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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시대 기독교, 생태종교 될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19.01.22  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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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 박찬국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오랜만에 기독교 환경연대 식구들 앞에 섰다. 한 때 열심을 냈던 곳인데 그간 두 가지 이유로 거리를 두게 된 듯싶다. 첫째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책임지기에는 고인 물처럼 새로움이 깃들지 못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고, 둘째는 좀 더 총체적 시각에서 환경문제를 보고픈 탓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국제 기후 종교 네트워크(ICE) 상임대표 직을 맡게 되었으니 처음 삶이 다시 이어진 셈이다. 기후변화-내겐 기후붕괴란 말이 더 실감 난다-로 인해 지구와 인간이 함께 피폐해 질 것이란 두려움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한때 저는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의 말을 빌어 우리시대의 생태학적 관심을 위해 ‘두려움의 발견술’이란 말을 차용한 적이 있다. 시대를 성찰하며 ‘우환의식’을 전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과제라면 기후변동을 예감하며 미래를 진단하는 과학자들의 사명을 ‘두려움의 발견술’이라 여긴 탓이다. 이와 함께 기후 변동에 무심한 사람들을 일컬어 생태맹(盟)이라 일컫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역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자연의 붕괴가 더딘 탓에 ‘두려움의 발견술’은 ‘게으른 목동’의 거짓말처럼 사람들에게 익숙해졌고 잊혀졌다. 오늘 우리가 창조신앙의 이름으로 기독교환경연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것도 실상 거짓된 익숙함을 벗고자 함일 것이다. 환경위기를 신앙의 차원에서 좀 더 절실하게 여기려는 차원에서 말이다.

여기서 요나스에게 배울 또 다른 시각이 있다. 무너져 내리는 자연과의 인간의 관계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관계하듯 자연을 인간에게 있어 무조건적 책임의 대상이라 했다. 인간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던 자연, 지금 그것이 붕괴되었기에 갓난아이 대하듯 모든 정성이 그를 향해져야 마땅하다.

나는 이것을 환경선교라 칭했고 창조신앙을 지닌 기독교의 할 일 중 가장 으뜸이라 역설해왔다. 자연에 대한 무제약적인 인간의 책임, 이것이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의 존재이유라 여긴 탓이다. 목하 자연이 ‘새로운 차원의 가난한 자’(New Poor)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종교도 자연(풍토)위에서 각기 달리 형성된 것이 사실이다. 세계관 없이는 종교도 없는 바, 여기서 자연은 세계관을 근거 짓는 으뜸 요소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1.

사막 풍토 위에서 생겨난 히브리 종교, 그것은 기독교의 앞선 모습으로 이후 기독교를 규정 지웠다. 주지하듯 히브리 종교는 사막에서 생존했던 터라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막풍토에서 이는 생육을 위해 필연적 일이었다. 이 경우 지배와 정복은 오늘의 개념과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어머니로서의 자연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척박한 땅에서 인간의 의지는 강화되었고 그 의지는 급기야 자연을 초월한 인격신을 신뢰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능력, 그것은 히브리 종교의 특징이자 능력이었다. 자연을 능가하는 초자연적 신의 능력을 인간도 지녔다 믿기에 이르렀다. 두바이 인근 사막위에 건설된 엄청난 규모의 스키장을 보며 사막형 종교의 힘을 실감한 적이 있다.

이후 히브리적 초월종교가 목장형 풍토인 희랍을 거쳐 유럽에서 기독교로 재구성 되었음에도 이런 지향성은 변하지 않았다. 풍토가 달라지면 살고 생각하는 방식 또한 달라져야 옳거늘 그리하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지배, 정복의 에토스가 기독교의 본질로 여겨졌다. 더욱이 독일에서 시작된 개신교(종교개혁)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짝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초월적 신에서 내면적 인간에로 무게중심이 옮겨졌으나 신이 그렇듯 인간은 자연에 대해 여전히 초월적 존재였던 것이다.

인간만을 ‘하느님 형상’이라 했고 자연과 여성을 ‘하느님의 흔적’이라 해서 차별했다. 인간의 자연지배 역사와 남성의 여성지배 역사가 동근원성을 지닌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지닌 근대는 자연을 마녀 사냥하듯 착취했고 기독교가 그 중심에서 역할 했다. 이런 이유로 생태학적 위기의 뿌리가 기독교라는 가슴 아픈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가부장적 기독교는 반(反)생태적 종교로서 기독교의 또 다른 모습이 된 것이다.

2.

1990년 이 땅에서 개최된 JPIC 대회 이후 기독교는 교리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적 차원에서 종말의 위기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사실적 종말’의 위기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 한다’는 우주적 진실을 깨친 생태학이란 학문의 덕분이었다. 어떤 것도 실체로 존재치 않고 과정(운동)으로 존재한다는 신과학의 등장, 지구 역시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가이아 학설 등이 이에 힘을 실어 주었다.

▲ JPIC Logo ⓒWCC

JPIC 대회 이후의 기독교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현실과 함께 기독교의 존재양식을 전혀 달리 만들었다. 이 행사 이후로 브라질 리우 환경회담을 비롯한 세계적 차원의 기후 협약이 생겨난 것은 인류미래를 위한 실 낮같은 희망이다. 분배 문제, 핵문제 그리고 생태계위기가 해결되지 못하는 한 기독교적 구원(정신)이 아직 요원하다는 말도 생겨났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언어로만 소통되는 구원개념과는 동이 서에서 멀 듯 이질적이다.

하지만 1990년을 기점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로 막아야 함에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이 앞장서 기후 협약을 깨고 있으니 큰일이다. 얼마 전 폴란드에서 열렸던 세계기후대회에서 조차 미국의 역할이 전무했다니 소비의 나라 미국의 죄악이 크다. 미국 교회만을 바라보는 것이 한국 교회들의 실상인데 이렇듯 트럼프의 미국의 악행에 대해 미국 내 교회들, 신학자, 목회자들이 어찌 항거하는 지 궁금하다.

3.

본 강연을 준비하며 틈틈이 세 권의 책을 읽었다. 한권은 가장 동양적 자연관을 닮았다는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풀어놓은 철학 서적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생태학』(J. 포스터)이다. 이 두 권의 책 성격은 전혀 다르다. 하이데거를 다룬 앞의 책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박찬국)는 신비적이고 뒤 책은 유물론적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 두 책은 취사선택할 수 없을 만큼 저마다 생태학적 의미가 깊다. 창조신앙의 심화 및 함양을 위해 두 책이 모두 필요하다.

이 두 책을 필자는 유대인 철학자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미래의 역사』의 시각에서 재의미화 했다. 4차 산업 시대의 특징으로 인간과 기계가 결합하는 기계인간(트랜스/포스트휴맨)의 탄생을 말한 까닭이다. 기존 종교대신 빅 데이터가 종교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지금껏 생태학적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제들이다. 그런 세상이 도래할지 모르겠지만 앞선 두 책 내용을 갖고서 포스트 휴먼의 세상을 걱정해 보려고 한다.

4.

주지하듯 하이데거는 일체 존재하는 것을 성스럽다 여겼던 철학자, 신비가이다. 지금껏 서구철학이 개별 ‘존재자’들에게만 관심하고 존재자의 ‘존재’ 자체를 묻지 않은 전통에 비판을 가했기 때문이다. 익히 알 듯 존재하는 것에 깃든 성스러움이 송두리째 사라진 세계가 목하 자본주의 현실이다.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이 세상이 신이 인간이 된 공간이라면-초월의 초월은 이 땅이다- 하이데거 말대로 성스럽지 않은 것은 이 땅에 존재치 않는다.

성스러움을 이용(활용)가치로 전락시켰기에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오히려 ‘궁핍한 시대’라 불렀다. 제우스와 관계된 틴달로스의 신화가 말하듯 영원히 물속에 갇혀있으면서도 정작 한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해 영원히 갈급한 상태인 우리 시대에 참으로 걸 맞는 말이다.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것이 자원이자 소모품으로 처리되는 이 세상은 궁핍하고 처절하며 영원히 목마를 것이다. 과학적 정보를 종합한들 향내 나는 꽃 한 송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창조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신비를 경험하며 사는 일과 다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종교와 무관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오히려 과학이 전능한 산업종교가 되어 버린 듯 하다. 4차원의 시대, 인간과 기계가 혼합되는 시점이 도래하면 산업종교의 위력을 더 실감할 것이다. 기독교가 생태종교가 되려면 우선 도처의 존재들과 감응할 수 있는 열려진 인간성을 배울 일이다. 그런 인간적 기본정조를 일컬어 하이데거는 ‘경이’(놀람)라고 했다. 성스러움과 짝하는 개념이 ‘경이’(놀람)란 것이다. ‘있음’(존재)자체가 신비인 탓이다.

어느 것도 홀로 자족하여 존재할 수 없고 상호 의존적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의 근원적 모습에 놀라야 마땅하다. 하느님 없이 세상없고 세상없이 하느님도 없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인격적 방식으로 관계하나, 동시에 지렁이에게도 그의 방식대로 관계하고 있다. 단지 인간이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삼위일체는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을 일컫는다. 만물위에 있으나 만물 안에서, 만물을 통해서 일하는 분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땅을 비롯해 일체 존재를 인간 탐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생태종교인 기독교의 할 일이다.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란 말이다.

성서는 탄식하는 피조물들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라고 했다(롬8:18-25). 자신들 마음을 열어 하늘을 향한 자연의 소리를 듣고 치유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 속에서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 시대의 성령체험이 되었다. 생태계의 신음이 성령의 탄식인 탓이다. 그렇기에 성령체험은 존재의 성스러움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전 우주 자연이 위대한 사원이자 교회인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5.

한편 마르크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논외로 여겼던 희랍의 유물론(에피쿠로스)에 심취했었다. 그가 자본주의에서 비롯한 인간소외와 함께 자연소외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도 바로 유물론에 대한 연구 탓이다. 아는 대로 유물론은 관념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선험성 대신 귀납적 지식에 의거하고 있다. 그렇기에 의당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을 거부한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말하고 그로써 자연이 神께 봉사한다는 가톨릭 신학이론과 대척 선상에 있다. 유한(자연)을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목적론의 폐해를 극복할 목적에서다.

이렇듯 유물론의 영향 탓에 마르크스는 ‘자연소외’ 문제를 중히 여겼다. 노동(인간)소외가 필히 자연소외(약탈)와 연루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결과였다. 두 소외의 극복을 위해 마르크스 유물론은 앞에 실천(변증법)적, 혹은 역사적이란 말을 붙여서 이해해야 옳다. 그가 후일 다윈의 자연관, 곧 진화론을 적극 수용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는 물질적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가 전 지구적 차원에 의존해 온 것을 여실히 자각했다.

만약 4차원의 산업이 자연 속에 자연이질적인 어떤 것을 주입해 생태적 변화를 초래할 경우, 그것은 눈먼 장님의 불장난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만큼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 및 조건을 중시했다. 그것 없으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신앙을 지녔다는 우리 역시 하느님보다 실상 보이는 물질에 더 마음을 빼앗기며 살고 있다. 하느님마저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자본화된 기독교 현실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로서의 자연(진화)을 욕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마르크스는 애시 당초 녹색의 사상가였다. 기독교를 녹색의 종교로 만들려고 애쓰는 시점에서 마르크스가 중요한 이유이다. 그의 인간(사회)이해가 처음부터 생태적 세계관과 불이(不二)적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이다. 생명이 하늘에서 만들어졌는가(창조) 아니면 땅에서 생겨난 것인가(진화론)의 대립은 중요치 않다. 후자를 말하지 않는 전자는 공허하며 전자 없는 후자역시 맹목적일 수 있기에 상호 보완은 반드시 필요하다.

6.

마르크스는 식량증가가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맬서스 인구론을 비판적으로 읽었다. 이는 지구가 인간을 부양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이론으로서 자연(지구)이 지닌 역사성을 몰이해한 결과였다. 당시 사회는 맬서스 이론에 근거, 가난을 자연법칙이라 여겼고 자연능력을 향상시키기보다 가난을 구제하는 부르주아 정책(救民法)을 펼쳤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볼 때 이것은 인간을 토지(자연)로부터 추방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폐하는 빈민구제법 대신 마르크스는 토양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였다. 인간해방을 위해 자연 역시도 향상,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확신이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자연을 신성한 어머니로 보는 자연숭배(관념론) 역시 거부했다.

기독교의 창조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책임적 관리자로 인간이 불려 졌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간의 위계적 질서를 부정하지만 ‘약한’ 인간중심주의조차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역시 고정불변한 자연대신 변화하는 자연, 곧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했다. 인간/자연, 피차의 해방을 위해 인간과 자연을 보다 견고하게 묶어 놓은 것이다. 그럴수록 토지(자연)의 사적 지배를 부정하는 입장 역시 견고하다.

여기서 핵심은 토양학에 대한 관심이었다. 토양은 인간생존과 밀접한 자연의 구체적 실상이다. 물질대사가 활발한 비옥한 토양 만드는 것, 그것이 마르크스가 추구한 생태학이었다. 마르크스는 토양의 퇴화를 막기 위한 무수한 방책들을 연구했다.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생물학(진화론)을 공부하고 토양학까지 섭렵, 통섭적인 생태학을 창조한 것이다. 생산-소비 과정에서 비롯한 일체 폐기물들이 토양(자연) 속에서 재창조 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는 오늘 우리가 자본화된 농업에서 보듯 토지를 약탈, 퇴화시키는 방식으로 진보를 추구한 당시 기독교 서구문명에 대한 저항이었다. 인간과 지구(자연)간의 물질대사가 원할 치 못할 경우 인류의 문명, 정치경제적 환경 역시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마르크스 생태학은 하이데거와 달리 낭만적, 신비화되지 않았고 유물론적 토대 하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 생태신학역시 자신의 비현실성을 극복하려면 마르크스 생태학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7.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시각에서 이 두 책 내용을 연결지을 필요가 있겠다. 본 책에 따르면 이 두 생태철학자들은 벌써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다. 4차 산업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며 전혀 다른 세상을 전망하는 탓이다. 그의 말처럼 지금껏 인류가 경험한 것 이상으로 경천동지할 세상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기 후쯤이면 지구를 넘어 인근 위성에서 거주할 때가 이를 수도 있겠다.

알파고 이후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다. 빅 데이타의 영향으로 전지전능한 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봇 인간의 상용화도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직업도 수없이 없어지고 재생산될 것이라 한다. 이런 전망 하에서 자신들 전공을 달리 선택하는 이들도 생겨나는 중이다. 인공지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직업을 고민하기도 한다. 예술분야 만큼은 인간이 기계를 능가할 수 있다고들 전망한다. 공감력 역시 인간고유한 능력이란 점에서 중히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4차 산업을 말하는 이들의 전망 속에 자연 생태계는 생략되었다. 지구가 망가지면 다른 위성으로 건너가 살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엿보이니 말이다. 4차 산업시대가 도래한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며 더 큰 새로운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하라리의 책 내용을 생태학적 차원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

8.

이 책의 주제는 인간이란 생물종을 넘는 새로운 종의 탄생 여부이다. 트랜스휴먼 혹은 포스트휴먼으로 불리우나 본질에선 마찬가지 말이다. 4차 산업시대에 기계와 연결된 전능한 존재, 빅테이터의 도움으로 전지한 초인,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포스트 휴먼이고 부정적으로 말할 때 트랜스휴먼이겠다. 전자는 인간중심주의를 초극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후자는 인간능력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용어상 그런 평가를 받고 있다.

여하튼 이 둘은 유전자 조작의 발전적 결과로서 ‘초인의 탄생’을 긍정한다.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이를 총칭하여 ‘호모 데우스’ 곧 신이 된 인간이라 했다.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일 것이다. 저자는 4차 산업의 꽃으로 이런 인간상을 제시한다. 인간욕망이 끝없기에 오래살고 강하고 아름답기를 원하기에 4차 산업은 유전자 조작을 넘어 기계인간이란 별종을 만들어 낼 것이다.

포스트/트랜스휴먼으로서의 기계인간, 이에 상응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데이터 종교이다. 4차 산업시대에 이르면 기존 종교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빅 데이터를 신격화하는 신흥종교, 아니 빅 테이터 자체가 신이 되는 현실이 도래할 것이라 예언한다. 이렇듯 神(거룩함)이 실종되고 그를 인간이 대신하는 세상에서 자연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과장이자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고 당장 먹거리 생산도구로 4차 산업을 생각하자는 의견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겠다. 그런 사회를 막을 수도, 더디게 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중국 그리고 독일을 중심으로 이런 산업이 가속화 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예견된 부작용, 아니 부작용 이상의 엄청난 결과에 대한 생태학적 저항과 대응이 없어서는 아니 될일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자연)의 성스러움이 폐해져도 좋을까?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 및 자연소외가 더 깊고 커져도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을 능가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탄생된 신인류, 빅 데이터로 생산되고 지배받는 포스트/트랜스 휴먼으로서의 기계인간, 그의 탄생이 지금 눈앞에 있다.

9.

여기서 기술 및 도구에 대한 질문을 다시 요구받는다. 그리고 포스트/트랜스 휴먼이 탄생하는 사회상을 심각하게 상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들 현실에서 자연이 무엇 인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본래 하이데거에게 기술은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들어나게 하는 힘을 일컫는다. 그런 기술이 존재를 은폐하고 죽이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기술로 인해 자연(존재)과 관계하는 근원적 방식을 잃게 된 것이야 말로 위기의 본질일 것이다. 기계인간을 만드는 기술이라면 하이데거는 의당 거부할 것이다. 성스러움을 느껴야 할 시적(詩的) 인간이 자연은 물론 인간마저 능가하는 초인되는 것을 용납지 않을 것이다. 공감력과 예술성마저 데이터에 의존시키는 기술은 인류미래에 있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일 것이겠기에.

마르크스는 직립했기에 자유롭게 된 두 손으로 도구를 제작한 인간, 기술적 인간을 긍정했다. 그러나 기술의 긍정은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방편적 차원에서였다. 기술(도구)를 통해서 자연 역시도 공진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탓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임으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제공하는 조건에 따라 자연을 변형시킨다는 철칙이다.

하라리가 예견하는 4차원의 시대에선 하이데거는 물론 마르크스조차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하물며 기존 신학과의 불화와 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마저 부정할 각오로 4차원 세계와 마주하겠다면 이 현실을 환영할 수도 있겠다. 물론 기독교 자체도 많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더욱 생태적일 필요도 있겠고 교리자체도 재구성될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가 감당할 역할에 대한 질문은 결코 실종될 수 없을 것이다.

10.

이제 자연스럽게 트랜스/포스트/휴머니즘이 등장하는 시대상 내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하라리는 4차 산업시대가 도래하면 지금보다 더 크고 깊은 차별의 세상이 올 것을 예상했다. 돈의 힘으로 법을 사는 탓에 무전유죄의 현실을 경험했듯이 돈으로 정보를 사고 사람과 기계를 융합시킨 기술로 인해 ‘기계인간’과 ‘자연인간’으로 대별될 것이란 말이다. 유전자 조작을 넘어 자연 밖의 기술을 생체에 접목시켜 무한 능력을 발현시키는 ‘호모 데우스’ 시대의 실상이 바로 이것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이때가 되면 지금껏 인간이 동물을 함부로 대하듯, 유색인을 백인들이 종처럼 부렸듯 기계인간이 자연인간을 차별하고 구별하는 현실이 생겨날 수 있다. 지금껏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했으나 이제는 뭇 인간(자연인)마저 종으로 삼는 인간, 곧 ‘호모 데우스’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다. 자연인을 열등하게 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토야말로 반창조적이고 반생태적 실상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일을 창조행위라 극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신학은 물론 철학 그리고 정치경제학 차원에서도 우려할 일이다. 있음(존재)의 신비 그 자체를 꿰뚫는 시인을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여긴 하이데거는 물론 자연해방과 인간해방을 함께 생각했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생태학으로도 용납하기 어렵다. 하물며 인간을 하느님 형상이라 했던 성서적 세계상과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4차 산업 시대의 도래를 당면할 미래의 역사에서 가장 큰 위험이자 도전으로 여겼다. 빅 데이터의 종교, 산업종교의 시대가 된다 한들 이렇듯 생태적 차별이 존재하는 한 기독교의 역할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4차 산업 시대에 자연이란 무엇일까? 존재의 근거는 물론이고 종교를 발생시킨 토양의 의미 역시 생각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보는 아이콘이란 뜻조차 갖기 어려울 것이다. 들의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는 모조리 자원이자, 변형될 재료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이 지닌 장점 역시 돈으로 환산되어 이용할 자원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인간 유전자도 결코 예외가 아닐 것이다. 기계에 의해 인간이 조작당하는 현실에 처할 수도 있다. 돈의 능력이 기계의 능력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차별이 존재했으나 4차 산업 시대의 그것은 상상키 어렵다. 자연을 우주의 성전(聖殿)이라 여긴 하이데거는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를 말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마르크스 역시도 이런 자연관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미래의 먹거리를 얻을 목적으로 4차 산업을 생각하는 한, 신학자체의 생존도 위태롭다. 자연을 인공적으로 변형시키고 자연을 노예화하는 자본주의만이 더욱 기승을 부릴 뿐이다. 더 빠르고 힘세고 머리 좋고 아름다운 인간이 유전자 변형으로 가능한들, 그 많은 정보로 무장한 기계인간의 탄생한들, 세상이 차별과 욕망의 공간이 된다면 백해무익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지구(자연)를 소외시키지 않기 위한 하이데거의 시적 사유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마르크스적 시각을 신학은-그것을 생태신학 혹은 해방신학 나아가 토착화(문화)신학이라 하든지-적극 수용하고 활용해야 옳다.

종교개혁 500년이 막 지났다. 종교개혁 신학의 한계를 여러 시각에서 지적, 비판할 수 있겠으나 본주제와 관련해선 그것이 기계론적 세계관과 짝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옳다. 신적 초월성, 인간 신앙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해 종교개혁 이후 신학은 자연의 수동성을 공통분모로 삼은 기계론적 근대과학주의와 손을 잡았다. 그 결과가 서구 근대문명을 낳았고 오늘의 생태위기의 뿌리란 것이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4차 산업도 이런 종교 개혁적 (신학)유산의 한 표현이자 더욱 야심찬 기획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교개혁 500년 ‘以後’ 신학을 필요로 한다. 루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 아니라 자연을 중시한 아시아적 유산이 하이데거, 마르크스와 만나 신학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일컬어 나는 토착화 신학을 달리 표현하여 한국(아시아)적 생명신학이라 했다. 4차 산업 시대의 도래를 생명신학의 눈을 부릅떠 지켜보며 그 위기를 넘어설 일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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