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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땅과 토지세의 문제(수 1:1-9; 고전 10:1-13; 눅 9:57-62)

기사승인 2019.02.14  20: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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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일곱째 주일(2월17일)

1. 하나님 나라: 주현절기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중요한 것이 공감과 지혜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육 및 모든 기독교 교육이 소외되고 약한 자에 대한 공감에서 나오는 지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출발하실 때 처음 선포하신 것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께서 현현하신 주현절기는 사실 이 하나님 나라 선포에 그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를 통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나라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 곧 하늘나라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하늘에 있는 나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야훼(יהוה, YHWH, 나는 나다, 출 3:14)’라는 이름이 나올 때는 ‘아도나이(Adonai)’, 곧 주님이라고 바꿔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일 년에 딱 한 번, 대제사장만 발음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자음만으로 구성된 YHWH가 나오면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여호와(YeHoWaH)로 부르기도 했는데, 본래 이름인 야훼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우리말로 하나님 혹은 주님으로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분’도 하나님을 바로 부르지 않고 비유적으로 부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나 하나님의 나라나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저 높고 아름다운 우주 어느 한 곳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만약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으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땅”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은 그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한 방법, 곧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들려줍니다. 

2. 역사 속 하나님 나라: 요단 강 건너 그 땅!

구약 본문 말씀 여호수아서는 역사서 12권의 첫 번째 책입니다. 따라서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략 30여 개 이상의 가나안 땅 도시국가에 거주하는 대적들을 세 번의 정벌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능력 있는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심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 1:1-2)

지리적으로 요단강 건너는 가나안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으로 가는 경계선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요단강을 건넜다는 의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결단을 내리고 죽음을 각오했을 때, 혹은 결심이 섰을 때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시저는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은 길은 로마를 점령하든가, 아니면 폼페이우스에게 멸망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시저는 루비콘을 건너기로 결심한 순간, 그 목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심으로 시저는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로마의 원로원에 승전보를 알리는 세 마디의 말을 남깁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요단강 지도, 요르단 강의 세 기원중 하나인 헤르몬 강이 발원하는 곳, 갈릴리바다 남쪽에서 요단강으로, 요단강이 흘러 사해로, 사해로 흘러들어감, 요단강

고대 근동의 약자였고, 노예였고, 집 없는 서러움으로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요단강 앞에서 결단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해내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 건너의 땅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볼까요?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 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3-6)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앞으로 점령할 요단강 건너 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성 속에서 그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땅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성서의 전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땅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그 소유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람이 조카 롯이 사로잡혔음을 듣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승리 후에 아브람이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천지(שָׁמַיִם וָאָרֶץ, 天地)의 주재’로 부르고 있습니다(창 14:15-19 참조).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레츠)’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3개월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도착하고 장막을 친후, 모세가 시내 산에 오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세계(כָּל-הָאָרֶץ, whole earth)’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출 19:3-6 참조). 여기서 세계는 온 땅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에레츠’는 추상적 개념의 세계가 아니고,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실제적 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씀은 단순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넘어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거주하며 살아갈 법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땅의 실제적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에 살 권리가 보장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땅의 실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려면 지켜야 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삶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땅은 약속의 선물인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입니다. 구체적인 땅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주신 것은 책임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고대 근동에 힘으로 토지를 소유한 나라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토지는 너희들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년들의 꿈이 ‘건물주’입니다. 따라서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이 말은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Ruth Glass)가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신사 계급을 뜻하는 ‘젠트리’에서 파생된 말로, 첫 번째 의미는 ‘빈민가의 고급 주택지화’입니다. 가령 과거 조용한 한옥마을이었던 경복궁 인근의 삼청동, 북촌, 서촌은 2010년 이후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지로 주목받으며 새로운 상권이 자리 잡게 되며 고급화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이렇게 ‘구도심이 번성하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쫓기는 현상’을 말합니다. 우리 용호동에도 오륙도 SK가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이죠.

▲ 젠트리피케이션

따라서 세상의 모든 불평등의 원인은 지대(地代, 땅주인에게 내는 돈)라고 생각한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인 헨리 조지(H. George, 1839~1897)의 말은 타당합니다. “땅값은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서 온기를, 배고픈 사람에게서 음식을, 병자에게서 약품을, 불안한 사람에게서 평온을 빼앗는다.”

▲ 헨리 조지와 그의 책 『진보와 빈곤』

사실 인류는 땅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땅을 지배하는 자가 땅 위의 모든 것을 함께 지배한 역사가 바로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따라서 “과학 기술과 산업은 나날이 진보하는데 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바로 땅값에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질문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고 답을 내립니다. 그러나 헨리 조지는 노동의 착취가 아니라, 땅에서 찾습니다. 즉 땅을 제공하면 받는 돈인 지대가 사람들이 누려야 할 부(富)를 부당하게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2016)에서 헨리 조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투자하는 자본가는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기업을 경영한다. 노동자는 열심히 일을 하지, 그런데 땅 주인인 지주(地主)는 뭘 하는가? 땅을 제공한다고? 땅은 그냥 땅일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땅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돈을 가로채는가?”

헨리는 지대라는 도둑질 때문에 노동자가 가난해진다고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헨리의 해결책은 ‘단일 토지세(Single tax)’라고도 불리는 ‘토지가치세’입니다. 땅을 빌려준 대가로 지대를 받았다면, 그 지대를 모조리 세금으로 걷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자연이고, 자연은 모든 피조물들이 공평하게 사용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지를 제외하고 ‘자본’과 ‘노동’만을 중시하는 주류 경제학과 좌파 경제학 양 진영이 20세기 경제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헨리 조지의 사상은 학계에서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 교과서에 헨리 조지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지투기에 따른 소득불균등과 사회갈등 문제, 환경오염문제 등 토지사유제도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한 오늘 대한민국에서 헨리 조지는 부활해야 할 경제이론가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인 땅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의 불평등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요청은 여호수아의 음성을 넘어 헨리 조지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지대는 과거에 대한 도둑질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한 도둑질이며, 미래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린이들의 타고난 권리를 빼앗는 사악한 절도이다.”

3. 하나님 나라 가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중요한 비결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을 설명하며 먹고 마심에 있어서 신령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신학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것을 섬기며 따르다가 멸망당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다가 실패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우리들의 본보기가 된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5-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것 다섯 가지 정도가 나옵니다. ‘악을 즐겨 행하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주를 시험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반석에서 나오는 생명의 물을 마셨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종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행하지 않고 우상숭배하지 않으며 음행하지 않고 주를 시험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는 삶,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참된 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12)

4.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가는 이들에게 당부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쟁기를 잡고 올바른 방향을 보아야 소가 쟁기질을 바로 합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쟁기질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길을 갈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을 즐겨 행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악한 이들과 악인의 잘됨을 돌아볼 때 무너집니다. ‘우상 숭배’는 세상의 물질과 부귀를 뒤돌아 볼 때 빠지는 유혹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눅 9:23)보다, 맘몬신을 따르는 것이 행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음행’과 ‘주를 시험하는 것’, ‘원망하는 것’ 등도 잠시 잠깐 세상의 유혹에 빠질 때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를 보지 않고 뒤를 돌아볼 때 걸려 시험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생명과 사명의 길에 제자들은 뒤를 돌아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따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길의 어려움을 깨닫고 포기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은 가족과의 작별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합니다. 본문에 세 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말씀을 볼까요?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 9:57-61)

하나님 나라를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헨리 조지의 단일 토지세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 나라를 일구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땅의 소유와 작은 가정 공동체의 한계에 집착하여 참된 하나님 나라의 땅의 개념을 깨닫지 못합니다. 처음 나오는 어떤 사람을 통해 우리는 거처가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하고, 머리 둘 곳도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땅의 소유가 불평등한 세상에 예수께서는 머리 둘 곳도, 거처도 없습니다.

또한 두 번째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장사해 묻어야 할 땅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할 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혹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인생들을 위해, 우리가 거할 자그마한 땅을 위해 땅의 불평등을 거부하고 땅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인 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토지개혁의 길로 나가는 것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는 길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 맞는 일이 될 것입니다.

5. 훗날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휴정(休靜, 1520~1604) 스님이 있습니다.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한시 가운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踏雪野中去)’라는 한 시가 있습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敵(금일아행적)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훗날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지난 2019년 2월 12일 전국 땅값의 표준이 되는 표준지 공시지가 인상 발표가 있었습니다. 전국 평균 9.4%, 서울은 14%, 부산이 10% 정도 올랐습니다. 공시지가가 오르면 자연히 세금도 오르게 됩니다. 건물주들이 세입자들에게 오른 만큼의 세 부담을 지우려는 우려도 있지만, 토지 소유를 통한 부는 하나님의 것인 토지를 사유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불평등의 기원입니다. 불합리한 공시지가 가격을 제대로 매겨 세금을 통해 거둬들여 복지 예산으로, 나아가 기본소득(생활임금)으로 확충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성서의 정신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올바른 분배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사도 바울도 우리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지금 우리가 가는 올바른 이 새로운 길이 훗날 뒷사람들의 표준이요, 길이 될 것입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고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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