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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4)

기사승인 2018.11.17  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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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 에큐메니즘의 전개와 李信 신학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는 믿음의 ‘상상’(聖, Imagination)에 대하여

종말론적 인격의 믿음의 저항을 통해서 보편의 일반화를 깨고,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보편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영역을 확산해 가려는 시도 앞에서 베르댜예프의 다음과 같은 언술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 이신의 믿음과 신학이 단순히 좁은 의미의 기독교 내지는 교회 안에서의 물음이 아니라 인간 문명 전체를 문제 삼고, 전 우주적 영역으로 그 물음이 확산되어 나가는 것임을 알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의 불멸을 그리스도와 관련시키는 경우 나는 결코 이 불멸성이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 그리스도는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미주 1)

보편이 독점당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이신은 특히 그의 예술적 ‘상상’(imagination)과 더불어 이루어나갔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그림그리기, 특히 현대 전위예술에의 참가는 그의 “슐리얼리즘(슐리얼리스트)의 신학”, “영靈의 신학”, 또는 “카리스마적 신학”을 이루는데 핵심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신학은 이제 “해석학적 문제”(hermeneutic problem)이고, 그것도 “영(pneuma) 중심적인 면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점점 더 강조하였다. 그가 귀국하여 70년대에 쓴 「예술과 신학」은 “예술가와 원형”에 대해서 말하고, 한국의 화가 이중섭 등도 포함해서 현대 회화가 표현하려고 한 난해한 ‘현실’과 ‘공개된 비밀’을 알아보는 “제3의 눈”을 지적하면서 예수는 “종래 도학자적인 신학자들의 눈에 비쳤던” 것처럼 한 도덕적인 실천가가 아니었다고 주창한다. 예수는 자신의 짧은 생애로 인간의 역사에 그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준 “전 생애가 창조적인 이벤트 메이커”(the creative event-maker)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신은 자신의 “슐리어리스트의 신학”을 다음과 같은 말로 연다.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병은 마르크시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르주아들의 ‘착취’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난’도 아니며,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도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의 부패다.”(미주 2)

이신이 이와 같은 말을 한 이후로 40여년이 흐른 오늘도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제일 심각하고 치명적인 인간 불행의 요인으로 경제적 착취나 빈곤, 또는 자아실현 등의 문제를 든다. 그런데 이신이 이러한 언술을 했던 때는 아직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많이 가난했고, 실존주의가 여전히 사상계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은 매우 낯설거나 또는 ‘미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각종 ‘가상현실’(virtual world)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고, 또한 빈곤과 물질의 문제까지도 바로 우리의 상상에 따라서 그 실제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통찰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고 근본적인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 이신,『李信 詩集 돌의소리』

이신은 “어떤 악한 일도 이매지네이션의 산물 아닌 것이 없고, 어떤 선한 일도 이매지네이션의 산물 아닌 것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그 세계는 “있다면 있는 것이요 없다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허공”과 같이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바로 “사람이 본래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 “하나님을 닮은 곳”이라고 언표한다.(미주 3) 이것은 이미 지적했지만 보통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의 ‘하나님 모상’(imago dei)을 윤리적 능력이나 도덕적 선함(善) 등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한참 다른 것인데, 여기서 인간 존재의 본래적 ‘창조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영적 인간 이해가 잘 드러난다.

이신에 따르면 예수가 ‘나를 따르라’라고 한 것은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우리 자신도 ‘창조적’으로 살라는 것이고, 그것이 ‘제 십자가를 지라’의 의미라고 일갈한다. 여기서 나는 한국 현대사에서 함석헌 선생도 유사하게 고루한 ‘대속’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구원’ 이해에 대해 행했던 비판이 생각나는데, 함 선생은 앞으로의 “미래의 종교”와 “새 시대의 종교”는 “노력의 종교”로서 그것은 이제 “이지(理智)의 종교 시대”로 접어든 인류가 특히 동양 종교에서 배워서 “믿음은 곧 그대로 생활인” 신앙을 체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미주 4) 여기서 함 선생이 ‘이지의 종교’라고 한 것에서의 ‘이지’(理智)가 언뜻 보기에는 ‘이매지네이션’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이지란 단차원적 지식이나 표피적인 논리가 아닌 보다 깊은 사유와 상상과 직관을 모두 포괄하는 더 높은 차원의 인식, ‘영적 통찰’(spiritual vision)을 의미한다고 본다. 함석헌 선생도 “정신화․영화(靈化)”에 대해서 말했고, 그 정신(理)을 ‘상상력’과 ‘믿음’과 매우 유사하게 해석하기도 했다.(미주 5)

그런데 사실 이신도 이미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5장 “미래를 향한 묵시문학적 환상”(apocalyptic vision for future)에서 스콜라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빌어서 어떻게 인간적 상상력과 지성이 묵시문학가들이나 전위파 예술가들이 경험하는 ‘초의식적 환상’(trans-conscious vision) 속에서 ‘신적인 빛의 개입’에 의해서 강화되는지에 대해서 지적하였다.(미주 6) 그가 소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환상 이론에서는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이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신적 환상의 수용을 위한 ‘양식’이 된다고 밝힌다.

거기서 환상 경험은 인간적 상상력과 지성에서 은유적으로 매개된 초월 경험인 바, 인간 상상력과 지성이 신적 구성과 신적 조명에 의해서 ‘초월의 암호’(칼 야스퍼스)와 ‘초월적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것임을 말한다. 이신이 이처럼 중세 아퀴나스의 시각을 다시 가져와서 인간적 상상력과 지성의 힘을 신적 초월의 표상화를 위한 긴요한 양식으로 본 것은 그의 사고가 가지는 또 한 번의 불이적(不二的)이고 역동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가 강조하는 ‘초현실’은 여기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환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둔화”로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현실의 “원형적”(aeon) 또는 “궁극적”(메시아적) 구조를 드러내는 현실이다. 그래서 그 구조 안에 오늘 병든 인간 실존과 공동체를 ‘전복’(“철저한 부정”)시키고 ‘전환’(“철저한 긍정”)시키는 길이 있다고 본 것이다.(미주 7)

이신 신학의 고유한 이름이 된 “슐리얼리즘의 신학”을 위해서 이신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서구에서 『초현실주의 선언, 1924』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선포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을 언급한다.(미주 8) 이『초현실주의 선언』을 지난 2012년에 한국에 번역 소개한 故 황현산 선생은 그 해설 “상상력의 원칙과 말의 힘”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초현실주의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변함없는 원칙은 인간의 자유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의 능력 전체를 지금 이 자리에 불러내기 위해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은 언어를 대상으로 삼는, 언어의 힘을 빌린, 언어의 작업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늘이는 일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학식을 늘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언어의 개혁은 시의 개혁으로, 인간의 개혁으로, 세계의 개혁으로 연결된다. 이 점에서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전위 예술 운동 중에서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 삼은 거의 유일한 운동이다. 초현실주의는 시의 선동력과 언어의 잠재력에 판돈 전체를 걸었다.”(미주 9)

이신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인간의 ‘언어’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지만 이신이 자신의 이름을 ‘신’(信)으로 바꿀 정도로 인간 실존과 우주 실재의 핵을 ‘믿음’(信)으로 파악한 그 ‘믿음’(信)이라는 단어가 바로 ‘인간’(人)과 ‘언어’(言)의 합성어인 것을 우리는 인지한다. 그런데 그 ‘믿음’(信)은 동아시아 전통에 따르면 “내 몸에 있는 것”(有諸己之謂信)(미주 10)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대상인 초현실이란 바로 여기 지금의 구체적인 현실과 실존의 구체성과 개체성 안에 드러난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이신은 자신의 신학을 “슐리얼리즘의 신학”으로 명명하면서 “여기는 초월이 있기는 있으나 그 전 모양으로 먼 데 있는 초월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초월이고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는 세계의 초월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면서도 우리가 의식 못하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그런 것이다”라고 밝힌다.(미주 11) 그에 따르면 슐리얼리즘의 신학은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의식으로는 “괴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좌우간”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고, “의식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마음의 심층을 ... 열어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의 “시인이 따로 있는가,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신은 “슐리얼리즘의 신학도 누구나 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선포한다.(미주 12) 그런 의미에서 그는 슐리얼리즘이란 하나의 ‘주의’가 아니고, 하나의 주의라고 하기에는 “무척 포괄적”이고, 또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나뉘어 있는 것을 결국에 가서 하나로 보기 때문에 편협이 있을 수 없고 분열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주의”라고 한다.(미주 13)

나는 여기에서 이신의 신학이 얼마나 초월을 급진적으로 내재화시키는가를 본다. “슐리얼리즘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영靈의 신학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다시 분명하게 “‘말씀이 육신이 됐다’와 ‘육신이 영이 됐다’를 한꺼번에 다 껴안을 수 있는 그런 주장”이라고도 밝힌다.(미주 14) 여기서 다시 그의 사고의 묘한 통합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데, 이렇게 해서 “슐리얼리스트의 신학”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서구 현대 전위예술의 단순한 답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존재의 왜곡된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한국적 시도이고, 그것을 특히 ‘물질’이 아닌 ‘정신’의 차원에 주목하면서, 즉 ‘정신의 사물화’(Alle Woerter werde Dinge)와 함께 ‘사물의 정신화’(영화靈化, Alle Dinge werde Woerter)를 동시에 강조하면서 존재의 온 영역을 靈의 영역으로 화하게 하려는 힘찬 기도(企圖)라고 나는 해석하고자 한다.(미주 15)

그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써내려간 「카리스마적 신학」에서 “카리스마적 해석학”을 말하는 그는 기존의 띄어쓰기 방식의 글쓰기도 내려놓고 자동기술적 방식으로 “하나님은영靈이시다”, “영이신하나님과의실존적만남”, “하나님을본다는것”을 말한다.(미주 16) 그가 여기서 ‘영적’이라고 말하는 방식은 결국 초월(정신)과 내재(물질/세계)의 지극한 통합을 말하는 것이므로 ‘슐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서구 예술 사조로서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또 그것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지고 이를 데 없이 겸손한 자세로 모든 것을 대하기 때문에 늘 그 그루터기가 남아서 되살아 나오기에 그러한 것”이라고 강조한다.(미주 17)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 “신뢰의 그루터기”라고 밝히는데, 그러나 이신 신학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또 다른 ‘그루터기’의 범례를 밝히는데, 그것도 한국 시골의 참으로 후미진 곳의 범부들로부터이다. 예를 들어 충청도 괴산군 소수면 수리 죽실령이라는 고개 근처에서 살던 한 사람이 근방의 중국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중국인의 소식이 끊겨 갚을 수 없게 되자, 대신 감사의 마음으로 번 돈으로 그 험한 고갯길을 잘 고쳐서 사람들이 평안히 통행할 수 있게 했고, 거기에 그 중국인을 기리는 돌비를 세워서 그를 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신은 이 시골의 한 촌부야말로 “오늘날처럼허물어져가는불신의시대에참으로아름다운것을일깨워주는일”을 한 신뢰의 그루터기가 된다고 밝힌다;(미주 18)

“요즘사람들에게‘돈’이있고‘지식’이있고‘과학’이있고‘자동차’가있고‘비행기’가있고천체를왕래하는‘우주선’이있고‘원자무기’가있고‘미사일’이있고해도결정적으로결핍된것은‘성실성誠實性’이란것이없어져가고있는것인데그것은‘돈’을갖고도‘과학’을갖고도‘비행기’를갖고도‘우주선’을갖고도‘원자무기’를갖고도‘미사일’이나‘최신무기’를갖고도구제할수없는그런것으로서그런온갖것을갖추고도오히려허물어져가는‘사람과사람사이의관계’와‘사람과자연과의관계’가어떻게하면정상적인것으로회복받을수있는가하는참으로크나큰문제로서또가장긴급을요하는문제로서누가그렇게요즘사람들이느낄것인가마는좌우간이런발설發說함을로또다시웃음거리르만드는것만으로도족한줄로생각한다.”

위 인용문은 이신이 자신의 슐리얼리즘의 신학을 구상하는 가운데 타계하기 2년 전인 1979년 3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쉬르리얼리슴연구소’를 결성하고 그 간행지의 이름을 「돌의 소리」라고 하면서 처음 그 취지와 의미를 밝힌 창간의 선언문에서도 밝힌 글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잘 드러나듯이 슐리얼리즘 신학은 가장 미천해 보이고, 참으로 미약하고 생명 없어 보이는 대상과 장소에서 바로 초월을 보고, 거기에서 보편(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을 알아보고 만나는 영적 실행임을 말한다. 다시 거기서 말하기를,

“쉬르리얼리슴은 동서를 가릴 것도 없고 절대의 합일점인 Surrealité를 곧 물질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 신화와 역사, 성과 속 등의 통전계를 추구하는 것이니 이런 것, 저런 것,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합할 수 있는 데로 합할 수 있는 것이니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미주 19)

라고 하였다. 이신은 1980년 7월3일-9일 사이에 열렸던 ‘제1회 심신장애자(지체부자유자․정신박약아)작품전’을 위한 팜프렛을 쓰게 되었는데, 이 일 자체도 그냥 보통의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거기서 그는 유사한 맥락에서 “차라리좀우직한편이낫고더나가서는좀<어수룩한것>이그리워지는시대라고말할수있는데그런의미에서우리는심신장애자들에게나또그와같은이들에게서여간배울것이많은것이아니다. 이런이들이만들어낸<물건>가운데서오늘날우리가또다시<誠實性>의그루터기를발견할수있을것같고우리잃어버린밑바탕의어떤모습을현대문명의오염을면한분들에게서찾을수있는데”라고 쓰고 있다. 그는 여기서 바로 이러한 그루터기를 발견하는 일을 “유일자”(唯一者)를 발견하는 일로 그리고 있다.(미주 20) 이렇게 이신의 믿음의 상상력은 이와 같은 정도로 보편을 특수에 연결시키고, 특수를 보편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의 믿음과 저항과 상상이 이렇게 시대의 보편의 독점을 깨고서, 다시 새롭게 보편을 세우는 일이라고 본다. 그 일은 바로 ‘거룩’(聖)의 영역을 확대하는 일이고, 지금까지 억눌려 있고, 소외당해 왔으며, 천시 받아왔던 특수의 영역을 새로운 보편으로 등극시키는 일인 것이다.(미주 21)

그의 유고집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의 표지에 나와 있는 그림은 그의 생애 마지막 그림인데, 그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큰 그림일 것이다. 또한 그의 마지막 그림(1980년)이기도 하다. 당시 이신은 충북 괴산군 소수면(소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원효로에 살고 계셨는데, 이 그림을 어느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화실이 따로 있을 리 없던 그는 방 한 면의 책장 앞에 큰 캔버스를 세워 놓고 작은 붓으로 선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밖에서 돌아오면 들어와 그리고 싶은 대로 선을 이어보라고 청하기도 하셨는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짧은 선들이 이어지면서 그 안에 없던 사람의 형상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시 또 이어지면서 또 다른 사람들, 아니 전체가 온통 하나로 이어져서 커다란 하나의 그물망이 생겨났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상상한다. 천지창조처럼 아무 것도 없던 흰 캔버스 위에 하나씩 작은 점과 선들이 모아져서 거대한 생명망이 생기고, 그 창조와 탄생의 과정이 더욱 세밀하고 내밀해지면서 거기서 인간이 탄생하고, 다시 그 핵이 점점 더 튼실해지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른다. 그 모두를 품고 있는 커다란 생명망의 우주적 마음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다.(미주 22)

이신은 두 방향의 창조적 역동성 속에서 특히 우리 시대가 많이 범하고 있는 자칫하면 예술이 빠져들 수 있는 노예성에 대해서 경고했다. 상상력과 특히 관계하는 미는 선보다 더 조화적이고, 미를 통해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의 돌파를 가능하게 하고, 문명이 지닌 이매지네이션의 부패를 지적해 주지만, 그러나 그 부패를 치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종교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미주 23) 예술의 탐미주의가 종종 빠지는 심미적 매력은 인간을 방관자로 만들 뿐이지 행위자로 만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앞에서 들었던 아렌트가 그녀의 『인간의 조건』에서 예술을 인간 “작업”(work)의 범주에 넣으면서 인간의 진정한 주체성이 드러나는 “행위”(action)와는 달리 예술가는 종종 자신이 생산한 작품에 종속되는 노예성에 빠지는 것을 지적한 것과 유사하다.(미주 24) 베르댜예프도 미를 추구하는 예술이 주로 ‘어떻게’에 대한 관심으로 ‘무엇’에 대한 관심을 탈각시킴으로써 마침내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객체나 자아에의 노예성에 빠지게 되는지에 대해서 경고했다.(미주 25) 슐리얼리스트 화가로서의 이신은 그렇게 예술과 종교, 미와 신앙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미주

(미주 1)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71쪽.
(미주 2)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204쪽.
(미주 3) 같은 책, 204-205쪽.
(미주 4)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 함석헌 저작집 14권, 74쪽.
(미주 5) 같은 책, 40, 63쪽; 이은선, 「인(仁)의 사도 함석헌 사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 『陽明學』, 한국양명학회, 제33호 2012.12, 322쪽.
(미주 6)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26쪽 이하.
(미주 7) 같은 책, 131쪽 이하.
(미주 8) 이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은 올 봄에 돌아가신 불문학자 故황현산 교수에 의해서 2012년에『초현실주의 제2선언』,『초현실주의 제3선언 여부에 붙이는 전언』등과 같이 번역 출간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초현실주의 운동사에 대한 긴 해설을 붙인 황 교수님은 그 책을 본인에게 보내주시면서 이미 아버지의 책 1992년 간 『슐리어리즘과 靈의신학』을 읽었으며 자신이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저서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 편지 글에서 황 교수님은 “선생님의 유작은 불문학사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영지주의와 묵시록적 상상력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 유일한 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한국어로 글을 쓴 유일한 초현실주의자를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저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라고 하신다(2012년 3월 20일 편지). 이 편지를 받고 우리 가족들은 매우 고무되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글과 사상이 이렇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다. 그 황현산 교수님의 딸이 이신의 외손자 이경성 연극 연출가와 개인적으로 다시 연결된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삶의 인연이 오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내가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권유였고, 이후 신학을 공부한 것도 그로부터이니 삶은 이렇게 지속된다.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황현산 번역/주석/해설, 미메시스, 2012년.
(미주 9) 황현산, “해설-상상력의 원칙과 말의 힘”,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47-48쪽.
(미주 10) 『맹자』「진심(盡心)」下 25.
(미주 11)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222쪽.
(미주 12) 같은 책, 217쪽.
(미주 13) 같은 책, 224쪽.
(미주 14) 같은 책, 224쪽.
(미주 15)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추구하는 한국의 여성신학자로서 나는 일찍이 “악의 평범성”을 말하는 한나 아렌트와 대화하면서 오히려 “聖의 평범성의 확대”를 강조해 왔는데, 이러한 나의 기도(企圖)가 이신의 슐리얼리즘의 신학적 기도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이은선,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1, 29쪽 이하.
(미주 16)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253쪽 이하.
(미주 17) 같은 책, 225쪽.
(미주 18) 같은 책, 300-301쪽.
(미주 19) 이신, “돌의 소리”,『李信 詩集 돌의소리』,  148쪽.
(미주 20) ‘제1회 심신장애자(지체부자유자․정신박약아)작품전’, 1980.7.3-7.9(7일간), 덕수미술관, 청소년근로문제연구소부설직업훈련원주관, 1980.6.9. 이 글을 나는 이번 기회에 작품전의 팜프랫을 찾아내면서 만났다.
(미주 21) 이은선, 「부활은 명멸明滅한다-4.16세월호의 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 <한국여성신학>, 한국여신학자협의회, 2016 여름 제83호, 80쪽 이하.
(미주 22) 지난 1월부터 감리교 교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기독교세계>는 매월 “돌의 소리”라는 제목 아래 이신의 그림을 한 점씩 소개하고 있고, 그에 대한 해설로 “초현실주의 신학자 李信의 삶과 그림”을 연재하고 있다. 그림에 거의 문외한인 내가 그 해설을 맡아서 나름대로 아버지의 유작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 내면서 아버지의 그림세계를 다시 상상해 본다. 지난 4월호에 실린 해설을 여기에 가져왔다. 이은선, “새그리스도로지”, <기독교세계>, 2017.04, 54쪽.
(미주 2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206쪽.
(미주 24)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미주 25)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318쪽 이하.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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