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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것

기사승인 2019.01.23  18: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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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네가 어찌 내 백성이 재난당하던 날 그들의 성문에 들어갈 수 있고 그들이 환난당하던 날 그 고통을 구경만 할 수 있고,  그들이 재난당하던 날 그 재물에 손댈 수 있고, 길목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죽일 수 있고, 그들이 고난당하던 날 그 살아남은 자들을 넘길 수 있었느냐(오바댜 1,13-14)

오바댜는 에돔에 대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에서의 후예들인 에돔은 ‘형제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도 이스라엘이 망했을 때 웃었고 위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오바댜의 이 말에서는 ‘너네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서운함과 배신감이 깊게 묻어나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역사적 관계는 어떨까요? 에돔은 옛날 출애굽 이스라엘에 지날 길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후 정착한 이스라엘은 에돔과 자주 전쟁을 했고, 난공불락이라고 자랑하던 에돔을 때로는 속국으로 삼기도 하며 에돔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역사적’ 기억 때문에 에돔에 우호적이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의 감정도 좋았을리 없고 피해의식도 있었을 법합니다. 그래서인지 에돔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망하기를 적극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을 때 피해의식은 우월의식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롱과 심지어 약탈과 폭력까지 낳은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보복이고, 악순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으로 그 피해의식이 극복되고 그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행위가 ‘야만적’임을 인식하게 되면 오히려 더 참담해지지 않을까요? 머지않은 장래에 그들도 망하게 되었을 때 당시를 생각하며 후회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인접 형제국 에돔에 대해 ‘한’을 쌓고 저주에 저주를 쏟아붓습니다. 당시 그들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이상해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예컨대 지금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그와 에돔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습니다. 양자의 불행한 관계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던지 긴 역사에서 그 관계는 일방적이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상대의 비열한 행위를 초래케 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없지 않다면, 당사자에게 ‘당연했을’ 저주도 문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폭력과 저주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을 역사적 뿌리가 깊어서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하며 받아들인다면, 계속 ‘역사적 한’을 쌓고 되새김질한다면, 평화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고통당하는 북에 고통을 더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해야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역사적’ 한을 넘어설 수 있을런지요? 정말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개인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 사이에서도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화의 토대가 한뼘이라도 마련된다면, 그위에 '한'의 역사를 넘어갈 새로운 역사인식의 지평이 열리고 그 토대는 넓혀질 것입니다.

한을 풀어내는 역사를 보여주신 하나님과 우리의 삶터에서 평화의 내일을 열어가는 오늘이기를. 원수같은 자의 고통을 고소하게 여기기 보다 그 고통을 덜어줄 만큼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넓혀지는 이날이기를.

▲ 옛 에돔 왕궁 ⓒGetty Image

김상기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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