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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씨알의 윤리’를 찾아라

기사승인 2019.01.20  17: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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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이 한나라에서 찾아야 하는 평화윤리

함석헌은 지나간 날에 사람의 살림을 주도해 온 것은 대립, 즉 맞섬이라는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집과 집, 나라와 나라, 계급과 계급, 개인과 개인이 맞서서 서로 많이 가지고, 힘 있고, 잘 나려 하는 데 모든 활동의 고통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법으로 보호하고, 경찰 군대로 지키고, 교육으로 그것을 불어넣고, 예술로 노래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세계가 온통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이제 맞서 다투는 것은 제가 저 자신을 해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윤리가 서야 한다고 함석헌은 말한다. 그리고 이 때 이 새 윤리는 세계의 윤리여야 한다. 그런데 그 윤리를 향하는 주인은 지금까지 억압받고 억눌려 왔던 민(民), 즉 씨알이어야 한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제 단순한 인간, 사람, 민(民)의 세기가 온다. 근대 이래의 인류가 당한 모든 어려움은 민 하나를 낳자는 운동이었다. 민은 제가 제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제가 제 주인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인이 있을 리 없건만-만일 있다면 그를 지어낸 하나님밖에 있을 리가 없건만-이때까지 사람들은 주인이란 것을 섬겨왔다.

▲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통영지역에서 기생 신분으로 거리와 나와 독립을 외치던 사진.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람의 생김생김을 볼 때 머리를 하늘로 두고 꼿꼿이 서는 형상인데, 왜 그 머리를 가지고 땅에 절을 했고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였는가? 이제 와서야 사람은 겨우 자기 위에 주인이란 것이 없고, 자기야말로 자기의 주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짓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앞날의 윤리는 민의 윤리, 자유의 윤리일 것이다. 함석헌은 그것을 평화의 윤리라고 이름한다. 이제 새 시대 지구촌의 문화는 다시 생존경쟁의 철학 위에 서지 않아야 할 것이다.(참조 함석헌, <새 윤리>, 『함석헌 전집 2. 인간혁명의 철학』, 358.)

함석헌은 장차 올 새 시대에 우리 민족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고 권고한다. 우리나라 땅을 보고 우리 바탕을 보아 우리에게 무엇이 허락되어 있는지를 보자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땅을 볼 때, 이 나라는 큰 나라는 될 수 없고, 외따로 살 수 없이 된 나라다. 세계의 행길, 아주 요긴한 길목이기 때문에 남과 늘 관계하며 살게 되어있지, 모든 것을 혼자서 하는 나라는 될 수 없다.

그 다음 이 나라는 큰 산업이 발달하게는 못 된 곳이다. 이 나라의 자연은 그 변화가 많은 데 특색이 있다. 지질도 가지가지의 바위로 되어 있고 산과 골짜기도 많다. 어디를 보아도 묘한 봉우리를 볼 수 있고 어디 가 들어도 시냇물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하늘은 언제나 맑고 바람은 언제나 대체로 잔잔하고 어디 가서 물을 마셔도 다 달고 시원하고 한마디로 이 나라는 아름다움의 나라다. 시의 나라요, 그림의 나라요, 음악의 나라가 될 것이지 정치의 나라, 군사의 나라가 될 곳이 아니다.

여기는 슬기가 있을 나라이지 힘을 주장할 나라는 아니다. 여기는 생각할 곳이지 바삐 떠들 곳이 아니다. 예로부터 현실계를 떠나 영원 무한에 접해 보려는 신선 사상이 있고 중국 사람은 삼신산(三神山)이 여기 있고 죽지 않는 약이 여기 있다고 찾았다. 거의 바위마다 골짜기마다 신선의 자취가 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난 문화의 꼭지다.(함석헌, <우리 민족의 이상>, 『함석헌 전집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364/5.)

이런 자연환경 속에서 자란 민족의 성격은 어떤가?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성격의 고갱이는 착함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평화의 사람이다. 본래 현실주의와 폭력주의가 한가지로 짝해 다니듯이 신비주의와 평화주의도 짝해 다닌다. 신비사상의 노자는 평화주의이다. 인도에서 평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거기가 또한 신비주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이 바보 온달의 얘기요, 처용의 이야기이다. 그 둘과 같이 옛날 대표적인 한 사람 성격을 표시하는 또 하나는 검도령이다. 온달이 고구려, 처용이 신라, 검도령은 백제이다.

▲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을 담은 사진 ⓒGetty Image

함석헌은 이 땅의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역사 있은 이래 한번도 남의 나라를 쳐들어간 일이 없고 전쟁도 늘 내 집에서 겪는 막는 싸움이었지 날도둑질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그 압박을 받았어도 지금 일본 배척하는 감정이 없고 6.25에 중공군에게 그 사나운 침략을 당하였어도 반드시 원수 갚자는 마음을 누구도 먹지 않는다. 참 착한 백성이 아닌가? 이것 때문에 생존경쟁이 살림의 철학으로 되어 있고 침략주의가 정의로 되어 있는 시대에는 한민족은 못 견디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시대가 온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를 가고 어느 책, 어느 신문을 보아도 주 되는 제목은 평화다. 함석헌은 이제 이 말로 우리가 한몫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나라를 세계역사의 콩쥐라고 말한다. 콩쥐야말로 우리의 상징이다. 이제 잘난 사람들이 다 하다가 실패하고 멋없이 물러선 신짝이 우리에게 오는 차례가 되었다. 그 신짝은 다른 것이 아닌 평화의 신이다. 신고 보니 꼭 맞는 제 주인의 제 신이다. 우리의 평화적인 성격이 그렇지 않은가. 3.1운동, 4.19의 비폭력 운동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과연 지금 인류는 그 전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되게 긴장된 마음으로 세계 평화를 의논하고 있다. 이제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은 ‘하나의 세계’를 향해 나가고 있다. 함석헌은 이제 우리가 본래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민족이었다는 것, 고난의 터전을 맡았다는 것, 큰 국가를 못 이룬 것, 남의 식민지가 되어 본 것, 진 나라 백성이면서 이긴 나라 백성이 된 것, 세계를 둘로 가르는 금이 우리 등에 그어졌다는 것을 다시금 다시금 깊이 생각하여 보아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세계역사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거기서 종교적 체험이 일어날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298/9.)

함석헌은 한반도[한나라]가 지구촌 시대에 평화의 윤리를 위해 평화의 사람인 한민족이 자기를 희생하여 평화의 제물로 바치는 평화의 제단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처음으로 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 그뿐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난 것들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택하여 이 나라 강산을 두루 밟으며 3년을 어우러져 싸워, 붉은 피를 붓고 한데 엎어져 묻히었다. 그렇게 되어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 이 ‘한나라’는 ‘하나의 세계’의 제단이 되었다.”

함석헌은 우리가 세계의 짐을 진다고 말한다. 눈을 들어 벽 위의 세계지도를 보라고 외친다. 지도를 보면 마치 동서 양 바다의 문명이 그 찌꺼기를 한반도로 미는 듯하다. 인도의 불교, 중국의 유교가 아름다운 점이 많되 압록강을 건너서는 그 가장 나쁜 폐해만을 남겼고, 구주의 사상, 미주의 문명이 혜택을 주는 점은 많되 부산항에 올라올 때는 그 제일 무서운 독만을 끼쳤다.

▲ 2016년 겨울 한국사회의 촛불혁명은 평화혁명의 대명사가 되었다. ⓒGetty Image

동양 문명의 폐는 퇴영적·보수적·형식적인 데 있는데, 그 쓴 물은 우리 혼자 받은 듯하고, 서양 문명의 해는 물욕적·약탈적·외면적인 데 있는데, 그 독한 이빨은 우리만이 만난 듯하다. 먹고 남는 더러운 찌꺼기를 쓰레기통같이, 남들이 향락하고 이용하고 그 결과로 남는 온갖 해독을 우리 약한 등에 다 졌다. 삼천리 강산은 불행의 박물관이요, 삼천만의 생명은 죄악의 실험관이다. 세계의 온갖 불행과 죄악의 결과를 보려는 자는 여기에 오면 볼 수 있다. 유교의 폐가 여기 있고 불교의 해가 여기 있으며, 군국주의의 표본이 여기 있고 자본주의의 노예가 여기 있다.

함석헌은 우리가 위대해서 평화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사의 하수구이기에 그 짐을 지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 사람들이여, 이 하수구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구 아닌가? … 그대들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 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구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함석헌, 『함석헌 전집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327)

우리는 우리가 낡은 역사의 가장 뒤떨어진 자임을 안다. 우리는 세계의 하수도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새 역사의 상수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새 시대란 곧 가치의 뒤집힘 속에 만들어지는 시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높아지며, 속이 겉이 되고 겉이 속이 될 것이다. 그럼 우리가 앞장 될 밖에 없지 않은가?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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