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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파의 분류

기사승인 2019.02.15  17: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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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미완성의 장면들 속에서의 복음전파 (8)

우리가 앞선 호에서 언급된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고지의 성서의 상황으로부터 충돌과 승리의 성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나타난 충돌에 관하여 묻도록 요구받는다. 우리는, 죽음의 권세가 우리의 정황 속에서 무섭고 강력한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 어디인지?를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오늘날 많은 것들은 대답을 하기에 곤란하다.

충돌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문화와 우리 교회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탐욕의 엔진을 가지고 소비경제의 유혹하는 힘으로 작용하며; 군사력의 매혹시키는 일, 군사력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불안전과 근심과 잔인함, 그리고 복수에 대한 갈망 속에서 작용하고; 우리와 이웃 모두가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수단으로 인식될 때까지, 인간적이며 비인간적인 삶의 모든 것을 상품의 교환 정도로 축소하는 것 속에서 작용한다.(1)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시대에 복음과의 중심적인 충돌은 신학적 우상을, 즉 대부분의 우리의 삶에 대해 주권을 발휘하게 된 우상을, 나타내는 사회 경제적·정치적 실천과 관계가 있다.(2)

이런 가치들의 유혹하고 지배하는 힘은 경제적 실수도, 정치적 사고도, 혹은 군사적 오산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 가운데에서 가차없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죽음의 권세의 일이다. 복음을 사회 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향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내가 “자유주의적”이거나 당파적이거나 새롭거나 현대적인 범주를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 하나님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는 곳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곳은 자본주의 체제일 수밖에 없다. ⓒGetty Image

실제로 성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은 엄밀히 그리고 정확히 힘과 재산과 접근방식과 관계된 사회적 관계에 관심을 가져왔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복음에 대한 성서적 표현의 관점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 주제는 궁극적으로 사회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위한 권세와 죽음을 위한 권세, 그리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충성과 우리의 상상력을 위한 그것들 사이의 투쟁에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가 언제나 우리에게 숨겨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이 치명적인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는 우리에게서 숨겨져 있다.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그 승리가 이루어졌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웃사랑의 연약한 속에, 자비의 어리석음 속에, 긍휼의 취약함 속에, 절망과 잔인함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삶이 나타나게 허락하는 용서와 관대함에 대해 망설이는 양자택일 속에 숨겨져 있다.(3)

그것은 언제나 숨겨져 있는 십자가 속에, 십자가의 능력에 대한 모든 후속의 표현들 속에 숨겨져 있다. 하나님의 승리에 기초를 둔 소식은 상품의 치명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아무런 주장도 하지 못하며 우리의 삶을 정의하기 위한 합법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품의 두려운 능력과 주장에서 자유로우며, 그럼으로써  다른 삶을 살기에 자유롭다.

승리 소식이 일으키는 위험

충돌과 승리의 형태는 고지되는 것에 대해 결정적이다. 앞선 호에서 고지는, 사회 경제적·정치적 현실에 대해 세심함을 가진, 사회비평에 대한 충분한 관심 속에서 표현되어야만 한다. 고지는 쉽고 분명하며 동의된 문제들에 관한 악의 없는 수다가 아니다; 고지는 언제나, 여전히 생명력과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패배한 권세에게 도전하여 폭로하는, 자유로운 도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승리 고지는 위험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청중들에게 자명하지 않은 것을 믿고, 여전히 우리의 사리사욕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항하여 믿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고지는 자명하지 않은 승리이지만, 결코 분명하지 않은 평결을 기초로 하여 사람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도록 요청하는 승리를 단언한다.

이 숨겨진 승리와 이 용감한 고지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관계한다. 나는 상품숭배의 살상력이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에 관계한다는 것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3 세계 부채의 공적인 경제문제에 관계하지만, 그것은 또한 은밀한 성적 교류와 가족 생활의 위기에 관계한다.

그것은 공적인 국제적 안전에 대한 큰 근심에 관계하며, 세대간의 충돌에 관한 지역적인 근심에 관계한다. 그것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역점을 두어 다룰 수 없는 무주택의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에 관한 큰 절망에 관계하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된 대화의 작은 절망에 관계한다. 그것은 피조물의 모든 국면과 모든 조직에 관계한다. 우리들의 엄청난 유혹과 매진상황의 한 가운데에 복음과 복음의 전달자들이 서 있다.

실생활이 된 승리의 사유화의 위기

마지막으로, 앞선 호에서 이야기된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의 행위를 숙고하며 좋을 것이다. 복음의 수용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향해 “감동되어”(moved)야만 하는 감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복음의 충격은 단순한 감격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날지 모르며 그리고 벗어나야만 하는, 갑작스럽게 도달하거나 서서히 분명해지는 결정이다.

신속한 회심이 있을지 모르나, 손쉬운 회심은 없다. 왜냐하면 회심은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 온 의미와 보안의 조직망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식의 손쉬운 용인을 상상하는 사람은 누구든, 내가 생각하기에, 소식성(newsness)의 희생에 관하여 낭만적이거나, 위험과 손해의 염려에 관하여 획일적이다.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의 위기는 이집트의 안전함을 뒤로하고 떠나라고 노예들을 불렀으며, 그들은 곧 되돌아가기를 갈망했다(민 14:4).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의 위기는, 우리가 가장 열망하는 모든 보상들을 바벨론 제국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듯했던 반면에, 바벨론의 포로들을 떠나라고 불렀다. 베들레헴의 탄생고지는 목자들로 하여금 로마 지배를 받는 예루살렘의 양고기 시장에서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그들이 발견했던 위안 전체를 위태로운 경지에 빠뜨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시력의 선물은 바디매오에게 자신의 삶을 위한 새로운 책임을 떠맡고 자신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하도록 요구한다.

“서구의 곡해된 양심”에 의해 포위된,(4) 우리들 중 많은 이는 과도한 의무와 왜곡된 책임의 능력이 아주 막중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비뚤어지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정황 속에서 소식의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는, 내가 제안하기에는, 소비추구와 이기적인 무기와 자기만족을 주는 잔인성의 언뜻 보기에는 전능의 세계로부터 우리의 삶, 우리의 육체,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해방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은 상품의 탐욕의 둘레에 있는 삶의 배열에 대한 양자택일의 것을 제공한다.

현대에서 승리의 소식을 사유화 하는 방식

우리 모두는 그 소식과 함께 얼마나 멀리 가고, 얼마나 빨리 가며, 얼마나 용감하게 가고, 얼마나 급진적으로 갈지를 결정하고 있다. 어떤 이는 시민 불복종을 통한 급진적인 방법으로 소식을 사유화할(appropriate) 것이다. 어떤 이는 좀더 단순한 생활 형식들을 더욱 조심성 있게 직면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재정과 성(性) 그리고 아동양육을 양자택일의 방법으로 다시 정리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동일한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이는 전적으로 저항할 것이다.(5) 특정한 것에 관한 아무런 율법이나 규정 심지어는 확실한 지침은 없다. 실제로 소식의 실생활로 실현된 사유화는 결코 율법이 아니라 언제나 초청이며, 결코 강제가 아니라 언제나 위임과 허락이다.

사람들을 이 용감한 드라마로 초청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이 기이하고 혁명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신뢰할 만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의 복음적 과제이다. 이것이 “좀더 훌륭한 방법”에 관한 역-대화(a counter-conversation)라는 것은 우리 모두와 우리 각자에게 분명하다. 여러 날에 걸쳐 우리는 “덜 훌륭한 방법”에, 즉 우리가 반격하고 싶지 않은 좀더 평범한 방법에 열의에 차서 전념하게 된다.

이 양자택일의 방법에 관한 소식은 잔소리나 질책이나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초청이다. 그것은 허락이다. 그것은 축하다. 모두가 참여할지 모르는, 이 끝나지 않은 역 드라마의 진행(conduct)은 우리에게 위탁된다.

미주

(미주 1) 상품의 파괴적인 유혹에 대하여 Abraham Heschel, Who is Ma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5) 83-87과 여러 곳, 그리고 Brown, Society as Text: Essays on Rhetoric, Reason, and Reality (Chicago: University Press, 1987), 64-79를 보라.
(미주 2) 이 주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나는 환원주의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서로에게 영향을 발휘하는 우상들과 억압의 복합적인 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는 내 분석을 현시대의 위기의 이 모든 요소들을 언급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미주 3) 용서의 공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Carter Heyward et al. and the Amanecida Collective, Revolutionary Forgiveness: Feminist Reflections on Nicaragua (Maryknoll, NY: Orbis Books, 1987)을 보라.
(미주 4) 인용구에 대해서는, Krister Stendahl, "The Apots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and Other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78-96을 보라.
(미주 5) 막 4:1-20에 있는 예수의 비유는 이러한 불가피한 현실을 완전히 인정했다.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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