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기후붕괴 시대에 직면한 한국교회

기사승인 2019.02.05  02:07:06

공유
default_news_ad1

- 이정배의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再)주체화』를 중심으로

본 글은 몇 해 전 쓰여 졌으나 IPCC(International Panel on Climate Changes,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의 약자이다. 이 단체는 UN의 전문기관인 세계기상기구[WMO]와 그 산하기관인 환경계획[UNEP]에 의해 1988년 설립된 조직으로서, 인간활동에 대한 기후변화의 위험을 평가하여 그 영향 및 실현가능한 대응전략을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연합 기본협약[UNFCCC]의 실행에 관한 보고서를 발행하는 임무를 가진다)가 지구온도 상승을 1.5도 이하로 막아야 한다는 인천 선언을 접하며 다소 수정했고, 재구성한 것이다. - 저자주

주지하듯 환경학자들은 금세기 내 지구 온도가 6도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 하에서 2010년을 기후붕괴 원년으로 선포했다. 온도상승이 종(種)의 다양성을 해쳐 결국은 단 하나 뿐인 생명의 공간, 지구를 불모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지난 가을 정부간 기후협약체인 IPCC는 지구 온도 상승을 기존 2도가 아니라 1.5도로 하향 조정할 것을 천명한 바 있다.

기후문제에 늘 상 보수적 의견을 낸 단체였기에 이들 주장을 간과할 수 없다. 향후 지구 운명이 인간 삶의 양식, 문명 향방의 급진적 전회와 무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기후 붕괴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가 지금 우리들처럼 자본주의 욕망을 좆아 살고자 할 때 서너 개의 지구로도 부족할 것이다.

지금껏 기독교는 근대 이후로 진보적 발전사관과 등가(等價)로 이해되었다. 자연의 신비를 파헤쳐 인간을 이롭게 했던 진보이념을 기독교가 추동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지금 그 반대급부로 인해 가이아(자연)의 복수가 인류에게 가해지는 중이다. 지구 곳곳의 가난한 이들이 그 일차적인 피해 당사자들이다.

이런 정황에서 기독교는 이전의 모습을 벗고 의당 자신을 재(再)주체화시켜야 옳다. 생태적 영성의 소유자가 되어 인습화된 신앙 양태를 단(斷)해야 하다는 말이다. 생태의식은 우리가 관심할 제 분야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 있어 근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바라는 정의는 언제든 생태학적 정의(Eco-Justice)여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환경과 관련하여 우리는 언제든 피해자면서 가해자들이다.

우리는 6일간의 창조 후 ‘참 좋다’는 하느님의 환호를 기억한다. 그 환호를 지속시키는 것이 예배요, 교회의 존재 이유라 생각할 때 먼저 우리는 예수를 그랬듯이 자구를 십자가에 매달며 살아왔음을 회개한다. 그럴수록 십자가상의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지구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생각할 일이다. 녹색은총의 감각을 망각하면 적색은총의 의미 역시도 퇴색한다. 목하 한국교회는 생태적 불감증, 생태맹(生態盲)으로 인해 평화와 생명의 케리그마인 십자가의 본뜻을 잃었다.

필자는 녹색은총의 의미를 통해 적색은총의 지평 확장을 나름 “생명신학”의 골자로 여겨왔다. 책 제목을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로 정한 것도 이런 연유로서 생태위기에 직면하여 기독교를 더욱 보편화시키고 싶었다. 이점에서 기독교 역시 脫/向(탈/향)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만 할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생태적 수치심을 갖고 스스로를 새롭게 변모시켜야만 한다. 생태적 수치심이 생태적 영성에로의 지름길이다.

1

지난 해 여름 우리는 사막 같은 찜통더위에 고통하면서 이상기후를 여실히 체감했다. 한낮에는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고온으로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전력비상상태가 선포되었고 에어컨 수요도 급증했다. 그럴수록 전기 누진세의 폐해에 대한 사회적 공감도도 높았다. 기업에게 싼 값으로 공급된 전력을 일반 가정에 높게 공급하는 것은 분명 형평성에 어긋난 일이다. 누진세 무서워 에어컨을 맘껏 틀지 못한 불만의 소리가 곳곳에서 있었다. 누진세 제도를 개혁해야 될 때가 되었다는 정치권의 제도적 판단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실 우리 집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선풍기 하나를 방 이/저곳으로 옮기며 여름 나기가 용이치 않았던 탓에 에어컨에 대한 유혹이 컸다. 하지만 에어컨은 집안을 차게 하는 만큼 밖(자연)을 덥히는 것이기에 고민 끝에 결국 마음을 접었다. 밀양의 송전탑 사건이 눈에 아른거렸던 결과였다.

도시로, 공장으로 전력 전송을 위해 거미줄처럼 연결된 송전탑을 목도한 적이 있다. 송전탑 건설 후, 평생 모아 산 땅은 헐값이 되었고 그를 비관한 할아버지가 목숨을 끊었다. 수많은 할머니 들이 웃통을 벗고 송전탑 반대시위를 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었다.

이 현실에 함께 투쟁했던 한 단체에서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슬로건을 만들어 호소했다. 전기는 그냥 전선을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유지 주민들의 피눈물을 타고 흘러 우리들 에어컨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전기는 단순 돈(누진제)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금번 여름은 우리들 편안함이 생태적 약자를 양산했고 기후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구체적 사례인 것을 경험토록 했다. 그러나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는 이런 사소한 노력이 기독교 신앙, 생태적 영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묻는 이들이 많다. 환경개선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를 반문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연 역시도 오늘 우리시대에 ‘새로운 가난한 자’(New Poor)가 되었다. 가난의 범주를 확장시켜 자연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 21세기의 화두인 단순성(Simplicity), 곧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것만큼 생태적 삶은 없다. 생태적 영성의 열매가 바로 단순성이다.

자본주의는 삶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장농 속에 걸려있는 수많은 옷가지들이 반(反)생태적 삶을 살았던 흔적이겠다. 이 불편한 진실을 자각하는 것이 ‘작으나 큰’ 생태적 삶의 출발점이다. 그럴수록 ‘손의 창조력’을 높여가야 한다. 이것 없으면 머리로만 살려하고 돈으로 남의 재능을 부리고자 할 뿐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을 손의 창조력을 갖고 불편을 견디는 생태적 영성으로 맞설 일이다.

2

필자는 최근 어느 책에서 “백만 척의 방주, 백만 명의 노아”란 말을 배워 그 뜻을 좋게 펼쳐내고자 다. 물론 방주대신 조각배로 교회 메타포를 바꾸자는 교종의 제안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한 곳에 머물며 사람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몸을 가볍게 하여 세상을 찾아다닐 것을 교회에게 요구한 것이다.

이 말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방주’와 ‘노아’의 이미지를 생태학적 시각에서 중요하게 여긴다. 원(原)역사의 핵심 인물로서 노아는 우선 이 시대의 언어로 생태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 세상에 대한 우환(憂患)의식을 깊게 지녔던 존재라 할 것이다. 문명의 위기, 곧 하느님 얼굴을 피해 ‘놋’이란 곳에서 도시문명을 일군 가인의 후예들의 폭력적 삶의 양식을 성찰한 인물이었다.

자크 엘룰은 도시문화를 만든 최초의 사람으로 가인을 말했고 도시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을 일컬어 가인의 후예라 성찰했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가인의 후예라 한 것이다. 익명성을 보장 받고 자율성에 근거하여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공간(도시)인 탓에 그 누구도 경쟁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음을 안 것이다. 가인 후예들의 삶이 그랬듯이 도시로 상징되는 인류문명 역시 탐욕으로 사실적 종말에 이르렀다고 JPIC를 발의했던 폰 봐이젝커가 경고했다. 노아는 당대의 위기를 체감한 생태적 감수성의 소유자로서 이 시대의 봐이젝커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기후붕괴 시대를 맞아 생태의식에 투철한 100만 명의 노아를 키워내는 일과 무관치 않다. 몸(욕망)줄여 마음(전일적 의식)을 키우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보편적 의미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방주의 메타포 역시 이와 유관하다. 방주는 새로운 미래를 품은 공간이었다. 이속에는 인습적 가치체계와는 무관한 다양한 종(種)들이 함께 있었다. 인간 편에서는 해롭다 할지라도 생태계 전체를 위해선 필요했던 까닭이다. 그로써 방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픈 것은 種들의 공존, 이질적인 것들과의 공존이다. 자신에게 낯선 것을 배제하고 惡이라 여기는 현존 교회들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배제와 배타의 방식으론 미래를 키울 수 없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에겐 인격의 방식으로 관계하나 지렁이에게는 지렁이의 방식으로 관계함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관계방식을 모를 뿐 그것을 틀리다, 가치 없다 판단할 수 없다.

이점에서 교회는 구원을 독점한 기관(제도)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래를 위한 씨앗을 품은 공간이 될 일이다. 기독교(교회)는 100만 명의 노아를 키워낼 방주가 되어야 옳다. 저마다의 카리스마를 갖고 다양하게 존재해야 마땅하다. 생명과 평화의 복음, 즉 ‘복음의 정치학’을 통해 물리적 방주를 만들 수 없을 지라도 정신적 방주로서의 교회 역할이 필요하다. 

3

방주서 나온 노아의 처음 일이 단을 쌓아 예배하고 포도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포도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놋(도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런 노아를 향해 J문서는 아담과 하와의 또 다른 아들 셋의 후손이라 칭했다. 더 이상 가인의 족보가 아니란 것이다.

이런 노아에게 하느님은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셨다. 처음 창조 시 보다 더 큰 축복의 땅을 만들 터이니 두 가지를 약속하라 했다. ‘사람들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지 말 것’과 ‘동물을 피(생명)채로 먹지 말 것’을 요구한 것이다. 앞의 것이 사람들 간의 형평성 문제라면 나중 것은 자연과 인간간의 정의라 할 것이다.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들 일상에서 함께 작동하고 있다. 이 모두는 결국 인간 속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문제인 까닭이다. 성서는 이 두 약속이 지켜질 수 없었기에 바벨탑을 쌓게 되었고 인류문명이 다시금 멸망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두 가지 단서는 창세기 초반의 선악과에 상응한다. ‘절대적 한계’는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일찍이 칸트는 성서의 첫머리에 ‘-말라’는 명령이 있었음에 주목했다. 인간 삶에서 절대적 한계가 있음을 가르칠 목적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새 계약에 있어서도 이런 명령이 존재했다.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말 것’, ‘피 채로 먹지 말 것’, 이 두 ‘말라’는 명령 또한 인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전제들이다. ‘말라’는 것은 역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성서의 첫 명령이 한계에 대한 자각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점에서 기독교인은 태초부터 이런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자각은 ‘참 좋다’는 하느님의 환호를 잇는 길이자 아주 보편적 가치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행할 수 있고 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믿음을 ‘불가능은 없다’는 논리로 이해한 기독교는 이를 어겼다. 이런 한계를 인식할 경우 기독교는 결코 자본주의와 짝할 수 없다. 4대 보험도 없는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를 내 몰수 없다. 생존을 위한 기본급 인상을 반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생명 자체를 탐욕대상으로 삼는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옳다. 그럴수록 절대적 한계를 지키며 살겠다는 다짐이 요청된다.

생태적 영성을 통해 우리는 더욱 보편적이며 포괄적으로 그리고 유기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를 지지하는 자’라는 성서 말씀에 잇대어 이웃종교는 물론 여타 이념들과 더불어 자본주의 이후 시대를 꿈꿔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본래 체제 밖 사유였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4

성서는 본래 하느님과 인간, 자연이 운명공동체인 것을 말했다. 동양에서 말하는 ‘천지인(天地人)’ 상관성에 대한 기독교적 언술이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이 하늘에 범죄 하면 인간 상호간에 거짓과 핑계가 난무하고 그로써 자연이 인간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반면 요엘서가 증언하듯 인간이 하느님 앞에 옳게 서면 대머리 산에서도 강물이 흐른다 했다. 이처럼 천지인 상관성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깊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앞서 보았듯, 교회 내에서 적색은총(십자가)만이 아니라 녹색은총의 감각도 키워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시편 104편-흔히 생태학적 시편이라 불리 운다-은 일체 생명의 먹을 것을 두루 관심하는 생태학적 경영자로서의 하느님을 묘사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구조 하에서 먹이 찾아 울부짖는, 인간을 비롯한 여타 생명체의 먹거리를 염려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여기서 인간은 아침 들판으로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하면서 이런 하느님 관심사를 좆는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점에서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 형상’은 구약학자 베스터만이 말했듯 인간 내 정적(존재론적) 속성이기보다 하느님 관심사와 일치하는 行爲力(행위력)이라 보면 좋겠다. 세상을 복되게 하려는 하느님의 행위에 상응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하느님 형상의 본뜻이다. 천지인 상관성을 이룰 구체적 주체로서 하느님이 인간을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이런 역할을 감당치 못할 때 시편은 인간을 악당이라 하면서 그를 오이코스(집)로부터 추방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으로서의 인간 실상을 직면한다. 사려 깊은 생태학적 경영자인 하느님의 관심으로부터의 일탈, 그를 일컬어 시편은 죄인이라 한 것이다. 이처럼 성서적 인간은 본래부터 천지인 상관성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생각했었다. 근대이후 기독교가 서구가 전제한 독아론(獨我論)적 인간상과는 동이 서에서 멀 듯 무관했던 것이다.

5

또 다른 지혜 문학서인 욥기를 통해서도 인간을 생태계의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배울 수 있다. 주지하듯 욥기는 유대교의 신명기 사관으로부터 빗겨난 이방적(?) 시각을 담았다. 의로운 자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 관점이 없었다면 예수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지젝과 같은 철학자는 구·신약성서의 연결고리로 욥을 택했고 예수를 이해하는 전거로 삼고 있다. 아담, 모세, 다윗 혹은 이사야서와 관계시켰던 종래의 방식과 크게 다른 양상이다. 그만큼 욥기는 신약의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 또한 기독교의 생태적 재구성을 위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욥기 서문에는 하느님과 사탄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욥을 두고서 내기하는 장면으로서 핵심은 인간을 보는 두 시각의 차(差)다. 인간을 신뢰한 하느님과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생명을 물질로 바꾸는 존재라는 사탄의 시각간의 대결이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종교유무를 막론하고 욕망덩어리로 변질된 인간 상(像)을 보면 사탄이 보는 시각이 옳다는 절망감도 든다.

본론은 욥의 고통을 신명기 사관으로 정죄하는 당대 신학자들과 욥과의 치열한 신학적 투쟁으로 구성되었다.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義(의)를 치열하게 물었던 욥이 신명기 신학자들을 무력화시킨 듯 보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욥의 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38장 이하에서 하느님은 절규하는 욥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 세상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는가?”

이 질문은 이하 3장에 걸쳐 이어지는 뭇 물음을 총칭한다. 세상의 창조 및 유지, 존속에 있어 인간 역할에 대한 질문이다. 녹색은총에 대한 감각에 대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신학자 D. 죌레는 욥의 고통 중에 현현하여 이런 질문을 하는 하느님을 폭군이라 보았으나 필자 생각은 일면 다르다.

지금껏 신정론의 물음은 주로 인간적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비롯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자연재해가 인간 입장에서 큰 고통일 것이나, 자연의 입장에선 필요한 부분이 있다. 태풍과 해일은 인간이 망친 자연을 복구, 재생시키는 힘이 있는 탓이다.

이점에서 욥기 38장 이하 본문은 인간고통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인간외적인 차원(은총)에로의 지평확대라 할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선할 지라도 절대적 의(義)는 결코 그만의 몫일 수 없다. 만물이 상호 의존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생태계의 으뜸 법칙과 상호 관계성 아닌 것이 없다는 연기설도 이를 적시한다.

천지인 상관성과도 무관치 않다. 불교에서는 이를 ‘自利利他’(자리이타)라 부른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남에게도 이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를 ‘利他自利’(이타자리)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남을 이롭게 해야 자신도 이롭다는 말로서 ‘利他’(이타)에 방점을 더 두둔 탓이다. 타자 없이는 결코 자기도 있을 수 없다.

현대가 동일성 철학의 종언을 선포하고 타자성의 철학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동일성에 기초한 서구 기독교가 늘 상 차이를 차별로 이해했으나 타자성의 철학에서 차이는 이제 초월이라 하겠다. 자연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초월로서의 타자라 할 것이다.

6

▲ 토마스 베리 신부 ⓒGetty Image

공관복음서 내 산상수훈을 신약성서 속 창조신앙의 보고(寶庫)라 한다. 구약의 창조신앙을 달리 표현한 것이 예수의 산상수훈이란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들의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를 보라하며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늘 아버지께서 염려하시는 바, 이를 걱정하면 이방인과 진배없다는 말씀까지 남겼다.

이에 비출 때, 어쩌면 우리는 이방인의 범주 속에 있다 할 것이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추동되어 일상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근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예수는 우리 ‘눈을 들어 하늘 나는 새를 보라’ 했고 ‘들판의 꽃을 보라’고 했다. 자연을 보고 느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자연을 향하지 않고 이를 기록한 문자에 머물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견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실패했을 것이란 평가가 있을 정도로 개신교는 활자문화 덕에 존재했다. 후술하겠으나 ‘오직 성서’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성서는 우리 눈을 들어 자연을 보라 했다. 자연이 하느님은 아니겠으나 하느님을 보는 창문(아이콘)인 탓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자연을 육(肉)의 영역이라 하여 무시, 홀대했고 그로써 자연을 물질로만 여기게 되었다.

이점에서 미국의 샤르뎅이라 불리는 토마스 베리 신부는 기막힌 주장을 했다. “한 3년간 성서를 덮고 자연을 맘껏 경험하자”고 말이다. 성서 무용론이 아니라 지나친 문자중독으로부터 일정기간 해방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연 역시도 성서만큼이나 계시적이라 했다. 빅뱅 당시 10의 120분의 1초의 오차라도 있었다면 오늘의 지구가 없었을 것이란 사실이 신적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었다. 물론 그 역시 양자를 등가로 보지는 않았으나 자연의 계시적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역설한 것이다.

예수가 육의 영역을 홀대 않았다는 증거로 병자를 치유한 사건 또한 예(例)가될 수 있겠다. 예수의 구원은 단지 영적인 구원이 아니라 몸의 치유를 동반했다. 안식일에도 먹어야만 했던 것이다. 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 물질과 정신의 상관성을 일컫는다. 물질 없이는 정신도 없다. 떡과 포도주가 예수 살과 피로 변했다고 고백한다면 우리 몸 역시 예수 몸처럼 나눠져야 마땅한 일이다. 내가 먹은 떡은 내개 물질일 수 있겠으나 남에게 준 떡은 영원히 기억되는 정신이 되는 법이다.

7

바울 신학의 골자는 한마디로 일체 특권을 거부하는데 있다. 다메섹 체험 이후, 유대인의 율법, 헬라의 지혜 그리고 로마의 법(시민권) 일체를 내려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부활체험의 핵심이었다. 자신의 동역자 절반을 여성으로 삼을 만큼 가부장제를 버렸고 노예제도의 자발적 포기를 가르쳤다. 이것이 바울에게 덧입혀진 새로운 주체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새 정체성은 특권을 버리는 것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 헬라인처럼, 여성에겐 여성의 시각에서, 빈자에게 빈자처럼 되는 방식으로 부활 후 자신의 삶을 재(再)정위 했다. 필자는 이를 논어에 나오는 ‘君子不器’(군자불기)의 영성이라 칭했다. 한마디로 동양의 군자처럼 바울 역시도 정형화된 그릇과 같은 존재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 철학자 바디유로부터 배웠던 ‘일체 차이를 품는 새로운 보편성’, 곧 새로운 종교성(영성)의 길이었다.

이런 새 정체성을 필자는 바울의 자연관 속에서도 살필 수 있었다. 로마서 8장 이하에서 바울은 피조물의 탄식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감했다. 헛된 것들에 굴복하여 삶과 죽음에 기로에 선 피조물들, 이들 고통을 대신하여 성령께서 탄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피조물은 인간을 포함한 전 자연을 총칭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시대의 성령체험은 피조물들의 탄식 소리를 듣고 그와 하나 되는 길이라 하겠다. 대신 탄식하고 위로하는 성령, 그와 하나 되는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는 생태학적으로 재(再)주체화될 수 있고, 그로써 더욱 보편화 될 수 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하느님을 만물(panta)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며 만물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라 고백했다. 이런 하느님 사유는 전통적인 인격신론만 가지고서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범(汎)재신론의 표상을 갖고 성서의 하느님을 다시보자는 이야기가 대세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마거스 보그도 이점에 적극 동의한다. 그럴수록 성령론을 갖고서 하느님을 재사유하는 길이 모색되는 중이다. 해방신학자 보프도 2013년의 책, “Come, Holy Spirit”를 통해 이 점을 잘 밝혀 놓았다.

하느님이 만물 안에 머물고 만물을 통해 일하시는 한, 하느님은 자연 속에서 고통하고 계시다. 인간이 자연을 망가트리고 사실적 종말로 치닫게 했던 결과이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신음하는 하느님, 곧 탄식하는 그의 영을 체험하는 것이 기독교적 주체성인 것을 거듭 강조해야 지당하다.

8

불행하게도 종교개혁 신학은 중세기적 유기체 세계관과 이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개념, 곧 ‘피지스(Physis)’ 개념을 신학 속에서 완전 탈각시켜버린 것이다. 이는 성상파괴와 더불어 개신교의 치명적인 근원적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 500년 역사를 조명할 때 반듯이 해결해야 될 개신교 신학의 문제사적 출처이다. 물론 이런 단절을 통해 개신교가 공헌한 점도 크다. ‘존재유비’(Analogia entis)대신 ‘신앙유비’(Analogia fidei)를 택함으로써 히틀러 정권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ethos)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목하 상황에서 자연신학 전통을 부정하는 것만이 결코 능사가 아닐 것이다. 자연신학과 계시신학 간의 새로운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하튼 개신교는 중세와의 단절을 위해 유기체적 세계관을 버리고 기계론적 세계관과 짝했다. 종교개혁이 오직 믿음, 오직 은총 그리고 오직 성서를 말한 것은 바로 이런 토대 하에서 가능했다.

주지하듯 근대를 열었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의 철저한 수동성과 초자연의 유일의 능동성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관이다. 자연 자체의 합목적이란 애시 당초 불가능했다. 이점에서 종교개혁이 말하는 3개의 ‘오직’교리는 시종일관 자연의 수동성을 전제로 생겨난 것이다. 자연의 전적 수동성을 개신교는 자연의 전적 타락의 결과라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 위로 오르는 길’ 대신 오로지 ‘위로부터 아래로의 한 길’만이 기독교 신앙에게 강요되었다.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는 것이지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폐기되었다. 자연의 수동성에 기초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기독교적 에토스와 만나 소위 근대문명의 초석을 이뤘고 이후 자본주의 태동을 가능케 했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신교 신앙 양태와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결과물은 수없이 많다. 이것은 자연을 ‘마녀’의 메타포로 보았던 중세 그 이상으로 자연을 ‘창녀’의 은유라 함으로써 자연파괴를 부추길 수 있었다.

이후 19세기 신학은 이런 바탕에서 이뤄졌다. 자연과 문화를 철저히 이분화 시켜 전자는 사실의 학문으로 후자를 가치의 학문이라 여기며 대별했던 것이다. 이를 부정했던 20세기 변증법적 신학 역시 자연을 역사나 계시의 부속물 내지 주변으로 여긴 탓에 생태학적 시각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명외경 사상을 주창한 A. 슈바이처와 칼 바르트 간의 창조론 논쟁에서 이점이 잘 드러난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자연을 창조로만 볼뿐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볼 시각 자체를 갖지 못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사실과 가치를 양분한 학계현실을 비판한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비롯했다. 자연은 고정된, 죽어있는 실체가 아니라 지금도 변하고 있는 과정이란 것이 양자역학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9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많은 유형의 생태신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는 저마다 심층 생태학, 사회 생태학 그리로 여성 생태학에 의지 처를 둔 신학적 작업의 결과였다. 심층 생태학은 동양사상과 흡사했고, 사회 생태학은 마르크스주의가 진일보된 것이며, 여성 생태학은 본래 자연과 여성이 동근원적 운명이라는 자각에 근거, 발전된 이론이었다. 이 모두는 공통적으로 기계론적 세계관과 단절에서 비롯했다.

물론 이런 새로운 자연관은 중세의 유기체론과도 달랐다. 중세의 정체(목적론)적인 유기체론과 달리 자연은 훨씬 더 역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주가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지연은 늘상 새롭고 창발적이었다. 혼동 속에서도 질서를 만들어 낼만큼 자기 조직적 능력을 지닌 살아있는 생명체(가이아)였다. 이로써 지구 중심적 세계관도  끝이 났다. 우주 내 생명체를 갖는 지구와 같은 위성이 수없이 존재할 것이란 가설이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토마스 베리 신부가 말했듯 신학은 이제 우주 속에서 하느님 계시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발견할 과제에 직면했다. 이는 하느님 계시를 성서 66권에 안에 가둬두는 제사장적 확신을 거둘 때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새로운 자연관과 조우했던 신학자들은 생태신학, 환경신학이란 영역을 개척했다. 기후붕괴로 사실적 종말에 이르렀다는 위기의식의 표현이었다. 각론에서는 저마다 상이할 것이지만 총론에 있어 생태신학은 대략 범(汎)재신론을 근간으로 삼았다. 역동적 유기체성을 지닌 자연관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탓이다.

앞서 말했듯, 성서 신학자들 역시도 하느님을 초월적 유일신(인격신)으로 한정시키지 않았다. 여하튼 범재신론의 틀 하에서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는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자연을 포함한 전 우주가 ‘하느님의 몸’이라 여겨진 것이다. 이전처럼 하느님과 세상은 질적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나뉠 수 없는 불이(不二)적 관계가 되었다. 이로써 우주자연도 신적인 속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神과 등가적 존재라 말할 수도 없다. 몸은 하느님이긴 하지만 하느님 전체는 아닌 탓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낳았기에 이들 관계가 둘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하나라 말할 수 없는 이치이다. 인간에게 몸과 영혼(정신)이 있듯 하느님에게도 몸 이상의 것이 있음을 성찰했던 결과였다. 이런 설명은 모두 생태학적 신관을 범신론(하느님-세계=0)과 구별키 위한 신학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 중에는 오히려 범신론을 선호하는 이도 있다. 범재신론이 또다시 몸과 정신을 구별하는 이원론에 빠질 수 있다고 본 탓이다. 그럼에도 범재신론 이상으로 나가려는 시도에 다수 학자들이 제동을 걸고 있다. 여하튼 자연을 하느님 몸이라 할 경우, 자연의 고통은 곧 하느님의 고통이 된다. 인간의 부분별한 자연착취가 하느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해명될 수  밖에 없다. 피조물들과의 사려 깊은 관계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기후 붕괴시대에 있어 죄인 것이다. 산천을 파헤쳐 거대한 교회를 짓는 일은 하느님 몸(성전)을 위해 하느님 몸(자연)을 부수는 일이다. 우주(자연)을 뜻하는 희랍어 ‘panta’가 본래는 교회였음을 생각할 때 후자의 몸, 곧 우주, 자연을 더욱 성스럽게 여겨야 옳다.

이렇듯 생태학적으로 재구성된 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작은교회’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 건물 없는 교회가 더욱 정당성을 부여받을 것이며 마을 생태계 전체를 교회로 여길 수 있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십자가와 함께 태양광 발전기를 적색과 녹색은총의 상징으로 가시화시키면 좋겠다. 그로써 100만 척의 방주와 100만 명의 노아란 자의식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10

앞서도 언급 했으나 중요하기에 재론하다. JPIC를 발의한 공로로 바젤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자리에서 봐이젝커는 다음과 같은 수상소감을 남겼다.

“분배 문제의 불균형, 핵무기의 과다보유 그리고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한 기독교의 구원-기독교의 정신-은 아직도 요원하다.”

사실 1990년도에 본 대회가 서울서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이 JPIC의 문제가 집약된 세계 유일한 공간이라는 공감 때문이었다. 사드문제를 비롯하여 세월호 비극, 백남기 사건 등은 지금도 계속되는 JPIC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결과라 하겠다. 당시 봐이젝커는 공의회(Council)란 이름으로 전 세계 기독교인을 불러 모았지만 처음에는 세계 모든 종교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자 했다. JPIC 주제가 특정 종교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았던 탓이다.

주지하듯 20세기에 접어들며 기독교 신학은 아우슈비츠 사건과 JPIC 문제의식으로 크게 달라졌다. 생명평화마당이 탄생된 것도 실상은 JPIC문제의식에로까지 소급한다. 그렇다면 지금 기후붕괴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종교들 간의 갈등과 대립 보다는 종교 상호간 소통과 협력이 필요하다. 오이코스(oikos), 곧 우주 자연을 하느님의 집이라 여기고 그것을 하느님의 몸이라 한다면 이 공간을 지켜내는 일을 종교의 공통과제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웃종교들 속에 담겨진 생태적 지혜들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도리이자 과제이다.

이미 하바드 대학에서는 “생태학과 종교” 시리즈 책 수권을 편찬했다. 생태학과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생태학과 불교, 생태학과 도교, 생태학과 샤머니즘 등등. 동국대학은 ‘에코 붓다’란 이름으로 긴 여정의 연구를 시작했다. 사실 불교의 연기설만큼 생태학의 원리와 일치되는 것이 없다.

원불교는 대종사가 간척한 수 십 만평의 땅을 유기농 쌀농사를 지으며 GMO와의 결별을 교단 차원에서 실행 중이다. 천도교, 곧 동학 속에 담긴 以天食天(이천식천), 不然期然(불연기연)의 논리는 얼마나 생태학적으로 가치 있는지 볼수록 놀란다. 이들 동양종교들이 말했던 身土不二(신토불이)는 이제 神土不二(신토불이)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기 종교만 알면 자기 종교도 모른다”는 종교학의 공리가 기독교 신앙 속에 스며들어야 할 듯싶다.

기후 붕괴시대 원년을 지난 지금 어느 종교가 좀 더 생태적일 수 있는가의 선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종래와 같은 기독교로는 더 이상 세상의 빛 된 사명을 감당키 어렵다. 공산주의와 적대하는 자본주의, 그와 짝하는 청색의 기독교가 아니라 이제는 생태주의와 한 몸 되는 녹색의 기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녹색 신앙, 녹색 기독교, 녹색 구원, 녹색 교회를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하느님은 태초에 세상을 향해 ‘푸르러라’고 말씀하셨다. 녹색(Green)은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11

이제 반복되는 부분이 있겠으나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에 나오는 핵심 내용 몇 가지를 부언, 설명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이 책을 집필한 필자의 신학적 전제들을 가능한 한 쉽게-주로 성서적 관점에서- 서술했었다. 생태적 영성으로 기독교(인)를 재주체화 할 의도에서였다.

우선 필자는 기후 붕괴시대를 신학적 주제로 받아들였다. IPCC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070년 경 대기 중 이산화탄소 함유량이 550ppm에 달해 한반도 중북부 이상이 불모의 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지금 OECD 국가 중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는 욕망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역시 대한민국이란 사실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교우들을 생태盲으로 키워 낸 기독교에게 생태적 수치심을 요구했고 이를 생태영성으로 나가는 첫걸음이라 생각했다. 자본주의 욕망을 좆아 살면서 주일마다 천지를 지은 하느님을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New Poor”로 전락한 자연(피조물)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하느님 아들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자율성과 효율성의 삶이 아니라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이다.

아주 불편한 진실 앞에서 조금은 불편한 삶을 사는 것이 옳다. 이를 위해 身土不二 정신을 神土不二로 확대시켜 자연의 거룩함을 토대로 그의 능동성, 창발성을 강조했다. 우주 자연을 하느님의 몸이라 보고 늘 상 새롭게 하는 몸의 창발적 유기체성을 귀하게 여길 목적에서다. 자연속의 야성(野性)이 오늘 우리에게 神性 체험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총칭하여 토마스 베리 신부는 “기독교적 애니미즘“이라 불렀다. 지난 2천 년간 초월적 계시의 이름하에 기독교가 파괴했던 자연생명, 즉 애니미즘을 기독교적 방식으로 복원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을 우주만물과의 친족관계로 정의했다. 다음은 베리 신부가 즐겨 인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이다.

“하느님이 이처럼 많은 삼라만상을 지은 것은 하나의 사물 속에 부족한 것은 다른 사물을 통해 보충토록 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 전체가 어떤 하나의 존재보다 神을 훨씬 잘 드러내며 전체가 모두 神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특정한 하나의 존재를 통해 전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베리 신부는 문화에 중독되어 자연을 망각했던 생태적 수치심의 중요성을 재차 역설했다. 인간 중심의 문화중독(자폐)증을 벗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식을 갖고 그는 신생대로부터 생태대로 탈주할 것을 요청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출애굽이었다. 이를 성서가 말하는 피조물들의 탄식, 그 이후의 세상, 즉 우주적 그리스도가 실현되는 세상이라 생각한 것이다.

12

이상의 생태적 사유를 필자는 토착화론의 시각에서 多夕(다석)사상으로 재구성했다. 다석 사상 속에서 한마디로 철저한 생태적 회심에로의 길을 발견한 탓이다. 다석 사유의 핵심은 ‘없이 있는’ 하느님 이란 말 속에 있다. 없이 있기에 있지도 없지도 않다. 없이 있는 하느님은 그래서 ‘빈탕’이란 말로 불려진다.

▲ 다석 유영모 선생 ⓒGetty Image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있음보다 ‘없음’을 앞세운 점이다. 없음이 결여된 있음은 우리들 신앙양태에서 들어나듯 항시 소유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일체 하느님 표상은 하느님과 무관하다. 하느님은 인간이 명명한 그 하느님 너머에 있을 뿐이다. 이로써 하느님의 없음은 인간의 인식, 소유로부터 절대 자유(초월)한 경지라 할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이 없이 있다면 인간 역시 ‘없이 있어야 할’ 존재여야 한다. 이런 하늘의 본성을 이루라고 인간에게 ‘바탈’(받할)이 주어졌다. 하늘의 본성을 받아서 ‘할’ 것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고 그에게 이름이 주어진 것은 그를 이루기 위함이다. 하지만 일상의 인간은 하느님과 달리 늘 상 ‘덜 없는’ 존재이다. 없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을 충분히 비우지 못하고 산다. 無爲的 有爲(무위적 유위)의 삶이 되어야 하는 데 언제든 욕망에 따른 有爲적 삶을 살고 있는 탓이다.

이것은 다석에게 있어 죄의 다른 말이다. 덜 없기에 더러운 존재, 그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하지만 빈탕(없이 있음)을 자신의 바탈(本然之性, 본연지성)로 받았기에 인간역시도 ‘없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多夕에게서 바탈은 영과 같았다. 그래서 하느님 영은 태초로부터 지금껏 인류역사 속에서 끊어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예수 역시 이점에서 우리와 같은 ‘바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예수는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십자가를 통해 ‘없이 있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 그렇기에 예수는 우리들에게 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에게 이 길을 따르다 길이 되라고 했다. 남의 소리를 갖고 인생을 살지 말고 제소리를 내라고, 성서말씀을 ‘제소리’로 만들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多夕에게 예수는 전통적 의미의 대속자이기보다 유일무이한 스승이었다. 이는 본회퍼의 말을 상기시킨다. “예수의 제자를 만들지 못하고 교인이나 신도를 양산하는 기독교는 예수를 한갓 이념이나 신화로 만들뿐이다.” 여하튼 多夕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몸을 줄이고 마음을 늘리는 일“이라 풀었다. 예수의 길을 통해 우리 인간을 ’없이 있는‘존재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달리 말하면 우리들 바탈을 불살라 하늘 뜻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多夕은 “一座食一言仁”(일좌식일언인)이란 말로 빈탕하게 되는 길을 제시했다. 이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자신의 이해였다. 하루 한 끼를 먹었고 부부간 욕망을 끊었으며 어디든 걸어 다녔고 하루 서너 시간씩 묵상(정좌)한 것이다. 이는 결국 몸 줄여 마음 늘리는 길로서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의 길을 자기화 한 것이다. 예수의 길을 가다 본인도 길이 된 것이다. 그 역시 제소리를 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로지 ’없이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는 자기 삶을 빈탕한데 맞혀 살았던 것이다(빈탕한데 맞혀 놀이). 없이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즉 몸을 줄여 맘을 늘린 상태가 되었기에 그는 인간뿐 아니라 사물의 본성과도 소통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인식론인 격물(格物)을 ’진물성‘(盡物性)이라 달리 부르며 일체의 본성을 깨달아 그에 맞게 행동하는 법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진물성이란 말은 사물의 본성을 남김없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이 지렁이와 참새를 비롯한 일체 존재와 관계 맺는 방식을 자각했다는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물리(物理)가 터진 상태라 하겠다. 이로써 見物生心(견물생심), 곧 물질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는 욕망의 주체로서 인간, ’덜 없는‘ 인간이 見物不可生(견물불가성), 즉 물건을 보고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無爲的 有爲(무위적 유위)의 삶이 되어 고통 받는 피조물들이 원하는 세상을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생태학적 회심의 철저한 모습을 본다. 이는 부활 이후의 바울의 삶, 누구에게나 그의 저마다 모습으로 존재하겠다고 고백하던 바울과 일치된 모습이다. 단지 그 지평이 우주 자연, 곧 물(物)에게로 확대되었을 뿐이다. 일체의 물(物)에게 품수된 하늘의 본성, 그것이 때론 野性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영성의 길이다.

다석은 대속(代贖)조차도 동학의 以天食天(이천식천)의 맥락에서 생태학적으로 풀어냈다. “내가 먹는 낱알과 채소가 나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어 힘을 내개 대속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대속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속(自續), 몸 줄여 마음 늘리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정신이 제자 함석헌에게 이어져 ’흰손‘이란 시를 짓게 했다. 그 시속에 이런 구절이 잇다. “...그래 제 피 흘릴 맘 없어 남의 피를 흘려달라고 할 것인가?” 이처럼 ‘없음’에 기초한 하느님 이해를 통해 多夕은 이런 하느님, 곧 빈탕 하신 하느님에 맞혀 노는 삶에로 우리 인간을 초대하였다.

빈탕, 즉 ‘허공’에 맞혀 살기 위해 인간은 품수된 자신의 바탈을 불살라야만 한다. 이것이 십자가이자 부활, 몸 줄여 마음 넓히는 길(一座食 一言仁)이다. 하느님처럼 없이 있도록 초대받은 존재, 이것이 생태적 회심자의 삶이자 재(再)주체화된 기독교(인)의 모습일 것이다.

본래 빈탕(하느님)과 마음(인간)이 둘이 아닌 것을 기독교는 지금보다 더욱 중히 성찰해야 마땅하다. 多夕의 다음 말을 음미해 보자.

“사람들이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꽃을 꽃 되게 하는 것은 꽃 자체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빈탕이라는 것이다. 이 빈탕은 소유할 수도, 잡을 수도 없는 ‘하나’ 곧 ‘없이 있음’ 그 자체를 뜻한다. 하지만 꽃만 보는 경우 그것은 꺾고 싶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뜻을 좆지 않고 맛(色)을 좆는 욕망의 존재(몸나)가 이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생태학적 위기, 기후 붕괴의 근본적 원인이라 할 것이다. 해서 多夕은 거듭 강조했다. “몬(物)에 맘에 실면 맘의 자격을 잃는다”고. 이점에서 이 땅의 교회들도 자신들의 ‘덜 없음’(더러움)을 크게 뉘우쳐야 옳다. 그리스도 몸이라는 교회가 ‘얼나’가 아니라 ‘몸나’로 변질된 탓이다.

하늘 뜻이 아니라 세상맛을 추구하는 ‘몸나’로서의 교회, 그것은 허물어져야 할 설전일 뿐이다. ‘덜 없는’ 존재는 그것이 교회라 할지라도 자신 뿐 아니라 우주만물, 생태계 전체를 졸지에 허물고 말 것이다. ‘없음’에 근거한 생태학적 회심(見物不可生)만이 우리들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살리는 共生共貧의 길이다. 함께 가난해야 함께 살 수 있다. 더 이상의 발전, 곧 경제가 살길이 아닌 것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