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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3.1운동 정신의 세 가지 (2) 민중과 여성 주체의 3.1운동 개신교

기사승인 2019.02.02  21: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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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정신의 통합학문적 이해와 기독교 신앙의 미래 4

지난 글에 이어 기독교(개신교) 3.1운동의 정신에 대해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께서 연재해 주십니다. 특히 개신교 3.1운동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주셨습니다. 지난 글들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함석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에 민중이 제 대접을 받아 본 것은 이 3.1운동이 처음이다.” 그래서 3.1운동 이전까지의 역사는 정치가나 지배자,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이제는 “씨ㅇ·ㄹ의 역사”이고,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이며, 씨ㅇ·ㄹ의 가슴이 열렸기 때문에 그때까지 잠을 자던 나라가 깼다고 일갈한다.(1) 나는 이 지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그룹이 특히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여성들의 삶은 19세기 말 기독교회의 등장과 더불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름을 얻었으며, 글을 깨우쳤고, 독자적인 인격으로의 자각을 얻었다.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여성 중 31%가 기독 여성들이었다는 보고대로(2) 그들은 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힘을 모았고, 3.1운동에서 독자적이고도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3.1운동이 조선 여자로 하여금 사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협력하여 활약하기를 시작한 첫 막”이라는 언급이 나왔다.(3)

여성들의 3.1운동 참여

3.1운동이 지방으로 파급되는 일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서 여성교사들과 학생들도 서로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비밀결사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그 중 1913년경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더(1892-1970), 김경희, 박정석 3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송죽결사대가 있었다. 이들은 독립사상을 전국 여성들에게 확산시킬 목적으로 정예학생들을 모집해서 비밀리에 집회를 가졌으며, 후일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준비조직이 되었다고 한다.(4)

▲ 평양 숭의여학교의 황에스더, 김경희, 안정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고 활동했던 ‘송죽결사대’는 뜻이 맞는 여학생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였다.

1919년 2월에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국내로 몰래 들어온 김마리아(1891-1944)와 황에스더는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거사준비를 시키고 만세시위를 독려했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3.1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던 동경 유학생들의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졸업을 눈앞에 둔 김마리아는 나라 없이 졸업이 무슨 소용인가 여기며 독립선언서 10여 통을 몰래 국내에 들여와서 3.1운동 거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로 인해 총감부에 구치되어 5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그 때 고문으로 몹쓸 병을 얻게 되었다.(5)

당시 이들의 활동에 연대한 한 여학생이 파리 평화회의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호소문을 보면, 한국이 일본의 “포악”과 “유괴”로 한일합병에 서명한 일이 있지만 그 일인들의 압제와 억압이 심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더니 여성의 몸으로 구타당하고, 감금당하며 칼과 총으로 상해를 입고, 머리채로 끌려다니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억울함을 당하였다고 밝힌다. 그래서 “이게 정의라 하리까? 이것이 인도(人道)라 하리까? 라고 호소하고, 교회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처지에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니 “오직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들고 자유와 권리를 찾게 해주기를 호소할 뿐입니다” 라고 하면서 “오직 하나님이 틀림없이 여러분들을 감동시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게 하리라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라는 말로 신앙과 함께 인류 공통의 마음에 호소하면서 세계의 도움을 요청했고 독립을 위해서 절규했다.(6)

독립운동 연구가 김삼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을 비롯해서 3.1만세 시위가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두 달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앞장섰기 때문이었다고 밝힌다.(7) 경성 시내 여학교 만세 사건 보고를 보면 이화, 동덕, 배화, 숙명, 정신, 근화 등 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거의 전부 참석했고, 3.1운동에서 여성들은 쓰개치마나 장옷을 다 벗어던지고 만세를 불러서 그 이후로는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8) 독립운동이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크게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기독 여성들은 3.1만세 시위가 수그러들 무렵 서울과 평양 서북지역에서 3월 독립 만세운동에서 발생한 수 많은 수감자들의 옥바라지와 가족들의 구휼을 위해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했고, 1919년 9월 김마리아는 여러 애국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일에 주력했는데, 11월까지 임시정부에 제공한 자금만도 6천 원에 이르렀지만 곧 한 동지의 배반으로 조직이 발각되어 간부와 회원 등 1천여 명이 투옥되어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9)

차미리사 여사의 여성교육운동

여기서 나는 민중과 여성 주체의 3.1운동 기독교 정신의 또 다른 체현자로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1879-19655) 여사를 들고자 한다.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로 과부가 되어서 상심에 빠져있던 중 쓰개치마를 쓰고 당시 북감리교파인 상동예배당에 나가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다고 한다. 그때 ‘미리사’라는 이름도 얻었고, 조선 여성들의 비참한 처지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후 중국 유학과 미국 유학을 거쳐 1912년 남감리교 계열의 배화학당의 교사가 되었다.

▲ 스캐리트 신학교 재학시절(1910~1912) 차미리사(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배화학당에 조선의 정신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고, 또한 그와 더불어 당시의 상황에서도 더 소외되어서 정규학교에 올 수 없던 여성들, 하지만 당시 조선 여성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구식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던 것이다. 낮에는 배화학당 사감으로 근무하고 밤이면 젊은 부인들을 모아놓고 연필 공책 등을 주어가며 가르쳤다고 하는데,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서 배화학당 기숙사생 전체를 이끌고 필운대 언덕 위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자 이 사건으로 총독부와 선교부와 갈등이 일어나서 새로 부임한 교장이 배화 학교 사감과 야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자 차미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내가 배화 학교 사감 노릇만 하고 있겠소. 나는 우리 동포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소.”

이에 차미리사는 배화학당 사감 자리를 내놓고 감리교 여선교부와의 관계도 정리하고 독자적인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가기로 결심한다.(10) 당시 3.1운동은 조선 교육운동에서도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는데, 차미리사는 조선 여성의 손으로 세운 여자교육기관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면서 3.1독립운동이 있었던 기미년이 가기 전인 음력 섣달 그믐날(양력 1920년 2월 19일)에 ‘조선여자교육회’를 발기하고 새문안 염정동 예배당의 지하실을 빌려서 부인 야학을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이것이 ‘근화여학교’(槿花學院)의 전신이고, 일제 말기에 그 이름이 문제가 되어서 다시 총독부의 압력으로 ‘덕성’으로 개명되면서 덕성학원의 모체가 된 것이다.

차미리사는 당시 엘리트 교육보다 “깊은 단잠에 들어 있는 일반 여자계에 각성을 촉구하는 폭발탄을 던지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과부된 여성 등 특히 더 고통받는 대중여성들에게 주목하면서 ‘부인야학강습소’를 시작한 것이다. 가난 때문에 배우러 오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강습소 비용마련도 조선여자교육회의 이름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개최해서 기금을 모집했다고 한다.(11)

그 활동의 일환으로 1920년 5월 1일에는 종로의 승동교회에서 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승동교회는 양반가의 첩이나 백정 같은 기층민들이 많은 교회로 3.1운동 당시 학생단의 거점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날 토론의 주제가 ‘오늘날 조선 여자계의 급선무가 조선에서 활동함이냐 혹은 해외에 유학함이냐’였다고 하는데, 이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서구 사상 종속과 그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여전히 중요한 관건임을 본다. 훗날 차미리사의 후견인으로 역할 했다는 여운형도 승동교회 출신이어서 그와의 인연을 이어나갔고, 이처럼 신분해방과 민족해방운동을 동시에 이끈 유서 깊은 곳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토론회도 개최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지적되었다.(12)

차미리사는 근화학원은 “서양 사람의 돈이나 기타 외국 사람의 돈이라고는 한 푼도 섞이지 않고 순연한 우리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으로 생긴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정규학원에 입학하지 못해 갈 곳이 없이 방황하는 학생들을 수용하고 사회의 그늘에 있는 여성들을 위한 실업교육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님을 항상 강조하였다.(13) 하지만 일제 말기 황국화 신민교육에 몰두하던 총독부는 그녀를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지 못하니 교장 될 자격이 없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서 교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했고, 대신 친일 인사 송금선(宋今璇, 1905-1987)을 후임으로 두어서 덕성학원은 이후 그 가족의 소유처럼 세습되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서 한국 여성에 의한 ‘순 조선적인 학교’라는 뜻깊은 역사와 의미가 묻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국 여성의 가장 어려운 처지를 대변하는 일을 기독교 신앙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공통으로 해서 실행한 차미리사의 독립정신은 말년에 그녀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가깝게 지낸 연고로 건준위가 서울 한복판의 덕성여자실업학교 건물을 그 본부로 사용하도록 했고, 김구가 제안한 남북연석회의의 성명서에 당시 지식인 108명이 서명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는 등의 일로 표현되었다.(14)

이승훈과 3.1운동 개신교 정신의 민중해방적 특성

▲ 남강 이승훈 선생

이상의 차미리사의 삶에 이어서 3.1운동 개신교 정신의 민중 해방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화신으로 한 사람 더 언급하자면, 앞의 함석헌도 3.1운동에서 잊지 못할 두 사람 중 한 명으로 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들고자 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남강은 “할 것은 하자는 사람”이었다.(15) 즉 그는 자기 개인의 사리를 따지지 않고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일을 맡아 했다는 것이다.

어려서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부터도 그러한 정신으로 자신의 할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만약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그가 없었다면 3.1독립운동 선언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3.1운동으로 3년 4개월의 옥고를 치르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가장 늦게 출옥했는데, 그런 그의 삶에서 민중 주체의 개신교 사고의 뛰어난 결실을 본다. 가난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학업 대신에 상점의 사환과 점원 등으로 어렵게 살면서 자수성가한 그는 인생의 큰 전환을 기독교 신앙을 통해 이루었고 평생 겸허하게 자신을 ‘심부름꾼’으로 낮추고 비우면서 민족과 민중을 위한 헌신과 섬김의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 그는 사후 자신의 시신까지도 그가 세운 오산학교 학생들의 학습을 위해서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다음 말은 어떻게 한국 사회 인습의 신분과 학식의 장벽을 뛰어넘어 진실한 기독교적 민중의 언어를 통해서 한 뛰어난 자존과 자립, 자기헌신의 인격이 출현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감옥에 들어간 후에 이천 칠백여 페이지나 되는 구약을 열 번이나 읽었고 신약전서를 사십 독을 하였소. 그 외 기독교에 관한 서적 읽은 것이 칠만 페이지는 될 터이니 내가 평생에 처음 되는 공부를 하였소. 장래 나의 할 일은 나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바쳐서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오. 그러나 나의 일할 교회는 일반 세상 목사나 장로들의 교회가 아니오. 나는 하나님이 이제부터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그 뜻을 받아서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려고 하오.”(16)

 

미주

(미주 1)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노명식, 같은 책, 123-124.
(미주 2) 이우정, 『한국기독교여성백년의 발자취』, 민중사, 1985, 148.
(미주 3) 정화영, “3.1운동 여성 참여의 신학적 의미”, 한국기독교학회 제47차 정기학술대회, 같은 자료집, 267에서 재인용.
(미주 4) 이우정, 같은 책, 156-157.
(미주 5) 박용옥, “김마리아”, 『인물로 본 한국사』, 월간중앙 1월호 별책부록, 1973.1, 267.
(미주 6)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 67-68; 이우정, 같은 책, 159.
(미주 7) 김삼웅, “3.1혁명과 여성독립운동”, ‘3.1운동과 여성’ 범국민 발대식 및 토론회, 2018.1.29(월)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3.1운동과 여성 100주년 기념사업회 자료집, 28.
(미주 8) 이우정, 같은 책, 161.
(미주 9) 박용옥, 같은 글, 268.
(미주 10) 한상권, 『차미리사 평전-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푸른역사, 2008, 094.
(미주 11) 같은 책, 124-125.
(미주 12) 같은 책, 132.
(미주 13) 같은 책, 230-231.
(미주 14) 같은 책, 367. 내가 여기서 길게 소개하는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 여사를 알게 된 것은 그녀의 평전을 쓴 덕성여대 사학과의 한상권 교수를 통해서이다. 그는 덕성여대 사학비리재단 문제로 끈질기게 싸워온 교수인데, 본인도 2005년 당시 재직해 있던 세종대에서 교수재임용 문제 등으로 다시 재단비리 문제가 불거지자 교수협의회 일을 맡게 되었고, 그 직책으로 민주총장을 모셔오는 일을 주관하면서 양승규 총장을 초빙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대한민국의 사학비리 문제와 씨름하는 가운데 맺어진 인연으로 한상권 교수가 양승규 총장에게 보낸 차미리사 평전을 본인이 받은 것이다. 오늘 한국 사학재단의 문제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고 일제 강점기의 친일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여기서도 다시 드러나며 친일 유산의 청산 문제가 한국 사회 곳곳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볼 수 있다.
(미주 15)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노명식, 같은 책, 125; “남강(南崗), 도산(島山), 고당(古堂)”, 같은 책, 246.
(미주 16) 1922년 7월22일 동아일보 기사, 金基錫, 『南崗 李昇薰』, 한국학술정보(주), 2005, 236, 박재순, 같은 책, 54 재인용.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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