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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기사승인 2019.01.15  18: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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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과 깨달음의 중요성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제1절)

이 첫 절부터 『도마복음』의 특성이 드러난다. 『요한복음』(11:25-26)에 보면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데 반하여 『도마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풀이하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 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풀이를 하느냐 하는 ‘해석학(hermenutics)의 문제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관계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예로 들어본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내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100 집도 넘는 집이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밤 열두시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 엄마가 내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구나. 이제 엄마 아빠에게서 선물 받을 것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 하는 단계로 심화된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과 평화스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이웃끼리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 받음으로 사랑과 우의를 나누고 공동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되고, 그러다가 이웃이나 동네 뿐 아니라 온 나라,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공평하지 못한 사회에서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 환경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정치적, 생태학적 의미까지 깨닫게 된다. 좀 더 장성하면, 혹은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어쩌면 신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비밀’을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깊은 신비적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

사실 산타 이야기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적 이야기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다고 한다. 문자적(hylic) 의미가 있고, 나아가 심적(psychic), 영적(pneumatic), 신비적(mystic)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도마복음 원본 ⓒGetty Image

유대교 카발라 전통에서는 성경 본문에는 표면적(Peshat), 비유적(Remez), 미드라쉬적(Derash), 신비적/비의적(sod) 의미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종교적 진술을 대할 때 우리는 올바른 풀이를 통해 점점 더 깊은 뜻을 깨달아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고 문자적이고 표피적 뜻에만 매달리면 우리의 영적 삶은 결국 죽어버리고 만다. 바울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3:6)고 했다.

이처럼 올바른 풀이를 통해 여기 주어진 메시지의 가장 깊은 차원의 영적·신비적 뜻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우리 속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게 되므로 새 생명을 찾을 수 있다.  육체가 죽어도, 옛 사람이 죽어도 그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 도가(道家) 사상가 장자(莊子)에 의하면, 들음에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귀’로 듣는 단계, ‘마음’으로 드는 단계, ‘기(氣)’로 듣는 단계, ‘비움[虛]’을 통해 도(道)가 들어와 도와 하나 되는 단계를 말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영지주의나 카발라에서 말하는 문자적 차원, 심적 차원, 영적 차원, 신비적 차원과 대략 상응하는 것 같아 신기하게 여겨진다. 이렇게 세 단계를 지나 완전이 마음을 비우고 우리 속에 도(道)가 들어오도록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장자는 ‘심재(心齋, 마음 굶김)’라고 했다.(1)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말은 『도마복음』에 네 번 나온다. (18, 19, 85, 111). ‘생명’을 의미하는 말로 그리스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bios, 다른 하나는 zoe이다. bios는 생물학 biology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육체적 삶이고 zoe는 의미 있는 삶이다.

영원한 삶이라고 할 때는 zoe를 쓴다. 육체적으로는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생사가 문제되지 않는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오는 곳의 가르침은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첫 절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영적 사활과 관계된 것이라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이 말을 한 ‘그’가 예수인가 도마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미주

(미주 1) 오강남 풀이, 『장자』(서울: 현암사, 1999), 183-188 참조.

오강남 명예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soft103@hot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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