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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수살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4가지 악과 원죄론

기사승인 2018.11.07  22: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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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의 인문학으로 영화읽기

1. 영화 <암수살인>과 외로운 늑대

영화 <신과 함께>에서 저승사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 주지훈이 영화 <암수살인>(2018)에서 삭발투혼까지 감행하며 살인범의 연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을 암수살인이라고 하는데, 2010년 부산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영화의 첫 장면, 자갈치 한 식당에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 분)는 형사 김형민(김윤석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태오가 적어준 7개의 살인 리스트를 보고 직감적으로 사실임을 감지한 김형사는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라고 말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사실 태오가 추가 살인한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이고, 김형사는 태오가 거짓말과 진실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수사를 포기 하지 않는다. 부족한 증거로, 또한 공소시효가 끝나버리면 18년 형을 살고 나와도 50세가 되어 또 다시 살인을 할 태오를 잡고자 김형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김형사는 증거와 증인으로 태오의 범죄를 밝히고 태오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지만, 융악하고 교활한 살인범 태오는 감옥에서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태오는 왜 그랬을까? 왜 사람을 죽이고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악의 화신으로 남았을까? 어릴 때 50세 남성을 죽였다는 첫 번째 태오의 자백 리스트에 답이 있다.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당하는 남매, 그리고 중 3때 그 아버지를 죽인 태오와 그것을 모른 채 하는 고 2인 누나. 아버지의 폭력은 아들에게 유전되어 마침내 어른이 된 태오는 아버지와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애인을 살해하고, 이어지는 행인과의 조그마한 마찰에도 살인을 계속한다. 그리고 풀려나고자 김형사에게 자신의 범죄를 말하며 증거불충분으로 감형, 혹은 무죄를 선고받고자 한다.

사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정서이지만,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행위는 통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잇따르고 있다. 2012년 서울 여의도 흉기 난동사건, 2014년 울산 버스정류장 살인사건, 2016년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올 2018년 10월에 발생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부산 일가족 피살사건, 경남 거제의 폐지 줍는 여성을 젊은 청년이 살해한 사건 등은 분노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가해자 대부분은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은 ‘외로운 늑대(lone wolf)’유형이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화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미주 1)

폭력과 살인의 발생사, 곧 죄라는 것이 그저 악한 행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육과 도덕적인 갱신(나아가 약물을 통한 치료와 뇌구조 변경까지)을 통해서 교양을 증진시키고, 사회전체를 잘 정비된 법률로 통제하며 관리한다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오는 감옥에서 종교적으로는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교육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며, 역설적으로 법에 의해 무죄를 선고 받고자 한다. 법과 교육(종교까지)의 무용성을 잘 보여준다.

주변을 둘러보라. 지금 우리의 삶, 사회 환경, 그리고 국제 정치와 인류의 역사는 폭력과 이기심, 살인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죄는 마르지 않고 폭포수처럼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비약은 있겠지만 영화 <암수살인>은 기독교 시각으로 보면 악의 실체와 발생사, 곧 원죄에 관한 영화이다.

2. 악의 실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문제를 네 가지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도덕적, 심미적, 그리고 종말론적 관점이다. 먼저, 존재론적 관점에서 악은 비존재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다만 존재와 선의 결핍 상태이다.” 곧, 악이란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자기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결핍)의 상태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다. 태오의 환경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Omnis natura bona est)”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좋았다는 것, 본래 악을 창조하지 않으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나, 이러한 악의 존재론적 이해는 역사 안에서 체험한 악의 실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태오의 잔인성과 교활함은 단지 선의 결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안에서 체험하는 악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번째로 악의 도덕적 관점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선한 의지의 결핍, 즉 악한 의지(voluntas mala) 또는 ‘탐욕(cupiditas)’이다.(미주 2) 곧, 악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성에서 찾아 악을 도덕적, 경험적으로 선한 의지의 결핍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로써의 악이 있다면 그것과 상관없는 자연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악은 인간의지의 왜곡이요, 자연악은 그 결과이다. 전자는 죄요, 후자는 죄에 대한 벌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은 죄이든지 혹은 죄에 대한 벌이든지 그 하나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역사관’이 나오게 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처럼 줄거리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공간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인간 역사의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시간적 조화’를 이루어 나가면서 최후의 완성을 향해 진행해 나간다.”

따라서 공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 악의 문제는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이, 시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는 네 번째 ‘종말론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밑에서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위에서, 곧 창조자의 견지에서 전체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게 될 때 악으로 보였던 부분도 결국 전체적인 조화와 미에 공헌하는 요소들이 되고 만다.” 놀라운 통찰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검정색(만약 이것을 악이라고 한다면!)’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는 것이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겐 악이 정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 밖에서 어떤 것이 침입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이 질서를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창조한 일부분이 다른 것들과 조화되지 않아서 악인 듯이 보여도 또 다른 것들과는 조화되어 좋게 되고 또한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관점은 때로는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를 암시하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을 우주(공간의 차원)에 적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곧, 시간과 역사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로 인도되어 결국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전능하신 자는 그것 때문에 자기의 뜻을 성취해 나가시는데 고난을 느끼지 않으신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악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 밖에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행동과 생각까지도 이용하여 자기의 뜻을 수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신다.”

태오에게 면죄부를 주어 희생자의 울음이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요강』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보다는 악에서 선을 이루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서 역사의 미와 조화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신국론』의 핵심이 된다. 이 세상에는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세상나라(Civitas mundi)’가 서로 얽혀 있지만 결국 신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나라는 이 세상나라에 참여하여 세상나라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그 그림 속에 잘 표현된 그림자에 의하여 더 미화되는 것처럼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겐 이 우주의 미는 악을 행하는 죄인들에 의하여서도 더 증진된다.”

결국 『신국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종국에 가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악을 제어하시고 시간적이고 유한한 악으로부터 영원하고 무한한 선을 이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악의 문제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결이다. 태오가 자살함으로 악이 제어된 것인가? 아니면 무기징역을 선언함으로 정의는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해자의 사체를 찾기 위해 낙동강 생태공원의 아름다운 갈대밭을 수첩을 들고 걸어다니는 김형사의 모습은 어쩐지 씁쓸하다. “오지희, 어디있노? 니!?”

3. 악의 발생사: 원죄

따라서 김형사의 씁쓸한 모습의 원인은 악의 발생사로 ‘원죄(原罪)’를 논할 때 이해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자신의 저작 『고백록』에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이 된 원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미주 3)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죄인인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유전시켰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아담과 동일시하기에, 아담과 인류의 관계는 유대관계(또는 연대관계)이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인류는 출생시 ‘죄의 총체(messa peccati)’에 가담한 실제적 죄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받는 ‘구속된 총체(messa redmata)’이기도 하다.

▲ 중세신학을 열고 그리스도교 신학을 최초로 집대성한 어거스틴 ⓒGetty Image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의 보편성의 원인을 ‘육체의 유혹’으로 보지 않고, ‘의지의 전도(the pervision of will)’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치유의 방법도 ‘은총의 절대성’뿐이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원죄는 단순한 죄책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이고, ‘모방(imitation)’이 아니라, 출산에 의해 생성되며, 원죄의 결과로 개인들에게는 무지, 육욕, 죽음이 초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원죄는 아담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이러한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 곧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한다.(미주 4)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자유란 선을 선택하고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이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는 포로가 될 것이므로 죄짓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조치로 해방되지 않는다면, 의를 행하는데도 쓸모가 없다.”(미주 5)

사실 죄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은 인간의 의지를 왜곡시켰고,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었으며 육체에 굴복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을 부어 주시어 믿음으로 무지를 정복하고, 사랑으로 자기중심을 대체하고, 소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영화로 시작했기에 영화로 결론을 내려 보자. 태오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왜곡된 의지로 진리에 눈멀고, 육체에 굴복당한 것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구속된 총체’로 가기엔 선의 결핍이 너무 심했던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바벨론 성이었기 때문일까? 답은 태오가 김형사에게 그토록 사주기를 바랬던 변색안경(선글라스)에 있다. 실내에서는 그냥 도수 없는 안경이지만, 실외에서는 빛을 차단하는 선글라스가 되는, 그 안경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태오가 안경을 갖고 싶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해준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미주

(미주 1) 경찰청이 지난해 살인을 저지른 914명의 동기를 조사한 결과 ‘우발적’이 357명(39.1%)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하루에 1건 꼴로 우발적 살인이 일어난 셈이다. 가정불화(76명), 현실불만(44명), 경제적 이익(19명), 보복(8명) 등 순이었는데,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이는 2014년 345명, 2015년 344명, 2016년 373명, 2017년 357명으로 매년 300∼400명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분노에 의한 범죄 발생은 경쟁과 갈등이 심한 현대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반영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낙오되거나 살아남지 못한 이들이 살인 등 강력범죄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경제 불황 등을 겪을 때 외로운 늑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좌절을 더 느끼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고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분노를 긍정적으로 해소할 방법이 없어 타인에게 과격한 표현을 하고, 물리적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예방할 국가 차원의 시스템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사회적 외톨이’에 대한 실태조사와 스트레스의 극단적 분출을 예방할 국가 차원의 관리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미주 2)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이 아닌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그에 의하면 사랑은 두 가지이다. 큐피디타스(cupiditas)와 카리타스(caritas)로, 전자는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 곧 명예와 권력, 돈에 대한 갈구이며 후자는 ‘영원한 존재, 신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미주 3) 1,600년이나 되는 이 교리가 공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원죄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유럽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자정 능력과 초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선택된 인간들은 교리와 같은 남들이 만들어놓은 권위에 순응하는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자기’라는 현재 상태를 극복해 ‘초인(超人)’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원죄를 반대한다. 칸트 역시 악의 문제를 선험적으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이 ‘선험적인 악’은 ‘이성의 힘’을 통해서 제어 할 수 있다고 한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이 바로 그러한 결론이다.
(미주 4) 이것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차이인데, 동방교회의 전통은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선택의 자유가 아담의 후손에게도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아담이 행사하였던 선택의 자유는 아담의 범죄 행위로 상실되어 그의 후손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방교회는 아담의 범죄가 인류에게 유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동방교회는 인간의 연약함과 육체적 유혹 때문에 아담이 범죄를 한 것이고 이러한 연약함과 육체적 유혹이 인간을 멸망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악을 육체의 유혹으로 돌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독신주의, 금식, 육체적 고행은 바로 이들의 신앙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교회의 율법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는 ‘은총’을 강조하고, 동방교회의 낙관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는 ‘원죄’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주 5) 종교개혁자 칼빈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 동의하며 『기독교 강요』 제2권 1장에서 5장까지 원죄에 관해 논의했다. 무려 100페이지 걸쳐 사람의 비참한 현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핵심은 죄로 인해 의지의 자유를 빼앗긴 채 종의 상태에 매여 있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따라 칼빈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칼빈의 말이다.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게 되면 크나큰 위험이 따르게 되므로, 오히려 그것을 폐기하는 것이 교회를 위하여 큰 유익이 되리라고 본다. 나 자신은 이 용어를 쓰지 않을 것 이고, 혹 다른 사람들이 나의 조언을 구한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쓰지 말라고 말하고 하고 싶다.” 결국 인간은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해 죽음과 정죄의 굴레 하에 놓여있기에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고자 오신 중보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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