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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신10:12-22; 딤전1:1-11; 마5:17-20)

기사승인 2019.01.22  18: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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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셋째 주일(1월20일)

1. 복음과 율법

율법과 복음, 혹은 문화와 은총(문화와 그리스도), 성화와 칭의, 예수(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는 영원한 기독교 신학의 딜레마(dilemma)입니다.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19세기 문화개신교가 20세기 신정통주의로 딜레마는 극복되었으나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神學)은 ‘신(神)’에 관점을 두는 ‘신’학과 ‘학(學)’에 포인트를 두는 신‘학’으로 양자택일의 해결책은 온전한 ‘신학’과 신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19세기 문화개신교는 ‘인간의 감정(쉴라이에르마허)’을 강조하는 신학, ‘인간의 가치와 도덕, 윤리’를 강조하고(리츨), ‘역사와 문화(하르낙)’를 중시하며, ‘종교철학(트뢸취)’이나, ‘인간의 현실성(헤르만)’에 기초한 신학을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간의 비약은 있겠지만) 세계 양차 대전과 그에 대한 무책임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성을 비판하며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신학, 곧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신정통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인간의 감정과 문화, 가치와 윤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은총은 인간의 죄를 덮어주는 싸구려 은혜로 변질되었습니다. 따라서 본회퍼 목사님이 ‘값싼 은총’이라고 비판했지만, 한국교회는 은혜와 은총의 축복이 타락하고 범죄한 죄인들에게 종교적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남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이라는 신학의 딜레마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가 하나가 되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바울 사도(혹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도식에 따라 율법을 폐하고 복음을 통한 은혜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율법폐지자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각각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마 5:17)’이라고 말씀하시며, 서신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딤전 1:8)’이라 말합니다. 율법의 말씀인 구약 신명기서는 말할 것도 없이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신10:13)’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각각 ‘율법의 의미(복음서)’, ‘율법을 주신 이유(서신서)’, ‘율법의 실천 사항(구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 율법의 의미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 말씀, 마태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해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로 표현합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은 모순되지 않고, 예수님은 구약 성서 예언의 실현이며 예수님의 전 생애는 구약 전 시대의 율법이자 역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전하게 하신다는 의미는 주현절에 읽는 마태복음의 핵심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구별이 아니라, 연속적인 의미는 다른 신약 성서에도 나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약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제사의 온전한 실현입니다(히 9:10). 또한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양이 되셨고(고전 5:7),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같은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고 합니다(요 3:14).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구약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이 설교가 시작됩니다. 천국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우리가 어떤 믿음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팔복 이야기’, ‘소금과 빛 된 삶’, ‘간음하지 말며 노하지 말며 맹세하지 말며 약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등.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의’를 능가하는, ‘보다 나은 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율법에 관해 부정적이었던 우리들의 생각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바울 사도의 생각도 예수님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공동번역, 롬 3:31).” 이뿐 아닙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공동번역, 롬 13:8).”라고 말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의미입니다.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복음의 은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아니하시고 다 완성하셨습니다. 곧 십자가의 희생,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지하철이나, 역 앞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놀라운 전도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이 있을까요?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의 마음과 타인을 배려하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사랑의 실천이 계명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는 말씀은 교회가 의를 구현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골1:18)’가 되셔서 말씀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3. 율법을 주신 이유

그렇다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을 이어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울의 인사말은 언제 들어도 은혜롭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1-2)

로마에서 2년간의 감금(가택연금) 생활에서 석방된 바울이 복음 전도를 위해 유럽에 있는 마게도냐로 갈 때에 2차 선교여행 동안 자신과 함께 봉사했던 디모데를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물게 합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딤전 1:3a)!” 오늘 본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지금은 터키 지방인 소아시아의 루스드라를 방문합니다. 그때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디모데와 외할머니 로이스>

사실 디모데는 이방 지역에서 헬라인(이방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인 유니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름의 뜻을 가진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랐고, 좋은 성품으로 인해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교단이 지정한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여신도회원들이 믿음으로 바로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디모데를 키우는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런 디모데를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영적 아들)’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 해안 지역인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에베소는 종교적으로 특별한 지역입니다. 인근 밀레토스가 그리스 철학의 발상지였다면 에베소는 ‘종교적 용광로’였습니다. 옛 트로이 고성의 폐허에서 북에서 남으로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에베소에, 또 그보다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밀레토스가 나옵니다. 에베소, 밀레토스 등은 우리가 잘 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이 그리스의 폴리스들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와 밀레토스 등 소아시아의 폴리스들은 그리스인들이 도리아안들(기원전 16세기에서 기원전 12세기 무렵 그리스 반도로 남하하여 미케네 문명을 파괴하고 스파르타, 고린도 등의 폴리스를 건설한 민족입니다.)의 침략을 피해 소아시아 정착하여 세운 도시들입니다.

사실 소아시아 연안은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오리엔트) 문명권에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유구한 문명에 비하자면 그리스 본토를 떠나 소아시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의 문명은 매우 초라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리스인들은 동방의 찬란한 문명 위에 자신들의 문명을 결합하여 새로운 문명을 창조합니다. 이것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신화의 세계에 머물렀던 종교’와,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한 ‘신화의 세계에서 탈출한 서양 철학’의 시작이었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종교적으로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종교 융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가령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Artemis, 로마에서는 Diana, 영어로는 다이아나, 개역개정은 ‘아데미’로 번역) 신전은 아직도 에베소에 폐허로 남아 당시 활발했던 종교 혼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스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르테미스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라고 격찬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신전에서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이 기묘하고 황홀하고 광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진 왼쪽이 <아르테미스 신전>, 오른쪽이 <폐허가 된 에베소 지역>

아르테미스 여신은 처녀성과 달(月)의 상징이며 활을 든 사냥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달빛이 지상 생물들에게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늑대가 달밤에 달을 쳐다보고 길게 우는 것도, 또한 늑대인간이 늑대로 변신하는 것도 보름달이 뜰 때라고 생각할 만큼 달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와는 달랐습니다(우리는 ‘해님 달님 이야기’처럼 부끄러움을 상징합니다). 달의 여신은 활을 들고 다니는데, 보름달과 활과 임신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점차 불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르테미스 신은 다산의 신도 됩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진동합니다. 나팔이 울리면서 분향을 시작하는데, 군중들은 흥분과 발광으로 날뜁니다. 더욱이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에베소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래 그리스(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은 처녀신입니다. 처녀성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는 죄목으로 전설적인 사냥의 명수인 카드모스의 아들 악타이온을 죽여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처녀성을 중시하던 아르테미스가 오리엔트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과 혼합되면서 에베소를 비롯한 그리스 본토 이외의 지역에서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출토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한번 볼까요? 그리스에서는 너무도 인간적이며 순결한 모습으로 그려졌던 아르테미스의 모습이 다산을 상징하는 무수히 많은 젖가슴을 가진 여신으로 변신합니다. 종교적 혼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인이 새롭게 정착한 소아시아 연안은 문명의 꽃으로 만개한 오리엔트 문명과 신생 그리스 문명을 한데 녹여 새로운 창작물을 구현해내는 동서양 문명의 작은 용광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알렉산더를 통해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를 결합한 헬레니즘의 효시가 됩니다.

사진 왼쪽이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오른쪽이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여신>

바울은 에베소 지역이 종교의 용광로이자 문명의 혼합장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혼합은 성적 타락과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잘못된 가치관의 혼합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에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돈벌이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또한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을 신이 아니라 하여 분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행 19:24-29)

물론 서기장이 데모드리오와 무리를 진정시켜 돌려보내긴 합니다만, 아무튼 바울은 이러한 에베소에 목회를 맡기며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딤전 1:3b-8)

내용이 조금 어렵죠? 공동번역을 볼까요?

“거기에는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그런 일을 못하게 하시오. 그런 것들은 쓸데없는 논쟁이나 일으킬 뿐이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금하는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목적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쓸데없는 토론만 일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로 자처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주장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은 정당하게 다루어지기만 한다면 좋은 것입니다.”(딤전 1:3b-8)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꾸며낸 이야기’인 그리스 신화와 ‘족보이야기’인 『신통기』 (神統記, Θεογονία ‘신들의 계보’라고 하며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의 작품입니다. 총 1,022행의 서사시 형태로 되어있으며 우주의 기원과 탄생, 제우스, 아폴론 같은 인격신뿐만 아니라, 대지, 밤, 졸음 등 모든 자연형상까지도 신의 범주에 포함하기 때문에 사실상 신들의 탄생과 우주의 탄생을 노래한 대서사시입니다.)를 통해 필요 없는 논쟁과 쓸모없는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당시는 이러한 토론이 철학적이고 사상적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는 무의미한 토론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신화의 사상적 의미는 상실되었고 퇴폐와 향락적인 면만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을 주신 이유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딤전 1:9-10)

역시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율법이 올바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 불경건한 자와 하느님을 떠난 죄인, 신성을 모독하는 자와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하는 자, 아비나 어미를 죽인 자와 사람을 죽인 자,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을 하는 자, 위증하는 자와 그 밖에 건전한 교설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딤전 1:9-10)

율법을 주신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죠? 거짓종교(아르테미스 종교로 풍요와 다산의 종교로 오늘 맘몬이즘과 같습니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이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4. 율법의 실천 사항

따라서 신명기 말씀은 율법의 실천사항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세 가지 실천사항을 찾아볼 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둘째,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16-17a).”

‘마음의 할례’란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눈에 부정하며 또한 마음을 둔감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할례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렘 6:10).” 사도행전도 성령을 거스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로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행 7:51).”

셋째, 약자(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며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17b-19).” 너희도 전에 나그네였으니, 지금 나그네 된 이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5. 율법의 복

이렇게 율법의 의미를 깨닫고 율법을 주신 이유를 알며, 율법의 실천사항을 준수하면 어떻게 될까요?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복은 첫째, 사랑을 통해 완성된 율법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9-20)

둘째, 후손, 곧 자녀의 축복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0-22)

지극히 작은 소수의 민족을 하늘의 별과 같게 한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셋째, 율법의 복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여기서 이 교훈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의미가 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을 볼까요? “건전한 교설이란 복되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복음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건전한 교설’, 곧 율법은 복음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이며,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 문화와 은총(문화와 그리스도), 성화와 칭의, 예수(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는 딜레마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으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통해 깨어있어야 하며 율법의 계명을, 사랑을 통해 완성하여야 합니다. 그때 칭의를 통한 구원이 성화를 통해 예수 살기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단이 지정한 여신도회 주일입니다. 전국의 기장 여신도회원들이 이러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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