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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담론이 구분한 환상과 실재

기사승인 2019.02.14  20: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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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론과 실재: 라캉과 기독교 (2)

라캉은 ‘세미나 20: 앙코르(Encore)’에서 ‘전체’(whole)로서의 남성적인 축과 ‘비전체’(not-whole)로서의 여성적인 축에서 획득될 수 있는 두 가지 주이상스에 대해 설명하며 환상과 실재를 통해서 각각 얻어질 수 있는 서로 다른 만족에 대해 이야기한다.(1)  이 중에서 필자가 먼저 살펴볼 것은 잉여를 산출하는 언어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환상에 의한 만족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라는 하이데거의 명제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언어라는 상징 시스템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대면하는 현실(reality)은 실재(the Real)가 아니라 환상(fantasy)으로서의 상징계(the Symbolic)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있어서는 안 되고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shouldn’t be/never fails)” 남근적인 주이상스(Phallic jouissance)를 추구하게 된다.(2) 여기서 ‘남근적인’(phallic)이라는 말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지 않을 때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다”(3)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들이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never fails)이라고 생각하며 갈망하는 ‘환상 대상a’(objet petit a)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처음부터 ‘얻을 수 없는 것’(shouldn’t be)이어야만 하는 남근적 기능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에 우리를 왜곡된 만족을 추구하도록 이끌어간다.

환상이 주는 만족: 남근적인 주이상스(Phallic jouissance)

알랭카 주판치치는 이렇게 환상 안에서 얻어지는 만족이 개인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칸트에게서 발견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윤리란 정언명령 그 자체를 순수하게 추구하는 것을 말하며 인간은 이성의 한계라는 제약 안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칸트는 신의 의지에 의존함으로써 이러한 순수 욕망에 무한히 다가가기 위한 영혼의 불멸성과 이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초월적 주체를 위한 신의 현존을 요청한다.(4)

여기서 칸트가 추구하는 최고선에 대한 무한성과 초월성은 라캉적 의미의 환상 속에서 추구되는 만족인 남근적인 주이상스의 성격을 반영한다. 칸트의 윤리가 주체를 밖의 대상을 통해(초월성) 끊임없이 지속되는 도착적인 욕망(무한성)인 ‘사드적 덫’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주판치치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5) 주판치치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이 남근적인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대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 욕망을 제외한 자신의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한다.(6) 아버지를 통해 주입된 ‘대타자의 욕망’(the desire of the Other)은 그녀가 존재하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이며 그 욕망의 원인이 되는 환상 대상은 그녀의 삶을 이끄는 유일한 동인으로 작동한다.

▲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 왕 ⓒGetty Image

왜곡된 만족의 환상은 언어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가부장적인 담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라캉 철학자 백상현은 ‘고정 관념’이라는 용어를 통해 남근적인 주이상스가 어떻게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상징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철학의 역할을 주체가 이러한 환상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방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7) 그에 따르면 라캉이 말한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les non-dupes errent)라는 명제는 프랑스어로 ‘아버지의 이름의 복수형’(les noms-du-père)과 동음이의어로 우리가 한 가지 아버지의 이름, 즉 하나의 대타자만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을 때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8)

실제로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정의가 결핍된 세상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은폐하려고 했던 박근혜 정부의 환상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멈추지 않는 애도, 즉 상처의 지속으로 인해 점점 균열이 생겨났고 이 균열은 JTBC가 발견한 태블릿을 통해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밝혀짐으로써 더 이상 다른 환상으로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벌어지게 되었다.(9) 결국 유가족들의 지속되는 상처는 바울에게 전이된 예수의 성흔(Stigma)과 같이 많은 이들에게 확산되어 그들을 광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진리 산출 효과를 생성한다.(10)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환상 너머에 있는 실재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틈새, 즉 가부장적인 담론 안에서 드러나는 구멍인 주체의 상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수 밖에 없다.(11)

이러한 상처의 지속은 2018년 10월 31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정신건강과 종교: 조울증의 철학> 세미나에서 언급된 해석자들의 공동체의 목표인 “언어의 지속적인 발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조울증은 ‘생각에 관련된 장애’인 정신분열증과는 구별되는 ‘기분에 관련된 장애’로 영미권에서는 자연스럽게 치료받을 수 있는 병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비정상적이라고 낙인이 찍힐 수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12)

로버트 코링턴(Robert S. Corrington)은 이 세미나에서 자신이 어떻게 조울증을 끌어안고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절제된 약물 사용과 함께 비슷한 상처를 지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기분으로부터 ‘창조적인 거리두기’(creative distancing)를 수행함으로서 조울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3) 뿐만 아니라 코링턴은 조울증이 인류 문명의 형성에 기여한 수많은 천재들이 지니고 있었던 창의성의 원천이었기도 했음을 지적하면서 상처를 지속하는 삶에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지속적인 언어의 발명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는다. 상처 받은 이들이 서로의 상처가 지닌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석자들의 공동체는 이렇게 가부장적인 담론이 형성하는 환상에 속지 않고 주체가 끊임없이 방황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를 이끌면서 대타자의 억압으로부터의 끊임없는 탈주를 시도한다.

실재가 주는 만족: 몸의 주이상스(Jouissance of the body)

지금까지 논의된 남근적인 주이상스는 우리가 전체라고 여기는 세계, 즉 언어라는 상징 시스템을 통해 세워진 환상 안에서 추구되는 주이상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라캉은 이러한 환상에 갇혀있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존재의 모든 필요는 그것이 부흥하지 않는 다른 만족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다”(All the needs of speaking beings are contaminated by the fact of being involved in another satisfaction that those needs may not live up to.)(14)는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 세미나를 통해서 라캉이 의도한 주된 목적은 전체가 아닌 비전체의 영역에서 얻어지는 만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이번에는 남근을 초월하는 몸의 주이상스(Jouissance of the body)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다.(15) 환상 안에서 추구되는 왜곡된 만족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만족인 몸의 주이상스는 비전체의 영역에 속해 있기에 전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적인 방법의 사랑에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남성이 욕망하는 그녀(Woman)가 ‘기표의 결핍에 대한 기표’(the signifier of the lack of a signifier)로서 빗금이 처져야만 하는 이유이다.(16) 따라서 남성이 여성의 몸의 주이상스를 획득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환상에서 나와 스스로를 비전체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 즉 자기 스스로를 거세(castration)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17)

주판치치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체에서 비전체로의 이행은 ‘욕망을 횡단’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미주 18) 여자의 명예라는 대타자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시뉴는 결과적으로 원수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토대인 그 명예를 포기하는 행위를, 즉 그녀가 속한 상징 시스템 안에서 작동되어서는 안 되는 불가능한 행동을 감행하는 인물이다.(19) 그녀는 언어라는 전체의 영역 너머에 있는 비전체의 영역에서 그녀에게 손짓하는 몸의 주이상스를 향한 충동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몸이 원하고 있는, 즉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경험한 만큼 알 수 있는 이 만족을 통해 시뉴는 욕망을 횡단하여 실재의 윤리(원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불가능한 윤리)를 실현하는 주체가 된다.(20)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진정한 주이상스는 환상 안에서 추구되는 남근적 주이상스가 아니라 시뉴의 사례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실재를 향한 충동 안에서 추구된 주이상스, 즉 어떠한 의미도 발견될 수 없어 우리가 무(無)라고 부르는 신비로부터 얻어지게 되는 몸의 주이상스이다.

이렇게 전체를 초월한 무로서의 실재는11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린 <현대철학과 기독교 신앙: 탈자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세미나에서 코링턴에 의해 언급되었다. 코링턴은 스스로를 끊임 없이 창조하는 ‘무로서의 자연’(Nature naturing)과 ‘세계의 무수한 질서인 자연’(Nature natured)을 구분하며 존재를 초월한 무를 지향하는 ‘탈자적 자연주의’(ecstatic naturalism)가 바로 종교적 자연주의라고 명명한다.(21)

라캉적인 의미에서 이 무로서의 자연이 난포착적인 실재계(the Real)에 대응된다면 무수한 질서인 자연은 실재를 마주 하지 않기 위한 무수한 기표의 연쇄로 질서 지어진 상징계(the Symbolic)와 공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탈자적 자연주의는 결국 환상에서 벗어나 난포착적인 무로서의 실재를 대면함으로서 얻어질 수 있는 몸의 주이상스에 대한 추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실재와의 대면이 종교적 자연주의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 서는 ‘코람데오’(Coram Deo)가 왜 매번 인간에게 실패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인간은 신을 통해 온전한 만족을 얻도록 창조되었지만 우리가 대면하는 신은 언어에 의해서 포착될 수 없는 무(無)로서의 신비이기에 인간은 자아가 소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언제나 신이 아닌 환상이라는 우상에 붙들려 결국 신을 대면하기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폴 틸리히의 신론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실재로서의 신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학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을 일으키는 어떤 대상(22) 에 관한 것이며 이 대상은 비존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존재가 유지되도록 지탱하는 ‘존재의 기반’(the ground of being)(23)으로서의 신을 의미한다. 이 신은 본질과 실존을 넘어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틸리히의 관점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심지어 신을 부인하는 행위와도 같다.(24)

라캉의 관점에서 틸리히의 신론을 읽는다면 결국 신학이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인 실재로서의 신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라고 말해질 수 밖에 없는 이 실재로서의 신은 우리들을 끊임없이 환상 가운데로 내몰며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된다.

틸리히의 신학을 통해서 우리가 실재를 존재의 기반으로 받아들일 때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를 추구함으로서 얻는 만족인 남근적 주이상스와 실재와의 대면을 통해 얻어지는 만족인 몸의 주이상스의 차이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신은 존재의 기반이기에 신을 통한 만족(몸의 주이상스)은 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 즉 환상 안에서 욕망의 원인인 대상a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얻어질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찾던 신은 존재의 기반으로서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 즉, 전적 타락이라는 실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미 주어진 신의 은총(prevenient grace)이라는 존재의 기반을 가지고 있기에 현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신을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눈 앞을 가리는 환상을 걷어내고 그저 드러나는 실재를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필자는 대타자로서의 영지주의적인 신과 실재로서의 기독교적인 신의 차이를 발견한다. 영지주의의 신은 환상 안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접근할 수 있다고 가정되는 대타자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이미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환상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난포착적인 실재로서의 신이다.

이는 누가복음에 언급된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도 드러나 있지 않은가?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리여져서’(눅24:16)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있던 나그네의 실재를 알아본다(눅24:31a). 즉,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어떤 경험적인 사건을 통해 몸의 주이상스를 획득함으로서 실재를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그들의 눈을 통해서는 예수를 다시 볼 수 없었다(눅 24:31b). 그들이 인식하는 현실은 오히려 실재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재를 보려고 하면 할수록 대타자에 의해 주입된 일련의 상징들은 실재가 드러나는 상징계의 구멍을 더욱 강력하게 봉합한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표현되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의 기반인 실재로서의 신이 아니라 드러난 실재를 인간의 언어로 메워버린 대타자라는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틸리히와 사신신학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로저 올슨(Roger E. Olson)의 주장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올슨은 틸리히의 죽음이 그의 신학에 대한 사신신학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틸리히가 말한 신의 존재하지 않는 속성이 의미하는 것은 피조물과 구별되는 신의 비물질성이라고 주장하면서 틸리히를 변호한다.

그는 1965년에 “하나님의 죽음”을 주장한 신학자들(“기독교 무신론자들”, Christian atheist)을 만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틸리히로부터 그런 주장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틸리히가 말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God does not exist)라는 발언을 오해했다. 문맥에 따르면, 이 발언은 분명 하나님이 존재하는 다른 사물과 같은 유한한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하나님은 실재하시지만 존재하시는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물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25)

올슨은 존재의 개념을 물질적인 것과 동일시하면서 틸리히의 존재하지 않는 신을 영지주의적인 대타자로서의 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 철학 전통에서의 존재 개념은 남근적 주이상스에 의해 비롯된 ‘기표성의 존재’(being of signifierness)에 지나지 않는다.(26)  즉, 우리가 물질이라고 인식하는 것들은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물질적이지 않으며 단지 기표들의 연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반면에 기표의 이면에 있는 난포착적인 실재는 몸의 주이상스를 가져오기에 어떠한 점에서 가장 물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이 “몸의 주이상스 안에서 기표성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때 왜 자신이 ‘유물론의 이상’(the ideals of materialism)에 굴복하게 되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27)

유물론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물질성을 나타내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물질적이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가진 이상(진정으로 물질적인 것에 대한 추구)은 진정한 만족인 몸의 주이상스와 관련된 실재를 반영하고 있기에 라캉 또한 이들의 이상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틸리히에게 영향을 받은 기독교 무신론자들은 실재로서의 신을 말하고자 했던 틸리히와는 정반대로 환상으로서의 대타자를 기독교 신의 자리에 가져다 놓고서 신의 죽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틸리히가 사신식학자들을 통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신이 죽었다는 그들의 주장 자체보다도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신이 바로 영지주의적인 대타자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라캉이 외부(extra)에 있다는 점에 한해서 자신이 여성의 주이상스를 믿는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28) 적어도 그의 인생 후기에 개최된 세미나20에서의 라캉은 전체로서의 대타자 외부(extra)에 있는 여성의 축에 위치한 몸의 주이상스, 즉 실재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여지를 남겨두었기에 실재로서의 신에 대한 관심은 실재계를 중심으로 라캉을 새롭게 해석한 무신론적 기독교인 슬라브이 지젝(Slavoj Žižek)에 의해서 다시 조명될 수 있었다. 지젝은 대타자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틸리히 이후의 기독교 무신론자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독교 신학의 참된 핵심을 그리스도를 통해 실재를 드러내는 계시적 측면에서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실재로서의 신을 긍정하고 있기에 무신론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무신론적인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제부터 필자는 이러한 지젝의 관점을 통해 성서 내러티브 속에 나타나 있는 실재를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독교 신학의 독특성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기독교 내러티브가 영지주의적 환상으로서의 세속 문화를 극복하는 유일한 담론으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주

(미주 1) Jacques Lacan, On Feminine Sexuality: The Limits of Love and Knowledge: Book XX: Encore 1972-1973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c, 1998), 56.
(미주 2) Ibid., 59.
(미주 3) 자크 라캉, 『욕망이론』, 권택영 엮음(서울: 문예출판사, 1994), 283.
(미주 4) 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이성민 옮김(서울: 도서출판 b, 2004), 122.
(미주 5) Ibid., 99.
(미주 6) Ibid., 386.
(미주 7)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파주: 위고, 2017), 11-12.
(미주 8) Ibid., 36-37.
(미주 9) Ibid., 80-81.
(미주 10) Ibid., 54-55; 57.
(미주 11) Ibid., 68-69.
(미주 12) 로버트 코링턴, “정신건강과 종교: 조울증의 철학” 세미나,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2018/10/31, 3.
(미주 13) Ibid., 13.
(미주 14) Jacques Lacan (1998), On Feminine Sexuality, 49.
(미주 15) Ibid., 74.
(미주 16) Ibid., 73.
(미주 17) Ibid., 72.
(미주 18) 알렌카 주판치치 (2004), 『실재의 윤리』, 353.
(미주 19) Ibid., 352.
(미주 20) Ibid., 386.
(미주 21) 로버트 코링턴, “현대철학과 기독교 신앙: 탈자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세미나, 감리교신학대학 기독교통합학문 연구소, 2018/11/1, 11-16.
(미주 22)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Three Volumes in On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12.
(미주 23)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2), 160.
(미주 24) Paul Tillich (1967), Systematic Theology: Three Volumes in One, 205.
(미주 25) 로저 E. 올슨, 『신학논쟁』, 박동식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501-2. (※ 볼드체 강조는 필자)
(미주 26) Jacques Lacan (1998), On Feminine Sexuality, 71.
(미주 27) Ibid., 71.
(미주 28) Ibid., 77.

김태호(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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