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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강의』 연재를 시작하며

기사승인 2018.09.26  20: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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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학회 편 『다석강의』

이 책 『다석강의』(현암사) 첫판은 2006년 3월 10일에 나왔고 그후 여러 번 판을 달리하여 다수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다. ‘다석학회’가 엮은 주체로 되어있다. 필자 역시 본 학회 회원이긴 하나 박영호, 정양모 두 분 선생님의 지대한 공으로 세상에 빛을 보았다.

故 김흥호 선생님이 준비해 놓으셨던 『다석일지』 덕분에 『다석강의』가 세상에 빛을 보았으니 이 분의 수고도 크게 기억할 일이다. 이 책은 『다석일지』에 기록된 말씀을 갖고 다석 유영모 선생이 직접 연경(硏經)반에서 강의한 내용을 풀은 것이다. 매 강의마다 몇 개의 글을 갖고 둬 시간씩 말씀해 주셨다.

주로 YMCA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다석 선생은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서도 힘껏 강의하셨다고 한다. 45개 강의로 구성되었고 975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책 내용도 결코 쉽지 않다. 읽는 이의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으면 말씀의 참뜻을 얻기가 쉽지 않다.

지금껏 다석에 관한 많은 그들을 접해왔겠으나 이번 연재를 통해 다석 선생님의 글을 직접 대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 말미에 김흥호, 박영호 두분 선생님의 글이 부록처럼 실려 있다. 필자 역시 이분들의 말씀을 연재 마지막에 가서 정리할 생각이다.

『다석강의』 첫 번째 글은 이미 오래 전에 “에큐메니안”(대표 이해학 목사, 운영위원장 윤인중 목사)에 소개했다. 그러나 본 책을 본격적으로 연재하는 마당에서 첫 글을 다시 소개할 필요를 느꼈다. 앞으로 필자가 읽고 마음에 새긴 『다석강의』를 두 주에 한 강의 씩 연재해 나갈 것이다.

말했듯이 읽는 이의 마음이 분주치 않아야 글맛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필자는 마음이 산란할 때 다석 읽기를 포기한다. 여하튼 다석 유영모에 대한 열기가 크고 많다 하여 “에큐메니안” 편집자들이 요청으로 시작된 일이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읽혀질 수 있을지 염려되기도 한다.

이상한(?) 한글과 어려운 한자들이 혼용된 탓에 거부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숨긴 보물을 캐내는 심정으로 한 강의 씩 내용을 점하다 보면 사상의 광맥을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과 더불어 『다석강의』를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본 책 『다석강의』는 多夕 유영모 선생이 1956년서 1957년 두해동안 YMCA 연경반에서 강의한 내용을 풀어 낸 것이다. 당시 이 강의에 참석했던 김흥호 선생께서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속기사를 시켜 강연 내용을 속기 하였다. 당시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주옥같은 『다석강의』는 세상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김흥호 선생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 2005년 박영호 선생을 중심하여 다석학회가 조직되었고 그 모임에서 속기 문을 풀어내어 그의 탄생 116년을 기념할 목적으로 본 책을 엮어낸 것이다. 아마도 출판을 위해 한 특허법인 대표께서 거액을 희사한 것으로 안다.

본 책 『다석강의』는 제도적 기독교, 교리화된 기독교를 근간에서부터 흔드는 힘을 지녔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기독교의 속죄론, 하느님 이해에 이르기까지 기존 생각과 크게 다르다. 김흥호 선생은 이런 선생의 입장을 ‘동양적 기독교’라 칭한바 있었다. 본 책은 43강의로 구성되었고 전체 쪽수로는 거의 일천 페이지에 이른다. 강의 하나하나에 엄청난 내용이 담겼고 독특한 한글 풀이로 인해 독해가 쉽지 않아 그의 생각을 간파하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무엇보다 내용의 방대함으로 여느 책처럼 본 책을 하나의 글로 서평 하는 것 역시 무리라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43편으로 구성된 『다석강의』를 한 강의씩 풀어서 소개할 생각이다. 한편의 강의가 책 한 권의 무게를 지닐 만큼 엄청나기에 필자의 글 역시 난해 할 수밖에 없다. 걱정이 앞서나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43강의 전체를 소개하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을 것이고 순서도 목차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겠다. 본 글은 『다석강의』 첫 장에 대한 내용이다.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

1.

삶과 죽음을 인간의 두 차원으로 보았던 多夕의 첫 강의는 순 한글로 된 두 시 풀이를 통해 진행된다. 쉽게 읽어 낼 수 없는 암호와도 같은 다석의 시편이라 하겠다. 두 편의 시(시조) 제목은 다음과 같다. ‘실컷 따위 말 조희 한 월 줄’(다석일지 1956, 10.13)과 ‘손 맞아 드림’(다석일지 1956, 10.15)이다.

순수 한글이나 제목부터가 아주 낯설다. 하루 차(差)를 두고 썼던 글이라 내용적 상관성이 아주 깊을 것 같다. 나이 일흔에 이른 다석은 종종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말씀했다. 그는 일흔을 ‘인생을 잊는다(忘)’로 말뜻을 풀어냈다.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다석은 89살에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제자 김교신의 앞선 죽음(1945) 이후 그는 자신의 산 날 수를 계산하며 살았는데 일흔에 이르러 생사의 틈을 스스로 지워버리려 했던 것이다. 하느님말씀을 깨쳐 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자 끝이라 여긴 탓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자신을 심판할 것’이라 믿고 죽음을 초월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삶과 무관한 화려한 말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를 죽비로 내려치고 있다. 죽음 이후 천당을 약속하는 값싼 기독교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컸다.

이런 확신 이면에는 맹자와 공자의 생각이 자리했다. 이들은 일생동안 말을 알고 그 씨앗(道)을 잘 길렀기(我知言我善養吾浩然之氣)에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朝聞道夕死可) 존재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言)과 도(道)란 다석에게 동서를 회통하는 하느님 말씀이었다. 특정 종교에게 속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알고 세상을 떠나면 악을 면케 됩니다’.

2.

이제 첫 시조의 제목 ‘실컷 따위 말 조히 한 월 줄’부터 설명해야겠다. 전체 뜻을 말하자면 ‘세상 것을 탐하며 실컷 누리며 살 생각 말고 하늘로부터 온 말씀 붙잡고 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석은 ‘실컷’이란 말을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허락하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늘 뜻(道) 구하며 사는 일과는 동이 서에서 멀 듯 무관하다. ‘저 좋으면 좋지(그뿐이지)’라는 것은 악마에게 복종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석은 ‘실컷 따위 말’을 그치고 하늘로부터 온 말씀으로 살라고 ‘조히 한 월 줄’을 이어서 붙였다. 조히란 조급하게 생각지 않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일컫는다. 자기 삶을 성찰하는 모습이다. 세상에는 부지지생(不知之生), 즉 자기 삶이 옳은 것이지 그른 것인지를 분간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좋으면 좋다고 생각하며 인생을 ‘실컷’ 살기 때문이다.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달을 조히 살았기에 세상에서도 조히 살아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말씀, 절대의 큰 정신을 사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히 한 얼 줄’이란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여기서 ‘줄’은 경(經)을 말한다. 정신의 줄이 바로 얼 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 말씀, 곧 예수의 말씀을 붙잡고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살자고 쓴 글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별개일 수 없다.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다고 다석은 믿었다. 어머니의 배, 지구란 배를 떠나서 전혀 다른 배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배가 무엇일지 스스로 가늠할 일이다. 다석에겐 이것이 최후의 심판의 모습이었다.

3.

이런 전제하에서 첫 시조를 한줄 한 줄 풀어냈다. ‘네 속 월마만치 치어노코 네 바람 월마만티 맞고 잡기’.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희망을 뜻하는 바람이다. 우리들 속을 깨끗하게 치(비)워 놓은 후에야 말씀에 대한 희망을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맛을 찾았던 인생이 뜻(말씀)을 찾고자 할 경우 자신을 깨끗하게 비울 책임이 있다.

‘내 실컷을 내어 궐고 내 꿈틀거림을 재놋는단 말가’. 여기서 다시 실컷이란 말이 나온다. 실컷은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 모습을 적시한다. 뭐든지 실컷 먹고 갖고 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像이다. 꿈틀거림은 꿈을 꾼다는 것으로 실컷을 위한 허욕이 생기(生起)하는 상태이다. 재놋다는 것은 차곡차곡 쌓아(쟁여)놓는다는 뜻이다. 실컷이란 허욕을 위해 망상을 쌓고 있는 인간에 대한 탄식이겠다. 하지만 실컷의 끝은 죽음일 뿐이다.

‘시픔아 네에민 시쁨 시름 손자 보더냐’. 시픔은 싶음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표현이다. 곧 욕망을 뜻한다. 마음이 흡족치 못한 상태, 곧 고픔과도 뜻이 같다. 네에민은 나의 어머니를 일컫는다. 시쁨은 씨를 갖는다, 씨를 품는다는 의미 일 것이다. 시름은 걱정이다. 이를 연결하면 실컷을 위한 욕망이 그 어미에게서 씨를 품어 걱정과 근심을 낳는다는 말이 되겠다.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시픔을 버리면 된다. 시픔이 잉태하여 시름을 낳기에 문제의 근원인 어미의 시쁨을 버리는 길 밖에 없다. ‘이날 이때것 조히조히 왓스니 조히조히 고 ᄆᆞᆸᄉᆞᆸ.(밑줄을 그은 것은 현재 웹페이지에서 아래아(ᆞ)를 표기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캡쳐한 후 그림으로 붙여넣기를 해도 표기되지 않아 이후에도 밑줄을 그어 표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지금까지 실컷을 몹쓸 말로 알고 성찰하며 감사한 삶을 살아 온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감사하는 다석의 고백이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하늘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한국말 고맙다에 그만하다란 뜻이 담겼다. 말로만 하는 고맙다를 그만하라는 뜻이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온전히(조히조히) 감사할 것을 주문한다. ‘여긔 이제것, 나, 남, 그. 저 조히조히 넘나든 ᄀᆞᆫ데’. 여긔란 여기, 이제는 지금이다.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시공간이 ‘지금 여기’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나’라는 존재는 없다. 이어이어 내려온 곳, 즉 하느님이 얼 줄(말씀)로 이어 준 곳이 여기이다. 이제는 영원한 현재이다.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나와 너, 그와 저 모두가 지금 여기서 가온찍기(ᄀᆞᆫ)를 해야 할 존재 들이다. 조히조히 넘나들려면 가온찍기를 해야 한다. 참 나를 찾는 일(제소리)이 바로 그 일이다.

‘거시키 꺼지기랄델 본 적 없셔 ᄒᆞ노라. 거시기란 여기서 실컷을 추구했던 삶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어느 순간을 막연히 일컫는다. 뭐라 딱하니 말하기 어려울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땅위에서의 삶이 튼튼, 탄탄하게 보일 지라도 그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실컷의 삶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 무의미해지고 지루해 지기 십상이다. 땅위에 있는 것만을 확실하다 믿고 사나 실상 그것은 꿈같은 것일 뿐이다. 땅의 삶이 탄탄, 튼튼하다하여 결코 없어지지 않을 어떤 것일 수 없다. 이제는 하늘을 못믿더워 하는 일이 그쳐져야만 할 것이다.

4.

두 번 째 시조의 제목은 ‘손 맞어 드림’이다. 두 손 모아 하늘에 기도한다는 뜻이겠다. 첫 줄부터 풀어본다. ‘ㅣ 나가 이마 이 이마 Y에 희마 이마 읗’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다. 다석의 풀이에 의지해 다시 읽어본다. 인간은 직립 이후로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은 짐승인데 두 손의 자유로움으로 두뇌를 발전시켜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두 손으로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다석은 두 손을 하늘 맞을 손, 기도할 손이라 여겼다.

주지하듯 다석은 삼재(三才)론을 중히 여겼다. 그중에서도 인간을 뜻하는 ‘ㅣ’가 가장 소중했다. 하늘 아래서 하늘 향해 우뚝 선 존재가 사람인 까닭이다. 하늘을 향해 나감에 있어 이마가 가장 앞선다. 그래서 다석은 이마를 임(하늘)을 맞이하는 곳이라 했다. 사람의 이마 위에 존재하는 분은 하느님뿐이다.

‘손수 나란 예수 예수 온갖 수수 이손 잇손’. 다석은 말을 겹쳐 써 말뜻을 깊게 했다. 보듯이 예수를 거듭 두 번 말했다. 다석의 예수풀이가 독특하다. ‘예’는 여기, ‘수’를 능력이라 했다. 하늘(하느님)이 이곳에 손수 내린 능력, 그것이 바로 예수이다. 그의 능력은 인간 숨이 끊어 질 그 순간까지 지속된다. 이것을 성령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지금도 계속하여 그의 능력이 지속된다. 그렇기에 ‘온갖 수수’란 말은 모든 능력이란 뜻이겠고 ‘이손 잇손’ 역시 지금도 계속해도 그 능력이 이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 능력을 이어 받았듯이 우리 역시도 예수를 통해 하늘 능력을 이은 존재가 되었다. 예수를 통해서 하늘과 관계 맺은 존재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우리에게 땅위에서 ‘실컷’은 사라져야 옳다. 맛을 찾지 않고 뜻을 구해 살 존재가 된 것이다.

‘손 맞어 드리올 디림 눈 맞혀 떨칠까?’ 예수로부터 이어진 능력(수)이 인간 손에 있다. 우리들 손에 예수를 통해 이어진 하늘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앞 절의 ‘잇손’이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그 손을 마주해서(合掌) 하느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칠 수 있다. 이 경우 내개 거짓은 철저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렇듯 깨끗해진 마음으로 우리 또한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이 역시 ‘실컷’을 깨트리는 일과 무관치 않다. 견물불가생(見物不可生)의 삶이 가능해 진 탓이다. 마지막으로 떨친다는 하느님께 졌다는 표시이다. 눈을 마주했기에 내가 더 이상 욕망의 존재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겠다.

‘고히고히 올나갈Y 고히고히 우리옐나’. 하늘을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위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간다. 이 과정에서 하느님을 거듭 우러러 볼 수밖에 없다. ‘우리옐나’가 바로 그 뜻이다. 여기에는 울면서 나아간다는 의미도 담겼다. 그를 주라 부르며 울부짖으며 나간다는 말이다. 땅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길은 고통이 수반되는 까닭이다.

‘조히조히 주금너메 조히조히 사르브름’. 앞의 두 문장은 줄 것 다 주고 생을 마감하라는 뜻이라 했다. 하늘로 오르려면 남겨 둘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돈, 명예 등 일체를 남기지 말라 했다. 요즘 회자되는 ‘순수증여’라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세상에서 얻은 것 세상에 돌려주고 조히조히 하늘로 오르라 했다. 죽음 이후의 생에서 부르는 소리를 다석은 ‘사리브름’이라 했다. 이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주고 세상을 떠나라 했다. 그것이 하늘로 오르는 길이다. 이 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이 된다.

‘비바람 빌고 바람에 말씀따름 그밧게’. 사람에겐 비바람 부는 궂은 날이 일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바람 일어나는 때가 비는 날이자 기도하는 순간이다. 비바람이 일상인 이유는 바라는 일을 늘상 하라는 말이겠다. 그래서 다석은 빌고 바라는 일을 일컬어 비바람이라 하였다. 한 얼 줄(經)인 하느님 말씀만을 따르는 그 일이 바로 기도의 요체이다. 세상에 다른 것을 따를 이유가 전혀 없다.

‘손 둘 더 나가 펼치면 주금에 느려질 손’. 두 손에 움켜쥔 것을 펼쳐 다 쏟고 나면 손은 자유롭다. 이런 손들마저 하나로 모아서 하늘에 바쳐야 한다. 하지만 손이 하늘 향해 모아지지 않고 세상에서 마구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제멋대로 손들이 설치고 있음을 본다. 하지만 그 손들은 죽어 느려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손을 늘어지게 말고 하늘 향해 모아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손 하나로 맞어 디리면 사리불 너 브를 손’. 빈손마저 모아 드리면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진다. 두 손 모은 마지막 길에 사리불(佛)이 새로운 배를 타도록 우리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믄지 그믐 보름의 조금사리 므르믈’. 캄캄한 그믐처럼 죽음에 드는 일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럴수록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죽어야 한다. 이를 공부하지 않으면 죽음은 그믐처럼 어둡고 컴컴할 뿐이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에서 밝은 보름을 만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죽음이란 배를 갈아 타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죽음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여기서 조금사리와 그믐사리를 좀 더 설명해야겠다. 해와 달이 나란히 서있는 그믐사리에 큰 밀물이 유입되듯 두 손이 마주할 때 큰 작용이 생기는 법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조금사리, 물이 가장 적게 들어오는 조금사리가 문제(므르믈)라 했다. 그것은 정신(말씀)이 결핍된 현실을 상징한다. 그래서 죽음과 같은 난제를 물어서 불려서 풀어내는(물/불/풀, ㅁ/ㅂ/ㅍ)것을 지혜롭다 하였다.

5.

다석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이 사는 일이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일인 까닭이다. 이를 위해 육체의 만족을 꾀하는 ‘실컷’의 삶을 그치고 한 얼 줄을 붙잡고 살아야만 한다. 실컷 따위를 땅에 묻고 성찰하며 살아가라고 했다. 그것이 조히조히의 삶이다. 한마디로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내려오란 말이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욕망지수가 가장 높다고 평가되는 이 땅 현실에서 이 보다 더 귀한 말씀이 없다. 한 얼 줄 붙잡고 조히조히 살다가 끝을 마주할 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다석의 첫 강에서 죽음을 대하는 삶의 지혜를 배웠다. 첫 강은 불교가 말한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의 다석 식(式)의 번역이라 할 것이다. 콩과 팥을 되는 되가 있듯이 우리들 정신적 삶을 재는 척도가 있을 것인바, 그것을 다석은 ‘실컷’을 버린 확고한 정신 상태라 하였다. 바로 여기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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