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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회개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의 두 길

기사승인 2018.08.23  18: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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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4)

한국개신교 초대교인들 가운데 크게 두 개의 그룹이 있는데, 하나는 당시 사회적으로 차별과 억눌림을 받았던 상놈 계층과 여인들이었고, 다른 한 그룹은 평안도를 중심한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에 심취했던 道人들입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가난한 농부 출신으로 선교사 가정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김창식과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입니다.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길선주목사입니다. 전자나 후자는 다 같이 당시 사회의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후자는 특히 중국이 일본에 의해 패망하자 중국에 기초한 유불선도교를 포기하고 서양의 새로운 정신 기독교에 귀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들이 배움이 짧았던 사람들에 비해 후자들은 한문에 능통하였기에 교회 지도자로 설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영향력은 더 컸던 것입니다. 오늘날 남한교회가 치유와 방언 이적 신앙에 빠져 있고 무병장수에 기초한 삼박자 축복론과 산기도나 철야기도 방식을 통한 기복주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바로 도인 출신의 기독교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길선주 목사로 시작한 회개 각성운동

한국교회 사가들은 1907년을 한국교회의 대부흥시기라고 말합니다. 이는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이길함 선교사와 길선주목사의 죄책 고백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죄책 고백은 1907년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있어왔는데, 사경회 강사였던 길선주 목사의 고백으로 인해 봇물처럼 터진 것입니다.

그는 집회를 인도하던 도중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시는 장로의 신분이었습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 때문에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내 친구가 임종을 앞두고 저를 집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길 장로, 나는 이제 곧 죽을 몸이야. 자네가 내 집안 일을 맡아주게, 내 재산을 관리해주면 좋겠네. 아내는 무능하니 말일세.’ 저는 ‘걱정 말게 그렇게 하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저는 그의 부인의 재산을 관리했지만, 부인의 돈 100달러는 빼돌려 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가로 막았습니다. 내일 아침 100달러는 그 부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고백이 있고난 직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600여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집회를 계속하였는데, 그때 이 자리에서 본 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서로를 미워하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서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감동의 시간이 있었고 그리고 한 대학생 청년이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허락을 했는데, 이 청년은 이 때 기도 중 자신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고백하고 그가 가명을 쓰고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날 저녁 수백 명의 회중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강단으로 나오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한 주간의 사경회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주 장로라는 사람은 그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음과 교회 헌금을 횡령한 죄’를 고백하고는 ‘나 같은 무서운 죄인이 이전에 있었습니까?’ 외치면서 손으로 강대상을 힘껏 내리치고는 마루바닥에 쓰러져 통곡을 그칠 줄 몰랐고, 이때 교인 전체가 우는 통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 새뮤얼 마펫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 그레이엄 리 선교사(왼쪽 세 번째부터) 등이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 ⓒGetty Image

마지막 날 길선주 장로는 설교를 마치면서 이런 예화를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회중석으로 내려가 굵은 밧줄로 허리를 묶고 한쪽 끝은 자기가 잡고 다른 한쪽 끝은 다른 장로에게 붙잡도록 하고 나서 설교단에 있는 맥큔 선교사에게 자신을 오라고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설명하기를 죄에 묶인 죄인이 밧줄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몸부림을 치다가 마침내 허리에 묶인 밧줄을 풀고 강단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와 맥큔은 양팔을 벌려 서로 끌어안았습니다.

이 장면을 본 선교사의 보고 기록입니다.

“길씨가 밧줄을 풀려고 할 때 회중은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손이 풀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포옹했을 때 그 극적 효과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즉시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겠다고 외쳤고, 사람들은 울면서 너무나 괴로워서 몸부림치면서 바닥에 뒹굴었다.”

1907년 교회 각성운동에 대한 신학적 성찰

이런 회개운동은 잘못하면 지나친 감정주의로 말미암아 신비주의와 이단운동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기에 이를 반대하는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다소 있긴 있었으나 이 회개운동은 순식간에 평양 전역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서울과 원산을 비롯한 전국의 교회에로 번져나갔습니다. 이 회개운동은 당시 서울 연못골교회(연동교회)와 승동교회의 양반과 상놈이 자리를 구별하여 앉았던 반상의 차별을 없애는 효과도 가져왔습니다. 이런 일련의 부흥회 운동의 결과 1906년 교인수가 3만 7,400명에서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세 배가 되는 9만 4천 4백명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교회사가 이덕주는 이러한 평양 대부흥회 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양의 기독교가 우리의 종교로 한국인들의 심성과 공동체에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소리를 내어 집단으로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밤을 새워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한 기도였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보고서에서 ‘오백 명, 혹은 천 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모두 하느님을 향해 얼굴을 들고 하느님께 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장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말로 할 수 없는 은총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이덕주,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복음의 토착화”, 『각성, 갱신, 부흥‘영적대각성100주년 기념학술논문』[서울: 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2006])

캐나다 선교사 W. Scott은 이 배후에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절박한 상황이 있음을 말하는데, 우리가 당시의 통성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기에 이를 인용합니다.

“통성기도는 비록 소리의 바벨탑을 쌓는 측면이 있지만, 단체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속에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효과적이다. 본성적으로 자부심이 강하고 과묵한 사람들이라 이런 식이 아니고는 자기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내놓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어려운 현실이었기에 이들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체면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든 분명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절망과 좌절을 깨뜨리시고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영원한 안식으로 이들을 이끄셨다는 점이다.”

조선교회 선교 초기에 있어 집단적인 통성기도는 긍정의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분명히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기도였고, 자연스럽게 발생되고 마쳤던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점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통성기도와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요즘의 통성기도는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기도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이루어 달라고 하는 청원기도가 대부분이요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마쳐지는 기도가 아닌 목사의 지시에 따라 주여 주여!를 큰소리로 삼창함으로 시작하고 몇 분이 지나면 종소리에 맞춰 일시에 마치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기도운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이 주도하는 자연스러움보다는 상관의 지시에 따른 군대식 통솔이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의 통성기도는 오래전 스콧 선교사가 말한 대로 ‘소리의 바벨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당시는 이러한 통성기도가 교회를 새롭게 하고 부흥시키는 작용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 개신교는 시끄러운 교회라는 인식을 갖고 있고 교회 근처의 집값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907년 대각성 운동의 한계와 그 결과

통성기도는 분명 가톨릭의 은밀한 고해성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집단적이고 공개적인 죄의 고백이었고 이는 개인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변화의 힘은 개인의 영역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1907년은 군사권과 외교권을 상실한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강제합병을 눈앞에 둔 천년 왕조 역사에 뿌리 내린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 완전히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회개운동이 ‘개인의 회개’를 넘어서서 ‘나라의 회개’ 곧 민족이 제대로 서지 못했음을 통감하고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독립운동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일정부간의 합의로 인해 일제와의 마찰을 원치 않았던 서양선교사들의 정치적 입장과, 길선주목사를 비롯한 도인출신 교회지도자들의 탈사회 타계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회개를 통한 각성이 개인의 윤리나 도덕생활에 한정될 때, 이는 예수 당시의 유대율법주의가 가졌던 문자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탈현실이라는 잘못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까만 연기로 자욱한데 혼자서 마스크를 낀다고 해서 코의 그을림을 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개인 구원을 넘어 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란 곧 이웃 사랑이요 이 이웃 사랑이란 곧 나라사랑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교회는 이러한 회개각성운동을 통해 상당한 부흥을 하였으면서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국비가 일인 깡패들의 칼날에 살해당하고 끝내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에도 교회는 정치에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결국 조선합병에 동조했던 미국 선교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교회 또한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당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천년 전 로마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율법과 제사 중심의 유대교가 보여주었던 잘못을 110년 전 조선의 교회가 이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그래 안창호 선생은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의 잘못이 잘못을 범하는 자보다 더 큰 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일에 그 한계는 분명했지만,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 신앙으로 맞선 많은 신앙인들 또한 많았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을 비롯하여 직접 총칼을 들었던 안중근, 이봉창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도산 안창호는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로서 흥사단, 국민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말년에 윤봉길 의사의 상해 폭탄 사건과 동우회 사건으로 5년간 옥살이를 하던 중 1938년 60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분으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의 시신은 현재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에 아내와 더불어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봉건사회를 개혁하고 독립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힘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그 힘이란 개인의 도덕성에 기초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민족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며 덕·체·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의 전도 대업(前途大業)의 기초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래 그의 주장을 당시의 무력투쟁론이나 국제외교론과 구별하여 민족개조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을 서고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는데, 탁월한 웅변 실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습니다. 그의 강연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조만식 장로와 여운형·여운홍 형제가 유명합니다.

그러면 그의 민족 사랑의 깨달음과 신념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그것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구세학당과 정동학당에서 배운 기독교의 가치관과 예수 신앙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구세학당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모습과 정동학당에서 전도하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전도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열심히 있었던지 당시 발행된 신문에 리석관이라는 하는 선비가 그 이전에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다가 안창호라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교육과 전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이 학교를 세웠다는 얘기는 자주 들어보셨지만, 교회를 세워 전도하고 설교하였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신 분도 많을 것입니다.

소설가 주요한 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흥사단을 창립하고 규칙을 정할 때에 문답식과 입단식, 서약례 등을 행하게 하고 모일 때에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기독교의 의식에서 본뜬 것이 분명하다. 도산이 사랑의 세계를 말하고 자유 인권을 존중하며 동포간의 무저항주의를 주장한 것 등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140쪽)

안창호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을 섰습니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이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활동하던 당시 모습. ⓒGetty Image

한때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본받아 만주에서 이상촌 건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물거품이 되었을 때, 무력급진파들이 당장 싸울 인력이 필요한데 교육과 전도가 무슨 말이냐며 반대하였으나, 그는 긴 미래를 내다보며 학교와 교회를 통한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비전과 노력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가르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흔히 인물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듣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는 이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가?”

전영택 목사의 증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가끔 빠이불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오’라는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옳은 일에, 가령 말하면 약자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그것을 돕고 구하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용기있게 나서야한다는 말입니다. 옳은 일에 나설 용기가 없는 자는 사나이라고 할 수 없소. 우리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이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합니다.”

도산은 예수의 말씀과 성서를 통한 민족의 독립운동을 펼쳐갔던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면 분명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같은 잘못이 반복되는 습관적인 회개 고백은 오히려 사람을 위선자로 만들어가기에 차라리 아니함만 못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회개를 지양하고 행동이 동반하는 회개를 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먼저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래 오죽하면 예수님도 과장법을 써서 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가 하며 책망하셨습니다.

도산은 백성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서로를 비난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다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요라고만 하고 가만 앉아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일개인 탓도 아니오, 일본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니 나라의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힘을 먼저 키우십시다.”

또 도산은 조선 당쟁의 역사를 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설파하였습니다.

“내게 한 옳음이 있으면 남에게도 한 옳음이 있는 것을 인정하여서 남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 해서 그를 미워하는 편협한 일을 아니하면 세상에는 화평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아량이 없고 오직 저만이 옳다 하므로 그 혹독한 당쟁이 생긴 것이다. 나도 잘못할 수 있는 동시에 남도 옳을 수 있는 것이어든 내 뜻과 같지 않다 해서, 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해서 멸족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 소위 사화(士禍)이었으니 이 악습이 지금까지도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비록 의견은 서로서로 다르더라도 전 민족의 운명이 달린 일에 대하여서는 혼연히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도산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죽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고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일경이 자신을 붙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동네의 한 어린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갔던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예기입니다.

도산은 1936년 10월 죽기 1년 반 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청년회 연합 집회에 강사로 서게 되었는데, 이날 소문을 듣고 모인 청중이 교회당 밖 뜰까지 가득차서 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는 이날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모세가 히브리 노예 백성을 이끌고 홍해바다를 건너 애굽으로부터 해방 받는 장면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장장 두 시간이 넘게 하늘뜻을 펼쳤는데,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애굽인들이 뒤쫓아 왔다. 파라오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모두 그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섰다. 야훼께서는 그들을 얽어 놓아 꼼짝도 못하게 하셨다. 야훼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셨다. 애굽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리 도로 덮이게 네 팔을 바다 위로 뻗쳐라. 모세는 팔을 바다 위로 뻗쳤다. 그들은 도망치려고 했으나 물결이 밀려오며 병거와 기병을 모두 삼켜 버렸다. 파라오의 군대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 사회의 주인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그 민족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감이 있는 이가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손님입니다......진정한 주인에게는 비관도 없고 낙관도 없고 제 일인 고로 오직 어찌하면 우리 민족 사회를 건질까하는 책임감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아 진정한 주인이 적다 싶으면 빨리 나부터 참 주인이 되도록 합시다.”

“나가자”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에 걸친 그의 하늘뜻펴기는 마침내 이렇게 마쳤습니다. 도산은 모든 회중에게 다 기립하기를 청하고 “나가자!”는 구호를 세 번 외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청중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참고서적

이만열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인터넷 <도산 안창호의 어록>

조헌정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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