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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문을 열지 않은 것은 아닐까

기사승인 2019.01.22  18: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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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봐라 내가 문 앞에 서있다. 내가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은 모두 ‘귀 있는 자는 … 들으라’는 말로 끝나고 그 앞이나 뒤에 약속의 말들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 앞에 있습니다. 약속은 해당 교회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교회는 부유한 척하지만 실제는 가난하고 또 눈이 멀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 상황과 약속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요? ‘문밖에 서서’라는 번역은 이러한 관련성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해의 근원이 됩니다. 주님은 언제부터인지 그 (교회) 문 앞에 서계셨습니다(현재완료형).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거기 계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이 멀었다는 비판을 듣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혹시나 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한채 문 앞을 서성이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보지 못함을 뒤늦게 아셨는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십니다. 눈은 멀어도 귀는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음성을 알고 (그 집의) 문을 열어주면 주님은 열어준 ‘그’(!)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가난한 식탁을 풍성하게 하시며 함께 즐거움의 잔치를 나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좀더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혹시 그가 주님인 줄 모른다 해도 교회는 상관없이 문을 열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작은 자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 교회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교회 문앞에 세워두고 못본 척 지나쳤던 것은 아닐까요? 마태복음 25장 마지막 심판의 비유에서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문밖의 작은 자를 외면하고 안으로 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가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두드리며 소리내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해서라도 주님은 그(들)의 굳은 마음을 녹이고 그(들)을 잔치 자리에 부르시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작은 자라고 그를 문밖에 세워두는 어리석음과 오만을 버리고 그에게서 주님을 뵈는 열린 눈의 '교회'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는 이 말씀을 왜곡해서 듣지 않는 귀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앎과 그에게 감동된 사랑이 눈을 씻어 보게 하고 귀를 열어 듣게 하는 오늘이기를. 작은 자를 향한 따뜻함으로 주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이날이기를.

ⓒGetty Image

김상기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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