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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기사승인 2019.01.28  20: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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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하임의 이야기를 통해 개신교의 본질을 고민해 보자

지난 해 추석 명절을 전후해 모 신문사에 실렸던 칼럼 하나가 신선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게재된 이 칼럼은 어떤 현상 혹은 상황에 대한 본질을 묻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문이 회자되며 아직도 패러디가 이루어지고 있다.

본질을 물어야 할 또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본질”이라는 단어에 대해 국어사전은 이렇게 풀이해 놓고 있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무한히 확장 가능한 단어이고 이를 둘러싼 논쟁도 수없이 있어 왔고 이어지고 있다.

이 단어가 표상하는 활동은 신앙의 영역으로 고스란히 유입이 가능하다. 아니 서구 역사에서 신앙 영역에서의 이러한 본질 물음은 일반 사회영역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오히려 일반 사회 영역에서 이러한 본질 물음은 중세 ‘그리스도교’(1)가 ‘로마가톨릭’(2)과 프로테스탄트로 분리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라는 작업가설(Arbeitshypothese) 없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일반 학문 사회는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묻기 시작했고 답을 찾아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등을 다시 묻고 “그리스도교의 신”과 “그리스도교 신앙 없이” 대답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 중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하나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것이다.

역으로 이러한 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그리스도교도 그간의 본질을 알고 해답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점차 벗어나 다시 본질을 사고하기에 이르렀다. “성서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십자가란 무엇인가?” 등을 다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를 열어젖혔던 교회 분리가 이를 추동하는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교회 분리 시기를 지나 다양한 본질 물음은 이어져 왔고 어느 정도 해답도 쌓아갔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 물음은 시대 상황과 맞물려 끊임없이 새로운 해답을 찾기에 분주했던 것이 그리스도교의 또 하나의 본질이었다. 시대마다 해묵은 물음들이 다시 전면에 부상하기도 했고 기존의 답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답을 내놓기도 했다.

1920년대, 개신교의 본질을 묻다, 왜?

▲ 독일 루터교 신학자 칼 하임 ⓒGetty Image

여기 독일이라는 한 공간에서 1920년대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그리스도교의 본질 물음에 답하려는 책 한 권이 있었다.  『Das Wesen des evangelischen Christentums』. 아니 그리스도교라는,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괄하는 종교 조직이 아니라, 범위를 더욱 좁혀 프로테스탄트 혹은 개신교의 본질을 묻고 답하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정리하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이 책은 한국에서는 아직도 생경하지만 칼 하임(Karl Heim)이라는 걸출한 신학자가 그 당시 독일 상황과 맞물려 대답을 시도한 것이다. 1926년 독일에서 출판된 책이다. 이 『개신교의 본질』(3)이라는 책을 정선희 선생이 독일어에서 일차 번역을 하고, 숭실대 김회권 교수가 영어본역본과 대조해 교차 검증을 마친, 사실 두 번의 번역이 이루어진 책이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번역서의 미덕은 가독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전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만들게 하는 번역본이라면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위치나 내용이 아무리 높고 좋더라도 번역본으로는 가치가 없다고 혹평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국 학자가 자국어로 출판한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번역이 매끄럽다.

서론이 길었다. 먼저 칼 하임이라는 조금은 독특한 이력(4)을 가진 학자가 이 책을 출판하도록 추동한 독일의 상황이란 무엇이었을까? 칼 하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근 ‘가톨릭에서 개신교로’(5) 교적을 옮기는 개종이 많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내적 공허는 피안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신비한 매개물을 소유한 사제 중심의 거대한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문에 직면해 있는 개신교도들도 많다.”(59)

칼 하임으로 하여금 이 책을 추동시킨 원인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개신교인들이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독일 개신교들이 내적 공허로 인해 피안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신비한 매개물을 찾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 하임은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논의들의 초점은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신구교 싸움에 끼어들려는 데 있지 않다. 어느 한쪽의 신앙고백으로 선동하거나,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어떤 특정한 결정을 하도록 이끌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모든 진지한 결정에 필요한 사려 분별을 하고, 세계관과 인생관의 궁극적인 대립점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려는 것일 뿐이다.”(59)

두 가지 물음이 촉발시킨 그의 저술활동은 소위 “개신교가 이러이러한 면에서 더 좋다”, 혹은 “개신교가 가진 사상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더 옳다” 식의 내용으로 전개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칼 하임의 이러한 선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해 성공하고 있다. 개신교가 좋다거나 옳다거나 하는 구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개신교, 무엇이 문제였나

이렇게 시작된 칼 하임의 논의는 치밀하게 순서화 되어 흘러간다. 그가 이 책을 쓰도록 추동했던 이유 중 첫 번째였던 가톨릭을 향한 개신교인들의 향수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 절대주의에 대한 복고주의적인 향수, ▲ 신비주의적 초월에 대한 향수, ▲ 가톨릭교회의 예배 형식에 대한 예술적 향수, 마지막으로 ▲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보편주의에 대한 향수 등이다(63-73).

이 부분을 읽고 나서 필자의 머리를 스친 생각은 이 현상 혹은 이 향수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개신교의 과제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다. 좁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로마가톨릭교회가 예배 갱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은 별로 듣지 못했지만 개신교는 끊임없이 예배 갱신에 대해 논의되고 있다. 이 말은 그래서 로마가톨릭 미사가 더 낫다는 뜻이 아니라, 개신교 예배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뜻이다.

특히 개신교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중요한 순서 중에 하나인 설교 혹은 말씀 선포만 보더라도 사실 개신교인들에게 역설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인종과 성을 불문하고 차별적 단어들의 난무, 권위주의적 발언들, 성서 본문과는 아무 상관없는 개인 이야기 등. 가장 중요한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어 버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

필자의 주위에 비신앙인이나 혹은 개신교로부터 이탈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로마가톨릭 미사를 참석해 보고 싶다는 이유 중에 대부분이 개신교 목사들의 설교의 황당함도 한몫하고 있지만, 로마가톨릭 미사가 주는 진중함의 매력을 언급한다. 뒤집어 보면 개신교 예배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확실하다. 곰곰이 개신교를 돌아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건널 수 없는 그 심연

칼 하임은 서론격인 1장 이후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하나하나 분석해 간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 원인”(2장),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3장)라는 제목을 붙인 교회 이해에 대한 논의,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와 프로테스탄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4장) 등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두 종파의 공통점과 그들 사이의 대립이 그리스도 이해에 달려 있음”(132)을 보여주며 전반부를 마무리한다.

특히 3장과 4장에서 교회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을 칼 하임은 역사적 전통에 따라 정리한다. 3장의 제목이기도 한 마태복음 16장 18장에 대한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해석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칼 하임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너를 반석으로, 기초석으로, 기둥으로 만들어, 그 위에 살아 있는 돌들로 전체 집이 세워지도록 하겠다. 나는 너에게 아주 특별한 전권을 준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네가 내릴 결정들은 초세속적인 효력을 가질 것이다. 네가 땅 위에서 매는 것은 또한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교회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되는 사람들의 줄에서 첫 번째인 사람인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실제로 이러한 위치를 차지했다.”(106-107)

교회공동체의 특징을 명확히 진술한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수많은 지체들이 베드로부터 시작해 열두 사도들이 기초석이 되고 그 위에 쌓여져 가는 것으로 해석했다. 칼 하임은 이 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들에 의해 세워진 모든 교회를 넘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기초가 놓인 공동체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진실한 예배자들이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령의 교회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인가에 대한 싸움도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다음 말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110)

필자가 보기에 교회공동체를 논의하는 부분은 이 책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제8장 “제사장직의 종말”과도 연결되어 있다. 칼 하임은 8장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배가 제사장 계급의 손에서 양심을 마비시키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그 단순한 요구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이 된 것을 겨냥한 것이다. 이처럼 양심을 지배하려는 제사장으로부터 양심을 해방시키려는 강력한 투쟁은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가라앉지 않았다.”(189)

조금 더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로마가톨릭 사제나 개신교 목사라는 ‘브로커’(6)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사제 혹은 목사라는 브로커가 장악한지 이 두 종파만큼 오래된 것이 사실이다. 태생적으로 종교 조직 혹은 교회공동체는 종교 브로커들이 활약할 수밖에 없는 곳이 아닐까 한다.

지난 2017년 전세계는 로마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주목했고, 여러 논의를 했었다. 특히 개신교는 더욱 감회에 젖어 다양한 행사들을 펼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추구했던 “브로커 없는 공동체”를 얼마나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은 여전히 불분명해 보인다.

또한 칼 하임은 8장을 마무리 하면서 종교 브로커들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역설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개별자는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똑같이 멀리 떨어져 있다.”(201)

쉬운 말로 하나님과의 거리는 개별자로서의 신앙인들이나 사제 혹은 목사나 차이가 없이 멀거나 가깝다는 뜻이다. 누가 더 가까이 있냐를 평가할 수도 없을뿐더러 증명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어쩌면 16세기 개신교가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며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서 나왔던 것은 이 문제가 중요한 한 축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개신교 현실은 어떤가? 개신교 본질을 잘 추구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그 어느 개신교인들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 현실이 아닌가.

이 8장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칼 하임은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밑바닥을 흐르는 신학적 혹은 사상적 기반을 토마스주의와 칸트주의로 대별하고 있다. 칼 하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이러한 점에서 두 종파를 분리시키는 깊은 대립은, 가톨릭 편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도자인 반면 프로테스탄트즘에서는 항상 칸트가 지칭된다는 사실 속에서 철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도대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이유는 어떤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식론적인 사실들에 있지 않다. …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든 철학의 궁극적인 문제, 즉 신의 문제에 달려 있다. 토마스와 그를 계승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가톨릭교회 철학자들은, 우리 인간들이 신神존재 논증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전유專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신존재 논증이란 소위 인간 정신의 제단 위에서의 ‘신의 현현’으로, 사제가 하나님의 권능을 미사 제단으로 끌고 내여오는 행위에 상응하는 것이다. 사제가 주문을 외워 신을 제단 위로 불러낼 수 있듯이, 철학자는 신존재 논증의 마법지팡이로서 본성으로부터, 세계의 합목적적 제도로부터, 사고하는 정신으로부터의 논증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모든 사고하는 인간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이러한 신비주의적 시대에 칸트를 그토록 인기 없게 만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하나님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세우는 프로테스탄트적인 단호함 때문이다.”(200-201)

일단 이 문장들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프로테스탄트가 칸트를 기본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칸트는 “루터의 영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보다 훨씬 후대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또 한명의 인물을 떠올렸는데 바로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데카르트였고, 일부 학자들은 신존재 증명 방식에서 로마가톨릭을 “데카르트적”(7)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토마스주의든 데카르트적이든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칸트주의와의 근본적인 대립은 신존재 증명이나 인식에 있어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계시 의존 사상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칼 하임이 이 책을 출판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소위 ‘전간기’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독일에서의 신학 흐름은 성서비평학을 필두로 이성의 극한을 실험하던 때이기도 했거니와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제창하며 자유주의 신학의 놀이터에 폭탄을 투하했던 때였다고 후대는 평가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offenbarung Gottes)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상이 독일에 퍼져가고 있었던 때가 아니던가. 필자는 칼 하임 또한 바르트의 이러한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칼 바르트를 포함해 폭넓게 변증법적 신학 그룹으로 지칭되던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과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의 연구를 빈번하게 참조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눈을 개신교로 돌려보자. 신인식 문제에 있어 개신교 신학 그룹들이 칸트주의를 따르고 있냐는 문제는 차후로 돌려세우더라도 칸트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한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 주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현재의 개신교가 이를 수용하고 잘 따르고 있을까?

현재 한국교회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목회자들의 설교들이 과연 그러할까? 필자에게는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인다. 물질의 획득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외치는 설교는 물질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경한 생각까지 해보게 만든다.

본질이 있다면 그 본질에 충실한 개신교가 되기를

이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더 많은 내용들을 언급하고 싶지만, 어쩌면 우스갯소리로 그건 스포일러가 아닌가 싶고, 관심 있는 독자들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정말 좋은 책이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개신교인들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개신교가 낫네!” 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필자는 단연코 그 평가는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저자가 언급하듯이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을 드러낸 책이다. 누가 더 옳냐 그르냐로 접근해서는 안 될 책인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저자가 주장하듯이 “루터의 영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핵심”에서 현재의 개신교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책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시의적절한 때 시의적절한 책을 미려하게 번역한다고 수고하신 번역자들과 그리고 편집의 미를 한껏 살려주신 “도서출판 복있는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미주

(미주 1) 이러한 표기는 필자의 개인적인 것이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를 포괄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기독교라는 표현도 있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개신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착오가 없으시길 바란다.
(미주 2) 책에는 가톨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뜻을 생각하면 로마가톨릭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미주 3) 칼 하임, 『개신교의 본질』, 정선희·김회권 옮김(서울: 복있는 사람, 2018). 이하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할 때는 책의 쪽수만 괄호 안에 표기한다.
(미주 4) 칼 하임은 사실 그 당시 부상하고 있던 과학과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했던 학자였다. 연세대 신학과 한태동 교수는 칼 하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신학연구에 있어서 오래 동안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던 것이다. 근래에 이르러 자연과학계에도 비범한 발전과 변동이 있음을 따라 과학철학이 대두케 되었고, 일반철학계에도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우리 신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칼 하임(Karl Heim) 같은 분이 선두에 서서 이러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한태동, “수리논리에서 보는 신학”, 「신학논단」 제5권,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59), 115; 또한 칼 하임이라는 학자의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알리려고 애썼던 그 당시 순복음신학대학교 구약학 장국원 교수는 칼 하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31년 하임(Heim)은 신교신앙과 현대사상(Der evangelische Glaube und das Denken der Gegenwart)의 여섯 권으로 된 총서(叢書) 중 제1권 신앙과 사유(Glaube und Denken: engl. trans. God Transcendent)를 출판하였다. 이후 약 20여년 동안 여섯 권의 충서 집필을 하였는데 그 제2권은 『주 되신 예수님』(Jesus der Herr)이고 제3권은 『세계의 완성자 예수님』(Jesus der Weltvollender)이며, 제4권은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Der Christleche Gottesglaube und die Naturwissenschaft)이고 제5권은 『자연과학적 세계상(世界象)의 변천(變遷)』(Die Wandlung im naturwissenschaftlichen Weltbild)이며 제6권은 『세계창조와 세계종말』(Weltschöpfung und Weltende)이다.” 이 총서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칼 하임은 “자연과학과 신학의 제이차적 연결선”을 추구했던 신학자이다. 장국원, “칼 하임의 생애와 사상”, 「교회와 한국문제」, 제1권 (서울: 기독교한국문제연구회, 1989), 30.
(미주 5) 이 부분은 번역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책 내용을 고려하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번역해야 맞다.
(미주 6) 존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 김준우 옮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참조.
(미주 7) Geoffrey W. Bromiley, Historical Theology: An Introdcution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8), 372-388. 데카르트는 신존재 증명에서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존재인 내가 사유를 통해서 완전한 존재를 임의로 만들어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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