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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자: 이세종

기사승인 2018.09.28  21: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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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6)

중국의 작가 루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바울선생이 말한 대로 만약 예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부활은 하나의 신앙고백적 사건으로 믿어지고 고백될 따름이지, 사진을 보여주는 등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래 지금도 논리와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예수 부활사건은 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비신화화를 얘기하는 불트만같은 신학자는 이 부활사건을 제자들의 믿음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활은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벗어나는 사건이기에 부활의 실재에 관련한 의심과 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 사건의 현대적 조명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4개의 복음서는 각론에 들어가면 조금씩 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는 처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어떤 복음서는 엠마오를 향해 내려갔던 두 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손을 대어 만져보라고 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가에 나타나셔서는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기도 하시어 배고픔을 느끼는 육신의 몸을 증명하여 주셨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방에 문을 열지 않고서도 들어오시는 신비의 영체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자 마태는 부활 후 잠시 갈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제자의 사명을 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지만,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부활 이후 40일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이 서로 어긋난다는 이유로 부활의 실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루쉰이 말한 희망의 정의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부모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듯이,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이는 부활의 사실성을 넘어서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넘어선 영원을 사는 것이니까, 우리 믿는 우리들이 너도나도 이 땅에서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와 생명 그리고 정의실현이라는 하늘 진리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고..., 암에 걸렸거나 직장에서 해고되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영위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부활은 과연 있는 것이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선 영성의 뿌리를 찾아

조선의 초기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의 모습만이 아니라, 소수이지만 내면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친 영성가들이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사람이 흔히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조선의 호세야 혹은 성 프란체스코에 비교되는 이세종 선생입니다.

이세종은 1880년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동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형제 중 막내로 가난한 형님 댁에 얹혀살았습니다. 일자무식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 그는 28세 되던 해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든 끝장을 보는 오기와 뚝심을 갖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고 구두쇠처럼 재산을 모아 드디어 머슴살이 10년 만에 마을에서 최고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뻐기고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모자란 것이 하나 있었으니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10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좋다는 것은 다 먹어보아도 효험이 없자 무당굿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얻고 싶으면 불당을 짓고 정성을 드려야 한다고 하자 2층짜리 산당을 짓고 그 앞에 몸을 씻기 위한 연못까지 팠습니다. 거기서 하루 열두 상 차리는 제사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심히 앓아눕게 되어 사경을 헤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동네 미친 여자로부터 ‘예수를 믿어야 살지’ 하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성서를 하나 구해 놓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가며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 얼마나 큰지 이런 얘기가 전해옵니다.

영성: 청빈, 희생, 사랑의 길

이세종의 얼굴은 기쁨에 넘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가서 두 손을 쳐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고함을 지릅니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너무 흥분하여 춤을 추는 동안에 자신의 아랫도리가 벗겨진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산당을 짓고 하루 12번의 제사를 드린 공이 헛수고요,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아 가는 청빈과 자기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세종은 불같은 성격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바로 실천에 옮겼는데, 그의 실천은 참으로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세리장 부자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어 놓은 성서의 얘기를 읽자 이를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흉년이 들었던 어느 해에 먹을 것이 없어 땅을 판 가난한 농부의 논 오십 두락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토지를 헐값에 빼앗기면서 얼마나 원통했겠느냐고 하며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외치신 희년 선언을 따라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줍니다. 심지어는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줍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 소문을 들은 이세종은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사정합니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빈 공(空)자 이공(李空)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낙스(R. Knox 노라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밤에는 말씀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청년에게 성서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성서공부는 영해(靈解)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성교회 와는 달리 삶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진리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 참 진리다. 진리에 대해 우리 마음에 의심이 나는 까닭은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자녀 많이 낳은 것을 축복과 영광이라 생각하는데, 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처자와 단란하게 사는 것조차 마다하면서 고생을 자처하고 종교진리를 따르니, 세상사람 눈으로 볼 때에 자기들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의심이 생기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독려하였습니다. 소문이 나자 멀리 광주에서 전도사, 선생, 목사들이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이 가운데 이현필, 이상복, 박복만, 이대영, 전도부인 오복희, 수레기 어머니 손임순, 목사로는 최흥종, 그의 사위 강순명, 백영흠, 이만식, 최원갑, 현동완 등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프란체스코

그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산중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거지 옷을 입고 다녔고, 한번은 광주의 교회 공식모임에 초청을 받아 가던 길이어 새 옷을 입고 가다가 길에서 걸인을 만나 그와 옷을 바꿔 입고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아버지가 반대하자 아버지와의 부자 인연을 끊고 작은 형제회를 통해 청빈의 삶을 살았던 성인 12세기의 이태리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소유나 청빈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가 선택한 맑은 가난을 말합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청빈과 무소유는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입니다. 사람은 풍요 속에서 삶의 풍성함과 생의 만족을 얻으리라고 생각하여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그 삶을 보면 사람들은 반대로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까하는 불안에 휩싸이고 그래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악착스러워지고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경쟁심에 불타오릅니다. 결국은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도가 떨어지고 자살률은 올라가고 사회 범죄는 더 많아지는 이유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물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 평화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비우는데 있습니다. 청빈, 맑은 가난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갖게 합니다. 악기는 속이 비어 있을 때 맑은 소리가 울려납니다. 우리 인간도 그 몸과 영혼이 비어 있을 때에 하늘의 맑은 평화의 소리가 울려납니다.

이세종님은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는데, 그것은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고,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서 먹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자연 사랑과 기독교 영성

그리고 그는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산천 초목과 금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산길을 지나가면서도 풀잎을 쓰다듬어 주면서 다녔고, 길에 뻗어 나온 칡넝쿨을 누군가가 밟아 진액이 흐를 때에는 마치 사람의 피와 같다하여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발밑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빈대도 죽이지 않고 파리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내어 몰긴 했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네팔에 갔을 때, 음식점 주인들이 창문에 붙어 있는 파리를 죽이지 않고 문을 열고는 살살 달래 밖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안에 파리를 파리채를 들어 아무 생각없이 내리치는 사람과 살살 달래 집밖으로 내보내는 사람 이 둘 중 누가 참 사람에 가까운가요?

인간만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다 고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살아가도록 자리를 제공하는 자연 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산과 강은 무생물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낳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그동안 과학과 기술문명은 자연을 인간 욕망을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지구 변화는 그동안 우리가 겪어왔던 경험의 수치를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의 급작스런 변화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조선의 호세야

그런데 예수를 믿어 참 기쁨을 누렸던 이세종에게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으니, 그건 아내와의 관계였습니다. 이세종은 30세 때에 14살짜리 시골처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이로 인해 예수를 만나게 되고 변화된 삶의 얘기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변화는 단순히 먹고 사는 일뿐만이 아니라, 부부생활까지 변화가 왔는데, 그는 아내와 한 방에 거처하면서 성생활을 하지 않고 남매처럼 지내고자 했습니다. 이를 이혼이 아닌 해혼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참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떠나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갑니다.

물론 간디나 류영모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들이 이를 받아들여 오누이처럼 살아갔지만, 이세종의 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세종은 깨끗한 신앙인이고 그의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에 눈을 뜬 20대 중반의 부인에게 금욕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의 말에 부부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내로 하여금 남의 부인이 되도록 한 것은 남편 이세종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세종 님이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은 단지 성생활이라는 금욕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세종 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내 욕심을 채워주지 말라. 내 욕심과는 정반대되게 행하라. 부부간에도 욕심을 서로 채워주지 말라. 정반대로 하라.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일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므로 생명과 육신의 괴로움이 없고, 영혼은 구원할 수 있다. 고기를 먹을 줄 모르는 아이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고운 옷을 모르는 아이에게 고운 옷을 입혀 기르는 것은 그 아이의 영혼을 버리게 하는 일이다.”(엄두섭, 202쪽)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했던 이세종의 아내는 집을 나가 딴 남자에게 갑니다. 처음 아내가 몰래 집을 나가자 사람을 시켜 아내가 쓰던 세간을 옮겨다 주고, 아내 집에 심방을 가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그래 어떤 때는 아내로부터 물바가지 세례를 받기도 하고 구정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점에서 이세종님은 다른 남자를 쫓아 집을 나간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왔던 호세아 선지자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세월이 흐르자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 그 또한 50이 넘어 한글을 깨우치고 성서를 읽어 큰 은혜를 얻었습니다. 말년에 이세종이 깊은 산속에 숨어 들어가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꼴로 살았습니다. 이세종이 죽은 후에는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의 무덤을 삼년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습니다. “나는 세상에 와서 예수 잘 믿는 남편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감사했습니다. 77세 임종할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남편에게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하여 바로 누워 자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세종의 예수 사랑의 힘은 결국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켜 또 하나의 성인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신앙 영성의 완성

이세종 님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산 것이 내게 붙어 있다. 그것이 떠나면 나는 죽는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살 것이요, 하느님께서 내게서 당신의 선한 것을 도로 찾아 가시면 그때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으니 나의 육체도 살 수 없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것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서 맑은 것을 도로 찾아가심으로 그 남은 것은 썩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썩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무를 불에 태워버리면 그 나무는 죽은 줄로 알지만 태운 재를 거둬 다른 나무에 거름으로 주면 그 비료 성분 덕택으로 잘 산다. 그런고로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해서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람들의 육체도 이와 같다.”(엄두섭, 203쪽)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삼 개월을 곡기를 끊어 자기 몸을 비우고, 마지막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상여를 만들어 좁은 방에 놓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누워 말하기를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내가 옆에서 울자 누워 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조금 후에 죽었습니다.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남았습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던 이현필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동광원을 세워 그 정신을 계속 이어 개신교 영성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 사진 제일 오른쪽이 이세종 선생의 제자 이현필 선생. ⓒGetty Image

한신대의 실천신학자 박근원 교수는 “한국 개신교 영성의 뿌리는 이세종·이현필로 이어지는 운동이었다. 이분들은 전형적인 조선사람으로서 외부의 신학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다만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체험한 신앙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들의 영성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대가들의 신앙생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으며, 감신대의 정경옥교수는 이세종을 가리켜 도암의 숨은 성자라고 했습니다.

죽음 그리고 부활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김병로판사가 있습니다. 김병로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서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던 분으로 유명하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김병로판사님은 일제식민지시대를 살면서 3·1독립민중항쟁 사건을 비롯하여 단천사건, 간도사건, 정의부사건, 광복단사건, 105인사건 등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습니다.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후원하다 제재를 당하자 1932년부터는 은둔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처음에는 여운형과 박헌영이 합작한 인민공화국의 사법부장으로 선임되어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애를 쓰다 미군정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이승만이 주도하는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습니다.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진 사람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사사오입개헌의 불법성을 역설하고 보안법 개악에도 반대했습니다. 이승만이 1956년 국회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라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박정희군사정권 이후 잘못된 정권에 하수인 역할을 하였던 수많은 법관들 특히 요즘 언론에 자주 회자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여러 법관들이 이분을 사표로 모셨더라면 지금과 같은 불명예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종 님의 철저한 청빈과 순결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영성의 삶은 우리 같은 범인으로서는 쉽사리 흉내 내기 어려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예수께서 앞장서서 걸어가신 그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우리 힘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습니다. 바울 선생이 고백한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는’ 예수 부활의 영에 사로잡혔을 때에 가능한 길입니다.

님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음으로 우리는 새로 산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십자가를 지려는 자는 없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는 꺼리는 것이다. 사람이 활개 펴고 가시덤불 속으로 지나가보라,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괴롭겠는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자기의 영광, 자기의 자유는 없게 되고, 또한 고생과 환난이 닥쳐오므로 누구나 십자가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를 고치고 모든 어려움을 참고 거듭난 생활을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고, 세례요한도 바른 말을 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다. 우리는 이것을 거울삼아야 한다.”(엄두섭, 196쪽)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바울 시대는 듣든지 말든지 부르짖는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 시대와는 달라서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귀로 듣다가 신자의 행동을 보면서 비교해 보려는 것이니 그런고로 말보다 행동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상사람 누구나 다 성경말씀은 선하고 좋은 말씀인줄 알고 있지만, 신자들의 행동과 태도가 성경과는 반대이므로 말만하고 행치 않는 것을 보고 도리어 비방한다. 그러므로 입으로 전도하는 것은 죄다. 누구든지 신불신 간에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속에 계시니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보지 말로 그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보아야 한다.”(엄두섭, 207쪽)

 

참고도서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서울: 은성, 1993.
조현. 『울림: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이세종 편)』, 서울: 시작, 2008.
최흥욱. “청빈의 길, 사랑의 길 - 이세종”, 「기독교사상」, 14-26쪽

조헌정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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