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판정에 대하여

기사승인 2018.09.15  21:51:20

공유
default_news_ad1

- 나의 길벗 임보라 목사를 생각하며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방어한다. 진리를 수호하고/지키고/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온갖 폭력과 만행이 저질러진다. 이 땅에서 저질러진 모든 최악의 폭력과 만행은 ‘진리의 이름으로’ 신(진리)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졌다.

이상하지 않은가? 신(神)이 보호받고, 진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 많은 폭도들(자칭 진리 수호자, 종교 수호자, 교권 수호자)을 동원해야만 하다니.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하나님, 절대자)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폭력을 낳는다. 그것은 자신들의 거짓 자아/거짓 진리/거짓 하나님(그들 자신만의 상대적 진리/우상)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폭력은 진리의 소산물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 즉 인간 에고(거짓 자아들)의 소산물이다.

이제껏 세계는 에고들의 전쟁터였다

나의 에고(거짓 자아)가 너의 에고(거짓 자아)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에고)의 거짓됨의 폭로’를 막아보려는 안간힘. 그것이 교권 다툼이요, 이단 척결이며 정의의 전쟁이었다. 그렇다. 세계는 이제껏 성전(聖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성전(聖戰)에는 늘 성전을 외치는 놈(聖殿主義者)들이 앞장서 왔다.

▲ 임보라 목사. 2017년8월 캐나다연합교회교단 WE연합교회 주일설교 장면. ⓒYoutube Capture

이 놈들의 역사(history)를 바꾸신 이가 있다. 어머니 교회를 통하여 그 놈들의 역사를 엄마들의 역사(herstory)로 바꾸신 이가 있다는 것이다. 너를 죽임으로 나(거짓 자아/거짓 진리)를 수호하려는 몸부림을 끝내고, ‘참 나’는 아버지/어머니(근원,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죽지 않음(죽을 수 없음)을 자기의 몸(삶과 존재)을 통하여 선언하고/증언하고/실현한 이가 있다. 2000년 전 갈릴리 땅에서 예수라고 불린 이가 바로 그이다.

그는 이것을 강단에서 선포하거나 교회에서 실현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을 길 위에서 선언하고 가르쳤으며 길 위에서 증언하고 선포하였다. 그는 일생 머리 둘 곳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길 위에서 그것(진리의 진리 됨)을 실험(십자가)하고 실현(부활)하였다. 그것이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다.

진리를 위하여 ‘너’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어머니/아버지)를 위하여 역사의 제단에 ‘나’를 내어준 것이다. 그는 진리(하나님)를 위하여/진리(순명)에 의하여/진리(자기 몸)를 바쳤다. 그는 일찍이 그 자신이 ‘진리’라고 하였다. 그와 진리는 하나라는 말이다.

그런 그가 그를 바쳤다는 것은 곧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바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아들을 바친 것이며, 어머니 교회를 위하여 딸을 바친 것이다. 그는 역사의 길 위에서 참된 예배(산 제물)를 드린 것이다.

예수는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수호’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진리를 위하여 ‘진리(자기 몸/인생/길/생명)’를 바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역사의 길 위에서 하나님(진리/생명/삶)을 실현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말이 삶이 되고, 선포가 실현되고, 증언이 증언자가 된 것이다.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에 등극하였다.(빌립보서 2장 6절~11절)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판정을 축하함

나의 길벗 임보라 목사가 통합측 교권주의자들 자칭 진리 수호자들에 의하여 ‘이단성 판정(?)을 받았다 한다. 지난해부터 설왕설래 좌충우돌 갈팡질팡 중구난방 호들갑들 하다가 이제 비로소 정식으로 이단성 판정이 인준되었단다. 조금 우습지만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언감생심,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써 이만한 영광은 쉽지 않다.

물론 아직 김재준에 이르지 못하였고, 변선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이용도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물론 아직 김산에 이르지 못하였고, 이덕구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게바라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영광이 없다. 오늘 이 알량한 시대에 누가 이만한 영광에 이르고 있는가?

축하의 마음 담아 보태는 우스개 하나

“왜 사냐건 웃지요?” 라던가? 말이 되지 않을 땐 웃음이 최고. 그만 알고 나만 아는 썰렁 유머 하나 보태어 보자.

임보라! 그에게는 김재준만 있는 게 아니라 장준하도 있다. 기장이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장준하가 그의 우편에 있다면 그의 좌편에는 그만이 아는 또 다른 장준하 선생이 있다. “길벗 임보라 목사님! 이 모든 장준하가 그대를 보고 있습니다. 장하고도 자랑스럽게! 하니,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정작 두려운 것은 그들

“임보라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단 옹호 교단이 됨으로 신중히 처리해야 할 부분”이라며 “이번 결의는 ‘이단 결의’가 아니라 ‘이단성 결의’”란다. 끄트머리에 가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격이다. 전면전을 피하자는 모양새다.

하긴 기장의 원괴(원본 괴수)인 장공 김재준 선생님을 이단 판정하여 한국 장로교를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서는 60여 년이 지난 2016년 슬그머니 ‘장공의 제명을 철회한다.’는 애매한 반쪽짜리 반성문을 제출한 마당에 또 다시 그의 제자를 이단이니 삼단이니 논하기가 조금은 버겁기도 했을 것이다. 내 스무 살 장신대 시절, 친구들이 종종 무슨 말끝에 반농삼아 “야! 그건 좀 이단적인 생각이 아니냐?”하고 물어 올 때에 껄껄대며 반진삼아 히죽대던 우스개 하나를 전하며 어줍잖은 나의 중얼거림을 마쳐야겠다.

“야! 쪽팔리게 이단이 뭐냐? 사이비는 초단이요, 초단 위에 이단이라. 이단 위엔 사단(사탄)이요 사단 위엔 육단(육탄)이다. 우리 주님은 그 모든 어덕서니 헛깨비들을 온 몸으로 십자가에서 끝장내신 육단(육탄)이 아니시냐? 그러니 쪽팔리게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살지 말고 기왕 하려거든 우리는 육탄(온몸/십자가)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냐?”

나의 길벗 임보라 목사님!

이 글을 읽으며 씨익 웃을 그대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나의 길벗 임보라 목사님! 우리 오직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임을 보라!” 외치는 임바라기로 살아 가십시다.

둥그런 보름달 떠오를 한가위가 다가오는군요. 님의 섬돌향린 고운 길벗들과 우리 장준하 선생님과 온 가족 위에도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대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 마음 모아 경배합니다. 

샬롬/샨티/나마스떼!

2018년 9월 13일, 남녘 땅 제주에서 얼간이 길벗 송영섭 드립니다.

송영섭 riversheart@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