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신학의 충돌, 그리고 승리 소식의 전달자들

기사승인 2019.01.18  18:38:37

공유
default_news_ad1

- 세 가지 미완성의 장면들 속에서의 복음전파 (4)

복음전파의 둘째 장에는 이런 투쟁들과 결말들에 대한 대담하고 예술적인 표현을 자신들의 임무로서 생각하는 전도자들, 전달자들(messengers), 고지자들(announcers)의 목소리가 있다. 고지자들의 임무는 사건 현장에 있지 않았던 자들을 위해 논쟁과 결말을 접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고지자들은 자신들의 수사학적 용기에 의해 그곳에서의 결말이 여기에서 어떻게 중요하며 그 당시의 평결이 지금 어떻게 중요한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들이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소식의 전달 1: 구약성서

그 소식이 전달자에 의해 전달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특징적으로 “직접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재 시제의 사건(happening)으로서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중계된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우리를 위해 재구성하는 고지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신들 가운데 있는 예배문 속에서 고지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문의 소리이지만, 본문은 하늘의 전달자들 즉 천사들에게 통고하는 것 같다. 그것들은 분명히 인간의 공적 삶의 멀리 떨어진 세속의 경기장에 온 우주적 충돌의 현장에서 나온 목소리들이다. 따라서 본문은 알린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야훼가 왕이시다!”(시 96:10)

새로운 정권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은 이 고지는 성공적인 정치 쿠데타의 고지와도 같다. 그것은 야훼가 모든 신들 가운데서 경외되어야 하고 존경받아야 하며 복종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결과로서 신들 가운데서 이미 밝혀진 것에 대한 보도문이다. 바로 그 사건은 일어났으며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단지 연사가 말할 때에만, 모든 나라들은 결과를 알게된다. 그들은 또 다른 때와 장소로부터 “복음 같은 소식”(evangel)을 받았다. 전달자는 세상에 이제 새로운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고지한다. 그 고지는 권력의 찬탈로서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던 헤이그(Haig) 장관의 땀을 빼게 하는 고지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곳의 책임을 맡았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또 다른 영역에서 권력을 빼앗아 가신다는 고지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야훼와 제국의 신들 사이의 전투는 노예들에게 자유롭게 갈 것을 허용했다. 그런 결과의 메시지는 탬버린을 들고 새로운 현실에 춤추는 미리암과 다른 여인들에 의해 전해진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21b).

그 춤을 보고 듣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제 미리암이 노래하는 변화된 공적 현실에 접근하는 길이 주어진다. 고지된 좋은 소식은 군사권력의 상징들인 말과 말 탄자가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곧 제국의 권력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삶은 새로운 권력의 양식과 사회관계 속에서 개조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한 바로의 패배에 대한 직접적인 증인들이 아니었던 자들에게 그 결과를 고지하는 사람은 노래하는 여인들이다.

포로기 이사야의 위기의 구조(construal) 속에서 우리는 야훼께서 바벨론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 패배시켰는지 결코 전혀 듣지 못한다. 그 패배는 시인의 소송 각본 속에서 일어났다.(예를 들어 사 41:21-29) 그것은 또한 고레스와 페르시아인들의 공식적인 도착으로 일어났다(비교 41:25, 43:14, 44:28, 45:1). 그렇지만 패배는 일어났으며, 전달자 즉 정체불명의 한 사람이 평결과 메시지를 가지고 온다. 바로 그 전달자는 멀리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소식을 가지고 달려왔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표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그는 달려와 헐떡거리며 가까스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52:7). 그의 메시지는 시편 96:10에서 온 인용이다. 전달자는 투쟁의 결과를 고지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효과적으로 만들며, 그것은 이곳에서 사회적 현실을 변형시킨다.

그렇지만 오직 그 결과가 효과적으로 발언되어 들려지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승리는 이곳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능력을 간직한다. 연설의 바로 그 순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권력이 붕괴되기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지만 전달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예루살렘은 새로운 현실에 대해 알지 못하여 행동할 수 없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소식의 전달 2: 신약성서의 복음서

하나님의 승리는 자동적으로 복음서의 드라마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충분히 유의하라. 이야기와 개작된 이야기는, 승리 자체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행위이다. 그것은 승리를 효과 있게 하고, 승리의 역을 무대에서 공연하며, 승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독특한 행위로서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패배에 관해 듣기 이전까지 바벨론이 패배했다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 성서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승리의 소식의 십자가를 통한 죽음에 대한 승리일 것이다. ⓒGetty Image

누가복음 2장의 성탄절 설화에서, 우리에게는 천사들의 고지 배후에 있는 야훼의 승리에 대한 아무런 접근수단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탄생과 그것의 우주적 함축에 관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에 대해 단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 설화의 순수함은 불길한 방법으로 꾸려진다. 한편에서 출생과정 전체는 “헤롯의 시대에” 일어났다.

다른 한편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 즉 “하나님의 전능한 전사”이다. 그러므로 설화 속에 있는 주제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주제는 헤롯의 권력과 가브리엘의 대응 권력 사이, 죽음의 신들과 새로운 생명을 위한 야훼의 능력 사이에서 연결된다.

그 메시지는 전달자 천사에 의해 고지된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0-12).

그 다음에 하늘 찬양대(군대)에 속한 가브리엘의 모든 동료들은 고지 속에서 나타난 승리와 결과를 노래하는데 합류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좋은 소식은 빠르게 움직인다. 변화시킬 힘이 있는 사건은, 설화를 넘어서서,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어떻게 왕이신 예수가 세력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듣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그 결과는 전달자들과 고지자들에 의해 목자들이 안전히 자신들의 연루와 동의 혹은 협력이 없으면서도 자신들의 현실이 결정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들판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얻어지게 된 결정적인 변화의 소식, 즉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소식을 단지 받을 뿐이다.

바디매오의 설화 속에서, 예수의 변화시킬 힘이 있는 간섭들(interventions) 중 많은 경우에서와 같이, 사건에서 메시지로의 처리는 훨씬 더욱 즉각적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이 설화 속에서도, 우리는 드라마에 관한 동일한 구조를 볼 수 있다. 바디매오는 보는 것을 요구했다. 예수 자신의 입은 좋은 소식이라는 메시지의 운반도구이다. 예수께서 말하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나는 내가 제안하려는 모형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이런 단어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물을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디매오와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보지 못함의 권세와의 전투에 들어가셨다고 예수께서 고지하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예수께서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신다. 그는 고지자, 즉 전도자이시다. 그는 단지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현실을 고지할 뿐이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소식의 전달 3: 신약성서의 편지들

부활절 설화 속에서, 소식은 갑작스러우며 무거운 것이다. “그는 셋째 날에 일으킴을 받았다”(고전 15:4). 이것은 소식에 대한 교회의 가장 오래된 표현이다. 고린도서의 신조 속에서, 우리는 증언하고 있는 이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목소리이며, 무덤에서의 여인들의 목소리이고, 베드로의 목소리이며, 예수께서 사랑했던 제자의 목소리이고,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있던 두 사람의 목소리이며, 이상의 모든 이의 목소리이다.

바울은 그 소식을 전하는 증인들의 이름을 부르며(5-7절), 마지막으로 자신을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로 부른다(9절). 이 증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았다(20절). 그 증인들은 승리의 때에 있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기사에 의존한다. 그들의 연설 속에서, 세상은 결정적으로 변화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가장 최근의 증인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57절)고 결론을 짓는다.

바울의 신학은 죽음의 권세를 이긴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숙고이다. 바로 그 승리는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 바울은 틀림없이 예수 안에서 발생했던 현실을 말하기 위해 많은 은유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것이다(롬 1:1, 5; 갈 1:1).(1)

그는 보냄 받은 자이며, 그는 이방인에게 보냄 받은 자이다. 그는 이미 수립된 신학적 평결, 이미 다른 곳에서 공연된 변형을 선포하고 고지하며 중재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이다. 바울의 메시지는 바울 자신의 시야를 넘어서는 변형시킬 만한 힘이 있는 사건들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서정적 자유분방함들(flights) 중 한곳에서 (다음의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그것은 교회가 바울에게서 받은 전부이다. 교회는 바울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가 증언하는 변형은 복음서 속의 다른 곳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은 고린도와 로마와 갈라디아의 지금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주

(미주 1) Johann Christiaan Beker, Paul the Apostle: The Triumph of God in Life and Though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를 보라.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