 지금은 천 만 신도를 가늠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부패, 탈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거기서 남쪽 사회 대형교회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와 반비례해서 여러 차원의 남남 갈등은 깊어만 간다. 보수 대형교회들이 오늘 남한사회의 태극기 부대와 페이크 뉴스의 진원지라는 지적은 그 신앙적 보수화와 이데올로기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오늘 한국 개신교가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3.1운동 당시 미약한 신생 종교의 수준에서 그와 같은 리더십을 발휘했는데, 왜 오늘날은 교회가 그때 외치던 ‘사회개조’나 ‘세계개조’ 대신에 오히려 스스로가 개조와 개혁의 대상이 되었고, 선포하던 평화와 사랑 대신에 갈등과 분쟁을 부추기는 존재가 되었을까?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듯이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전선에 사회․공산주의 노선뿐 아니라 평화시위의 한계를 말하며 무력항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는 등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특히 미국과 그 영향 아래 있던 개신교 중심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2) 해방 후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 미국 중심주의로 간 것이 두드러진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의식하면서 한국 여성조직신학자로서 특히 앞에서처럼 3.1운동 정신의 중층적 다원성에 주목하며 오늘 한국 기독교가 왜 이러한 현실이 되었는지, 그것을 넘어서 어떤 개혁의 가능성과 미래가 있는지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나는 오늘의 한국 교회와 기독교의 처지를 예전 나라로서 독립운동이 요구되던 한반도가 놓여있던 처지와 유비해서 보고자 하는데, 그래서 당시의 독립운동 정신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오늘날은 바로 그때 독립운동을 이끌던 주체가 오히려 독립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 또 다른 의미의 더욱 큰 압제자가 인류와 우리들 삶 앞에 나타나 있다. 즉 신자유주의 경제제일주의의 시장자본주의와 정신적 유물론을 말하는데, 이 상황에서 그래도 다시 종교가 개혁되고 개조되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찾을 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신론의 개조-민족의 새로운 창조이야기(new creation story)를 허하라

3.1운동 당시 국내에 있던 약 400명의 외국선교사 중에 80%이상이 미국 선교사였다고 한다.(3) 이것은 그 이후 세계정세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게 된 상황에서 이로운 일일수도 있었겠으나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서 그 이후 한국의 역사가 모든 면에서 미국 중심주의로 나아가 또 다른 미국적 ‘준(準)식민지’ 체재로 진행되는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 3.1운동 기독교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들 선교사들의 역할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국제사회와 빠르고 긴밀하게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을 일본이 매우 두려워했다는 것을 많이 들었다.

▲ 단군신화를 형상화 해놓은 각저총 씨름 벽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듣는 이야기는 이들 선교사들의 3.1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협조적이었거나 긍정적이지 않았고, 또 그 이후 한국 교회가 보수화되고 탈정치화가 가속된 데에는 이들의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당시 미국 외교정책이 일본과의 협력과 조화였으므로 미국 교회와 선교사들도 한국 교회에게 그러한 탈정치화와 총독부 식민지 지배에의 순응을 요구한 것 등이 있다.(4) 또한 일본 그리스도교의 반응도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조선인의 독립 요구를 무시하였고, “폐하(일본왕)의 적자” 운운하며 그리스도교와 일본의 조선지배가 양립가능하다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다.(5)

지구신학 시대의 새로운 창조이야기

하지만 그처럼 20세기 한반도에서 기독교가 전체주의화 하고 보수화되면서 그 자신에게도 그것이 얼마나 해악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요즈음 더욱 잘 보고 있다. 세계 정치에서도 기독교 절대주의가 타인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일까지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그 범주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절대주의화의 이유와 근거가 이미 기독교 신앙의 신론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그래서 그것을 흔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여긴다.(6) 그리고 그 일의 근거를 오늘 인류 삶에서는 기독교 밖의 다른 종교 전통이나 민족 지혜로부터 가져오지 않더라도 먼저 서구 기독교도 그렇게 중시여기는 근대 과학으로부터 더욱 보편적이고 실감 있게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지난 7-80년대부터 미국의 여성신학자 샐리 멕페이그(Sallie McFague) 등이 펼친 “지구신학 시대의 보편적 창조이야기”(An Earthly Theological Agenda)를 보면 이미 30여 년 전 그녀는 “생태학적 핵시대를 위한 신의 형상”(Models of God)을 탐색하면서 이제 인류는 자신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묶을 수 있는 공통의 “보편적인 창조 이야기”(a common creation story)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빅뱅이론’(the Big Bang theory)로 알고 있는 우주 탄생의 과학이야기인데, 지금부터 150억 년 전에 ‘빅뱅’이라고 하는 대폭발을 통해서 우주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계속 진행된 태양계나 지구, 인간, 인류문명 등의 탄생 이야기를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인류는 이렇게 20세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함께 그러한 보편적인 공통의 창조이야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의 편협한 인간 중심주의나 서구문명권 중심주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7) 또한 그러한 창조 이야기는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a story)라는 점에서 절대불변의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므로 얼마든지 인류의 창조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고, 여전히 우주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8) 당연히 신의 모습도 과정 속의 “계속하는 창조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민족 단군세기의 창조이야기

나는 이러한 발상을 오늘 한국 교회가 놓인 상황을 위해서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오늘 한국인들도 그가 아무리 기독인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성서가 가르쳐주는 창세기의 이야기만을 세계 유일의 창조이야기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지적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의 물음과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고유하게 전해져오는 단군세기(檀君世紀) 등의 창조이야기가 있음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시해 준다.

그 상기와 기억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닌 것은 3.1운동 전후의 항일독립투쟁에서 그 어느 다른 종교 그룹보다도 치열하게 나라의 독립과 자주, 세계를 품는 이상을 위해 투쟁한 그룹이 한반도의 ‘대종교(大倧敎)’였고, 이 대종교는 바로 세계와 한민족의 시원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바탕으로 우리로 하여금 한민족으로 독립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선취해서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가 동북아시아의 세계창조 이야기인 단군세기와 만나 온 과정과 내용을 살펴보면 그 이야기를 아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는 경우도 단군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유대문명의 창세기 이야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으로부터 환인, 환웅, 환검의 『삼일신고三一神誥』나 『신사기神事紀』의 셋이면서 하나인 ‘삼신일체(三神一體)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는 정도이다.(9) 즉 유대 기독교 문명이 ‘보편’이고, 한반도의 것은 그 아류의 ‘특수’라고 보는 입장인데, 나는 이러한 시각의 역(逆)이나 또는 각자의 독자성이 더욱 인정되는 시각이 오히려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은 왜 해볼 수 없는가를 묻고 싶다.(10)

오늘 근대 과학을 토대로 인류 문명을 모두 함께 어우를 수 있는 보편적 창조이야기와 지구신학이 가능하게 되었다면 서구 기독교 문명의 창세 이야기도 한반도의 창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특수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들이 전해주는 다양한 창조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앞으로 인류가 삶을 개척하고 전개시켜 나가는 데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자극할 수 있는 풍성한 종교의 창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시각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한국 교회와 그 신학과 신앙이 빠져있는 서구 중심주의와 기독교 절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민족과 세계, 기독교와 이웃종교, 기독교적 하느님과 이웃 종교의 초월 이해 등을 함께 포용하고 대화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 세계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기독교 절대주의와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 일을 이루기 어렵고, 그 신 개념을 개조하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도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하여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天)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고 밝히면서 “제 민족을 두고 세계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제 국토를 잃어버린 유랑 민족이나 할 일이다”라고 일갈했다.(11) 그러면서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평양은 한민족의 여러 서울 가운데 국혼을 잃지 않고 다른 민족에게 대해 ‘신하’라고 칭하는 ‘칭신’(稱臣)의 치욕을 겪지 않은 곳(평양과 부여夫餘)중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평양은 한민족 단군세기 고신도(古神道)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다른 민족과 겨루면서 국위를 선양한 유일한 곳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 평양을 한민족 교육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12) 3.1운동이 어떻게 오늘 우리가 당면해 있는 한반도 통일과 평화의 물음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시사해 주고, 한국 보수교회들에게 절대가 되는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그들이 악마화 하는 북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국 기독교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초월과 같은 것이다.

미주

(미주 1) 윤경로, “1910 민족해방운동과 3.1운동”, 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10, 71.
(미주 2) 이승만 독립노선의 미국중심주의에 대한 것은 다음의 논문에 여러 가지로 지적되어 있다. 이준식, “김규식의 파리평화회의의 활동”,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식, 학술심포지엄, 같은 자료집, 46.
(미주 3) 양현혜, 같은 글, 824.
(미주 4) 이만열, 같은 글, 22.
(미주 5) 양현혜, 같은 글, 832.
(미주 6) 이은선, “유교 문명사회에서의 한국교회와 제2의 종교개혁”, 변선환 이키브 편, 『종교개혁500년, ‘以後’신학』,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7, 511.
(미주 7) Salli McFague, "An Earthly Theological Agenda", in, Ecofeminism and the Sacred, Carol Adams (ed.), New Your: Continuum, 1993, 84ff,; 이은선, “과학시대에서의 종교와 여성-한 한국 에코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 분도출판사, 1997, 105이하. 본인이 이 논문을 발표한 것도 어느덧 20년이 넘어간다. 처음 1995년 이화여대 여성신학연구소의 포럼에서 발표한 것이고, 이후 1997년 분도출판사에서 ‘아시아신학’ 시리즈의 한 책으로 나온 본인의 책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에 수록되었다. 한국 여성신학의 통합학문적 성격을 지시하고자 했다.
(미주 8) Salie McFague, ibid., 92ff.
(미주 9)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 윤리”, 『신학과 세계』, 감리교신학대학, 1977, 9; 참조, 허호익, 『단군신화와 기독교-단군신화의 문화사적 해석과 천지인 신학 서설』, 대한기독교서회, 2003.
(미주 10) 여기서의 이 이야기는 지난 해 11월 27일 생평마당이 주관한 2018년 가을 포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한국교회-평화신학과 발선(發善)>을 위해서 쓴 논평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참된 발선(發善)의 신학이 되기 위해 한국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에서 다시 가져왔다.
(미주 11) 안병욱, 안창호, 김구, 이광수 외, 같은 책, 226.
(미주 12) 같은 책, 247-248.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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