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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의 종교

기사승인 2018.11.14  21: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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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를 읽고

마침내 J. 리프킨이 두터운 저서 『공감의 시대』를 다 읽었다.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으나 대개 책들의 내용이 용두사미인 경우가 많다. 결론에 이르면 별 새것이 없어 책을 덮기가 아쉬울 때가 다반사이다. 본 책 역시 ‘공감’을 주제로 상당한 연구를 한 것 같으나, 심지어 공감능력이 유전자 속에 내장되었다는 설(說)도 발표하여 성선설의 생물학적 근거를 밝혀 주기도 했으나 결국 1990년대에 출판된 『생명권 정치학(Biosophere Politics)』의 주장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한마디로 지구상의 공간-땅, 바다, 유전자, 전자파 등-을 인클로저 화하는 소위 땅따먹기 식의 지표권 정치학을 그치고 생명권 의식에 기초한 생물권 정치학을 전개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신생대를 지나 생태대로 돌입했음을 알리는 토마스 베리 신부와 같은 의견으로서 본 책에서는 ‘공감력’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1.

『엔트로피』의 저자답게 리프킨은 그의 확산과 증가를 저지하는 것이 인류의 살길임을 강조했다. 인류의 의식이 신화, 신학, 이데올로기, 심리, 연극적 단계를 거쳐 생물권 차원으로 확장된 것은 바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구상의 일체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인 생물권 자체가 붕괴되는 현실에서 한 종(種)으로서의 인류의식이 생명권 의식에로 통합되어야 할 시점이란 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교환되고 인간 상호간 연결고리가 확산된 21세기적 물적 토대가 바로 생명권 의식에로의 통합을 위한 것이라 본 것이다. 기술혁명이 경제적 세계화를 위한 단순 수단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개인적 의식을 고양시켜 생명 자체에 대한 이해를 깊고 넓게 할 수 있는 토대란 사실이다. 이는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과도 일정부분 의미가 상통될 수 있을 것 같다.

2.

그렇다면 생물(명)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는 유기체적 세계인식의 전제 하에서 리프킨은 자연의 내재성, 본유성에 관심한다. 인간을 주변 환경과 별도로 이해할 수 없듯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연기론이 말하듯 자율적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일체 없고 오로지 다른 것과의 관계로서만 존재할 뿐이란 말이다. 이 관계는 활성/비활성 물질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우주 생태계에서 비활성 물질의 순환이 활성 물질의 양과 질에 영향을 미치며 그 역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생물권은 지구상의 ‘생명 유지 장치’로서 정의될 수 있다. 이런 생물권은 바다 심층(대륙붕)에서부터 성층권까지 이어지는 자동차 한 시간 주행거리인 65Km 정도의 범위를 지칭한다. 리프킨은 이런 생물권을 완전 일치는 아니나 가이아 이론과 종종 중첩시켜 이해한다. 동식물군과 대기의 지구화학적 구성의 상호 의존성이 인공지능의 역할을 통해 지구 기후체계를 유지시킨다고 보는 탓이다. 예컨대 대기 중 산소농도가 임계점에 이르면 메탄가스를 만드는 박테리아를 자극하여 메탄가스를 증가시켜 안정(평형)상태에 이르기까지 산소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하기에 인간이 생물권의 생화학적 특성을 방해, 교란시키지 않아야 옳다. 그러나 현실은 화석연류의 과다사용으로 인류는 물론 생명권 전체가 혼동 상태에 빠져있다. 생물을 존속시키는 생물권의 폐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지구가 이처럼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존재하며 그 허약해짐으로 인해 생명활동자체가 유지되기 힘겹게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인간에게 생명권의식의 필연성을 야기 시킨다. 인류의 건강이 전체 유기체의 건강에 전적 의존되는 생명의 그물(카프라)인 한에서 생물권의 복지가 인간의 그것이상으로 중요해졌다는 말이다. 혹자는 자연이 우리시대에 ‘새로운 가난(new poor)’의 대명사가 되었음을 환기시켰다.

따라서 과학 자체가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이전 과학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 환원시켰다면 이후 과학은 참여, 통합, 전체론의 틀거지 하에 있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자연의 본유적 내재가치를 존중하는 과학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바로 생물(명)권 의식이리라.

3.

그렇다면 생물권 의식을 어찌 가르쳐야 옳을 것이며 효과적일 수 있을까? 리프킨은 캐나다를 거쳐 현재 미국에 정착된 생명권 의식을 사회적 책임의 일환으로 가르치는 학교 교육의 예를 소개한다. 이는 ‘공감의 뿌리 프로젝트’(Roots of Empathy Project)란 이름으로 생태적 연계성에로까지 인간의식을 확장시키는 시도라 하겠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공감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으로서 본 프로젝트는 한 엄마와 아이(생후 5개월)를 한 달에 한 번씩 학교교실을 찾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어린 학생들은 엄마와 아이 간 상호 일어나는 반응을 주목, 관찰하여 발표토록 하였다. 이 과정이 지속되면서 학생들은 아기의 정서, 심리적 발달과 엄마와의 애착 및 관계의 발전 상태, 무엇보다 엄마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능력, 양자 간의 공감능력에 주목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네 살 때 자신의 목전에서 엄마가 살해된 장면을 기억하는 한 어린 학생이 있었다. 그는 늘 외톨이였고 급우들에게는 무서운 존재로 각인된 상태였다. 처음 엄마 품 아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던 존재였으나 본 과정이 끝날 무렵 ‘대런’이란 학생은 아이를 자기 가슴에 품고 조심스레 흔들며 사랑의 마음을 전하다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한다.

“사랑 받아 본 적이 없는 데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요?”

냉담했던 학생이 아기가 보여주는 무조건적 애정을 체험하면서 자신도 아기를 좋다 여기게 되었고 이처럼 자기 인생을 바꾸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런 변화를 지켜본 학교장은 이런 정서적 독해법을 일컬어 ‘서로에게서 인간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라 말했다.(물론 이런  프로그램은 학년에 따라 정도차가 있고 상호 다른 교과목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교장의 말 한 구절을 다시 길게 소개한다.

“공감의 뿌리(프로젝트)는 세계시민을 만들어 내는 수업이다. 모두가 같은 구명정을 탔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사회적 책임과 공감적 윤리를 심어준다...”

결국 학교 교실이 경쟁보다 협력을 강조할 경우, 개인으로부터 관계의 형태로 교육적 관심이 증폭될 시, 하여 결론보다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공감력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권의식에 이르기까지.

4.

이에 리프킨은 괴테의 말을 빌려 자연과의 공감력에 이르는 새 방식을 소개한다. 자연에 대해 객관적 관찰자가 될 것을 요구받던 계몽의 시대에 유독 참여자로서 자연과 교제했던 괴테의 경우를 통해 소위 ‘공감적 과학’을 역설하기 위해서이다.

“생각의 힘은 대상(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순간 활성화 되며 그 때 생각은 대상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즉 진정한 통찰은 현상에 깊이 참여(공감)할 때 얻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공감과 내관(內觀)으로 비롯한 경험을 리프킨은 ‘대안적 경험론’이라 칭했고 그를 통해 경험과 추상을 하나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공감 역시도 일종의 관찰도구로서 과학과의 접목이 가능함을 역설하기 위함이었다.

“보다 민감한 관찰자가 세계의 더 많은 부분을 자아와 합치시킬 수 있다.”(A. 매슬로)

이를 위해 괴테를 따르는 매슬로는 지식에 대한 ‘수용적 전략’(receptive strategy)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수용적 개방성과 등가어로서 ‘사물이 스스로이고자 하는,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한 지각표상의 구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라 할 것이다. 영장류 동물학자인 제인 구달의 경우가 리프킨이 말하듯 이에 해당될 수 있을 듯싶다.

생물권에 도달하려면 자연에 깊숙이 참여하려는 배려심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까닭이다. 이런 전환을 보며 우리는 如如한 실상을 깨침의 세계라 한 불교, 格物致知의 신유학의 인식론 그리고 그것을 盡物性이라 언표한 多夕사상을 떠올릴 수 있겠다. 동양전통 속에서 오래된 미래, 소위 ‘시간적 혼종성’을 경험할 수 있는 듯싶은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니라.

5.

성서 역시도 들의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에게로 인간의 눈길을 돌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것을 보며 세상을 창조한 이를 맘껏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가르치는 손가락(성서)만 강조할 뿐 정작 자연을 보지 않는다. 앞선 개념을 사용한다면 수용적 전략이 전혀 부재한 상태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리프킨은 지금 인간의 할일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맘껏 활용하여 자연의 본성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 했다. 의식 이전의 비합리 상태로의 회귀가 아니라 의식을 총동원하여 생물권 의식을 자신의 본질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로써만 인류의 중추신경계가 지구권(지표권 정치학)에서 생물(명)권에로 확장될 수 있으며 인류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리프킨은 자신의 앞선 책 『생명권 정치학』에서 프로이드의 말을 빌려 복잡하게 서술된 인간의식을 명료하게 3단계로서 언표 한 적이 있다. 어머니로 비유된 자연 품안에 있던 아기(인간)의 일체의식 그리고 아기가 성장하여 어머니와 분리된 상태(분리의식) 마지막으로 인간의 자유의식을 갖고 다시금 어머니인 세계와의 大洋的 통일을 이루는 단계가 그것이다. 지금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마지막에서 말하는 생명권 의식이란 바로 인류 역사의 막바지에서 요구되는 세 번째 단계의 의식이다. 인류가 지금 생명권 의식에로 나아가는 역사적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인 분리(계몽적 근대)를 넘어서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분리란 프로이드의 경우 죽음과도 같은 공포로서 그에 대한 보상이 소유의식과 등가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지금 인류의 병폐인 소유의식은 죽음에로의 본능(타나토스)일뿐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적폐가 아닐 수 없다.

제3의 의식, 즉 생명권 의식을 통해 지표권을 넘어선 생명권 정치학만이 인류의 멸절을 막는 유일한 대안임이 틀림없다. 바로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저자가 팔백이지 분량을 갖고 강조한 공감능력이다. 인간을 넘어 자연과 하나 되는 공감력, 더욱이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 속에 내장되었다고 보는 공감력, 우리 모두가 하나의 행성 속에 살고 있다는 자의식, 우주적 대가족 의식(보편적 근친성)이야 말로 인류의 살 길이라는 것이다.

의식의 1. 2 단계에 해당되는 모든 과정을 거쳐 인류는 지금 생태대로의 도약을 앞두고 그것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리프킨은 이런 공감적 감수성이 지금 새로운 수준과 높이에 이르고 있기에 인류의 미래를 충분히 낙관한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두 번째 의식단계가 더욱 기승을 부려 죽음의 본능을 살게 함으로써 인류를 멸절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닐지 동시대의 다른 학자들의 저술을 보며 염려한다. 그럼에도 본 책의 낙관성은 밉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한다. 우리 모두가 종교인인 탓에 그러한 것인가?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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