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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세대, 청년

기사승인 2018.09.23  21: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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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은 약자인가?

“평화교회연구소는 평화로운 세상, 올바른 믿음의 교회를 꿈꾸며 부흥과 성장보다 평화, 생명, 정의의 가치가 실현되는 21세기 새로운 한국교회를 상상합니다!” 모토 아래 건강한 한국교회를 상상하는 평화교회연구소가 매달 발행하는 “웹진 평:상”의 글들을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평화교회연구소 소장님과 연구소 소속 모든 연구원들과 웹진 기고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18년을 살고 있는 ‘청년’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다. N포-세대, 니트, 캥거루족 등, 무언가 찝찝하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 속뜻에는 ‘무기력’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한 마디로 ‘청년’은 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나설려는 포부 따위는 없다. 그리고 뭐하나 신박하거나 새로운 맛이 없고, 매가리 또한 없는 좀비처럼 취급한다. 불만, 불평의 좀비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누가 이렇게 명명한 것일까? 

위에서 말한 단어들은, 청년들이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수동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무기력’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N포세대’라는 단어만 살펴봐도 그렇다. 포기라는 단어자체가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사전적인 뜻은 “하던 일이나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다음사전)이다. 곧, 도중에 ‘포기’하는 이유들이 생겨난다.

청년들에게 ‘포기’할 이유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 사회가 ‘노답’ 더 나아가 ‘핵노답’라는 반증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거나 안주하기 위해서, ‘포기’하면 된다. 포기가 답인 것이다. 단군이래, 최대 스펙인 청년들이 험난한 사회생활, 헬조선을 ‘돌파’ 혹은 ‘돌격’이 아닌 선택된 ‘포기’는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더 이상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세상이다. 그래야 냉소된 디스토피아를 억지로 버티게 할 수 있다.

▲ 한겨레신문 2018년 3월20일자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34356.html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 처한 청년들이 이 시대의 약자로 불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약자로 보는게 당연하다. 인구통계를 살펴보면 20-29세가 약 680만 정도 약 13퍼센트이다. 30대 이상만을 봤을 때, 약 4200만 정도이고, 서울시 기준으로 청년을 20-39세로 봤을 때에도 약 3400만 명이다. 전체인구에 40대 이상이 약 67.5퍼센트나 된다. 반올림 한다고 하면, 6.5:1.5:1 비율인 셈이다. 인구 통계상으로 봤을 때에도, 소수이다.

만약, 정치 특별히 선거를 통해서 이 사회의 향방이 좌지우지할 기회가 주어졌을 경우에는, 청년들의 정책들은 고사하고,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하다. 복지정책에 관련해서도 ‘일자리’ 정책이 청년정책의 전부인 마냥, 언론과 정부에서 떠들어 대는데, 복지는 자고로 사회전반적인 부분을 다뤄야 한다. 요즘 여러 정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통 한시적인 복지일 뿐이며, 이마저도 ‘나의 불쌍함과 무능함’을 증명하는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변신하기에, 쉽사리 접근하기 힘들다. 불쌍함도 적자생존이 되어버린 아주 잔인한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예로부터, 청년은 정체성이었다. 정체성은 ‘나’를 설명하고, ‘나’의 존재를 발견시키는 기재였다. 정체성은 ‘청년’이 버틸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실패’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도구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청년들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청년시기는, 반드시 지나쳐야한다. 시기를 20-39세로 봤을 때, 20년이다. 20년이 엄청난 시간이기 때문이다. 좁게 봐도, 10년이다. 청년을 상태로, 빨리 지나쳐야할 시기로 본다면, 그야말로 멘붕이다. 버틸 재간이 없다.

상태로의 청년은 경쟁에 몰두하고, 자기계발에 치우치게 된다. 사회생활에 진입자체가 목표가 되고, 진입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소진되어 있기 마련이다. 경쟁에 온 힘을 쏟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리 만무하다. 그래서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다음 단계로 움직일 여력조차 생기지 않는다.

정체성이 단단하지 않다면, 딛고 있는 마음의 튼튼한 땅이 없기 때문에, 다시금 이직을 고민하던지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심각하면, 자기파괴 혹은 우울증을 겪게 된다. 신자유주의 이래로, 우리의 삶은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홀로 버티게 되고, 종국에는 회의주의 혹은 냉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조금의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다.

경쟁시스템의 공정만 철저하게 감시할 뿐이지, 사회적 포용, 배려는 불공정의 대표적인 이름이 된다. 내가 안 되면, 기필코 남 잘되는 꼴은 볼 수 없는 그런 냉정하고 고약한 사회가 되었다. 청년들은 경쟁에서 이기고, 서로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청년들은 불평등을 몸소 체감한다. 수저계급론이 그 중하나인데, 대한민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계급이 웬 말인가? 싶지만, 분명한 것은 소수 몇몇을 위한 사회임은 확실해 보인다. 나의 현재보다, 그 이상을 꿈꿀 수 없는 사회가 정상인가? 천국을 꿈꿀 수 없다면,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듯이,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계획하고 꿈꿀 수 없다면, 그곳은 바로 헬이다.

오늘날 청년으로서, 홀로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있을까? 살 수 있다. 그런데 생명을 연명하는 수준이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이제 GDP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시대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던져버렸다. 지금은 ‘행복지수’를 발표하는데, 높으면 높을수록 ‘사는 게 사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약자가 누군지 판단할 때, 죽지 못해 사는지, 행복해서 죽지 못해 사는지, 가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오늘만 사는 이들, 이는 영화 아저씨의 원빈 하나로 족하다. 우리(청년)들은 오늘만 살고 싶지 않다. 청년은 분명한 약자다.

남기평(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 / EYCK총무) peacechurch20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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