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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지혜(신 4:32-40; 고전 3:18-23; 막 10:13-16)

기사승인 2019.02.12  19: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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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여섯째 주일(2월10일)

1. 신학교육주일

아기를 키워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장난삼아 손가락을 부여잡고 “아야, 아야. 아빠 아파!”하면 아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빠의 손가락을 쥐고 “호~”하고 불어줍니다. 엄마가 물건을 떨어뜨려도 두세 살 된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와 물건을 주워 엄마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타인이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타인이 행복해하면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감능력’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죄설을 말하지만, 원죄설을 비껴가는 것이 바로 공감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말도 못 배웠고, 사회성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두세 살 아기가 아빠와 엄마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한다는 사실은, 공감능력이 선천적인 본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감능력은 신경과학에서 ‘거울 뉴런(mirror neuron)’의 발견으로 입증이 됩니다.

거울 뉴런이란 우리 몸속에 있는 신경 네트워트의 일종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해 모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가령 포로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가족을 고문하는 것은 거울 뉴런을 활용한 것입니다. 가족을 고문하면 포로는 마치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매우 괴로워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공감하는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입니다.

▲ 거울뉴런은 뇌의 3곳(별표)에 분포한다. 전두엽 전운동피질 아래쪽, 두정엽 아래쪽, 측두엽 앞쪽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처리해 지각한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다. ⓒnaver
<단순한 거울뉴런을 가지고 있는 원숭이가 인간을 따라하고 있다>

오늘은 교단이 지정한 신학교육주일입니다. 교단의 미래와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신학생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불어 올바른 신학 교육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교회가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기르는 것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공감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지혜와 공감이라는 주제로 묶여집니다. 구약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에 공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강대한 여러 민족을 쫓아내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올바른 지혜이자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될 교육의 기본 내용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어린 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런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서신서의 말씀인 고린도 전서의 말씀은 갈라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지혜의 말씀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 곧 공감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모세가 120세 되었을 때, 출애굽 1대가 세상을 떠난 후, 남아있는 광야 세대 백성들에게 전한 모세의 고별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약속의 땅을 소유할 신세대들에게 들려준 것입니다. 레위기와 마찬가지로 신명기에도 율법의 세세한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신명기의 율법은 레위기처럼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신세대들에게 그들 부모 세대의 쓰라린 본보기에서 배워야 할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살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광야 세대에 설교하는 모세>

오늘 본문은 1차 고별설교(신 1:6-4:43)의 끝부분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호렙산으로 부터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여정에 대한 사건들을 회상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를 세운 것, 또한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낸 사건들을 들려줍니다. 이후 아모리족 헤스본 왕 시혼을 정복한 내용(2장)과 바산 왕 옥의 영토와 그 성읍들을 정복한 사건(3장)을 설명하고,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쫓아내고 땅을 기업으로 주시니, 본문 말씀에서 결론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고 규례와 명령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39-40)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주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4:36-38)

이것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혹은 노예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 인자하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하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 혹은 공감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핍박으로부터 인도하시고, 곧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이스라엘 보다 강한 민족의 땅으로 인도하여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보기에 철저히 편파적입니다. 철학에서는 ‘계급적 당파성’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는데,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후, 2016)가 이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기차가 불평등이라는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기차를 멈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차의 지배자들은 그 기차가 불평등의 세상을 향해 더 빨리 달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기차를 달리게 하느냐, 멈추게 하느냐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판에 누군가가 기차 위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중립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워드 진은 어떤 경우에도 기차를 멈추기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워드 진의 책>

1960년대 미국은 흑백차별이 당연했습니다. 흑인전용 식당, 벤치, 버스 좌석이 따로 있고, 백인 전용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워드 진은 이 모든 불평등에 저항하는 소소하고 끈질긴 투쟁을 기획했는데, 자신이 교수로 있는 스펠만 대학교(흑인들만 다니는 대학) 학생들과 함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백인 전용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백인 전용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또한 백인 전용 식당에 앉아서 조용히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단지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인데 달리는 기차는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공권력의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백인들의 린치도 이어졌습니다. “죽여 버리겠다.”라는 협박도 지속됐습니다. 그러나 진과 그의 흑인 동료들은 금지된 영역에 가만히 앉아있는 이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가만히 앉아있기’ 운동이 확산되면서 극장에서, 법원에서, 버스에서, 그리고 모든 백인 전용 구역에서 흑인들이 가만히 앉아있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하워드 진과 그의 동료들은 비폭력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력적입니다.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약하고 소외된 한 민족을 크고 강한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 임하실 때 이렇게 당파적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좀 더 부족하고 약한 이에 공감하며 더 보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으로 약자의 편에 서신 것입니다.

3. 어린 아이와 같이?

이러한 약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약한 자에 공감하시는 하나님은 본문 마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3-16)

 

<어린아이와 예수님>

여러분,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소설을 들어보셨습니까? 1938년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가 출간한 소설입니다. 빈민원에서 단 돈 5파운드에 팔려가 노동자로 일하는 올리버 트위스터의 인생을 통해 당시 영국의 산업혁명이 가져온 폐해를 적나라하게 비판한 소설입니다. 산업혁명 초기 아동노동의 착취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가령 소모기(梳毛機)라는 기계가 있습니다. 양털의 긴 섬유를 골라 가지런하게 다듬는 기계입니다. 이 기계에 철사를 끼워 넣는 단순작업에 주로 4-5세 아동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도 하워드 진의 불평등을 향해 달리는 기차입니다. 그러나 기차의 주인 윌포드의 완벽한 열차 기계 구조 안에는 놀랍게도 열차를 움직이려면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부품의 일부로 사용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한 장면>

옛날 산업혁명 당시나 영화만의 이야기라고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이 저렴한 아동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커피 시장의 자본의 논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나요? 슬프지만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올리버 트위스트에만, 영국 산업혁명 시대에만, 그리고 영화에만 존재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방직공장에서 노동하는 아이들>

영국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놀라운 것은 영국은 1833년이 되어야 9세 미만의 아동에 대한 노동 금지가 법으로 통과되었고, 9세에서 13세 아동의 경우 주 48시간 이내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우리 인류가 얼마 전까지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런 아동 노동은 산업혁명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농경시대에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농경시대 아동노동은 산업혁명 이후와 달리 임금노동 형태, 즉 공장 노동 형태가 아닌 가족노동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류에게 지금으로 치면 청소년과 아동의 노동이 금지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이며, 20세기가 되어야 완전히 금지됩니다.

많은 분들이 본문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구약 시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약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서로 공감하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중 하나인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4.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

분열된 고린도 교회에 개척 목회자였던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파와 후임 목회자인 아볼로를 지지하는 아볼로파,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게바)를 지지하는 게바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파도 저 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23)

사실 분열의 시작은 바울파와 아볼로파였습니다. 초창기 개척자인 사도 바울이 있을 때는 분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임인 아볼로가 부임하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바울은 말을 잘하지 못했는데, 아볼로는 감동적인 수사적 언변이 뒷받침된 설교로 성도들을 감동시켰고 많은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분열이 되어 갈등을 유발하게 된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은 자신을 지혜롭다 여기고, 다른 사람을 무시함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을 지혜롭다 여기게 되면, 자랑을 하게 되니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 어리석은 지혜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18-21)

「민중의 소리」 이완배 기자의 책, 『경제의 속살』 (민중의소리, 2018)에 캐나다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리(R. Lee) 교수의 부시맨 연구를 소개한 부분이 있습니다. 리는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쿵 부시맨(Kung Bushmen)을 연구하기 위해 이들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인물입니다. 리가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리는 3년 동안 정든 부시맨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이웃마을에서 황소 한 마리를 구입해 이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기독교가 아프리카에 전파된 이후 부시맨들 사이에서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마을끼리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받은 부시맨들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살찐 황소를 고른다고 골랐는데, 부시맨들은 “아니, 어디서 이렇게 삐쩍 마른 황소를 샀어요?”, “아이쿠, 우리 교수님이 속았네. 바가지를 썼어”, “저런 황소를 먹어봐야 어디 배가 차겠어?”라며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선물을 한 리교수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렇게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시작됐습니다. 황소가 말랐다고 비웃던 부시맨들이 황소 요리를 엄청나게 잘 먹는 것입니다. 그것도 맛있게. 사실 리가 선물한 황소는 굉장히 살찌고 좋은 황소였던 것입니다.

<쿵족 부시맨>

그래서 리가 다시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라, 부시맨들이 다가와 또 리의 염장을 지릅니다. “이 황소는 너무 말라서 먹을 게 뼈밖에 없어요.”라며 비웃은 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황소를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리는 오랫동안 자신을 도와준 토마조라는 부시맨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토마조는 “그건 교만을 막는 부시맨들의 독특한 시스템입니다.”라고 답을 들려주었습니다.

토마조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냥을 나간 누군가가 엄청 큰 짐승을 잡았습니다, 누가 짐승을 잡건 쿵족은 그 식량을 함께 공유합니다. 매우 훌륭한 협동의 문화입니다. 문제는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이 으쓱대기 시작할 때 발생합니다. 사냥꾼이 “너희들은 오늘 나 덕분에 배불리 먹는 거야.”라며 싸가지 없는 행동을 보이면 그 마을의 공동체성이 깨집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쿵족은 사냥꾼이 큰 짐승을 잡아도 “아, 오늘 사냥을 망쳤어요. 나는 사냥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라며 먼저 겸손을 떨도록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의 입은 귀에 걸립니다. 사냥꾼이 겸손을 떠는 순간, 그가 잡은 짐승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은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쁠 것인가!

하지만 부족원들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사냥꾼에게 핀잔을 줍니다. “진짜 뼈다귀만 잡아왔네(싱글벙글)”라거나, “고작 이걸 잡았다고 우리를 부른 거야? 이렇게 부실한 놈인 줄 알았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싱글벙글)”라거나 “오늘은 그냥 물배나 채워야겠다(싱글벙글).”라는 식입니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는 진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 이 대화가 농담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농담을 멈추지 않습니다. 토마조는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많은 짐승을 잡으면 그 사람은 자기가 마치 추장이나 혹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인이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죠. 그렇게 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돼요! 잘난 척을 하거나 교만한 사람을 우리는 절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걸 그냥 두면 교만이나 자만심이 언젠가 우리 형제, 자매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가 사냥한 짐승의 고기가 형편없다고 일부러 말하는 거예요. 그를 겸손하게 만드는 거지요.”

교회는 부시맨들이 만든 이런 협동과 겸손의 공동체와 같아야 합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고전 3:21)”이기에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5.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 (감영사, 2017)에서 원숭이와 침팬지, 고릴라 등의 영장류 동물을 비롯해 고양이, 늑대, 돌고래, 새, 코끼리 등 수많은 동물들에게서 관찰되는 여러 가지 공감 행동을 통해 ‘공감’이 진화적으로 뿌리가 깊은 동물적 본능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공감으로부터 비롯된 이타성과 공정성의 발현이 결국 종의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임을 입증합니다. 드 발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감의 시대>

“공감은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공감을 억누르거나 정신적으로 차단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기에 실패할 수는 있지만,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의 질문된 적 없지만 아주 기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왜 자연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인간과 장단을 맞추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면 괴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기쁨을 느끼도록 인간의 뇌를 디자인했을까? 만약 다른 이를 이용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진화는 공감이라는 사업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다.”

공감이 인간 존재의 특성, 진화의 최고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공감과 도덕 능력을 점차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힘과 권력이 공감 능력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책의 번역자인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모두 충분한 공감 능력을 갖추고 태어납니다. 공감 능력은 우리 종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주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타고난 습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다독이며 상처를 보듬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 공감이 무뎌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만한 충분한 공감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잃어가도록 이 사회가 강요하고 또 교육받았습니다. 공감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육과 학교교육은 이러한 공감의 능력이 무뎌지지 않도록 보존만 해도 중요한 교육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조그마한 권력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재물과 부 때문에 공감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세상은,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했던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따라서 이 타고난 본성이 무뎌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신학교육주일을 맞아 신학생들의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타고난 공감의 본성이 무뎌지지 않도록 교육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기에 목회자의 품성이 길러집니다. 생명의 존중이 발생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우리의 소중한 공감 본능을 가꾸어나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지혜와 공감의 길에 성령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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