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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반쪽만 있는 구원론을 말하지 않는다

기사승인 2018.07.14  2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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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에 집중해 왔다. 한국사회가 전태일 노동자의 죽음을 목격하였을 때 한국교회 안에서 사회선교의 과제가 비로소 쟁점으로 떠올랐다.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라는 두 가지 쟁점을 놓고 70년대에 격론이 벌이지기도 하였다.

반공주의를 내세웠던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개발독재의 정권에 협조하는 가운데 도시산업선교를 좌경용공 세력으로 단죄하며 사회선교를 정죄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교회세력의 확장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교리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영혼을 구원한다는 서구교회의 선교 관념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이식되어서 오래 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선교의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 실은 지금까지도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개인의 영혼구원을 선교의 목적으로 삼고 교세확장에 열중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빈부 격차의 해소, 인권의 옹호, 공권력의 남용 방지와 사회정의의 실현, 생명을 살리는 환경의 보호, 세계평화를 겨냥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과제, 등등 산적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회선교를 과제로 삼고 한국사회에 공헌해 왔다.

기독교의 선교를 둘러싼 이러한 대립된 인식은 조화를 이끌어내는 대화의 장으로 나아와서 바른 선교의 신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바른 선교의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면 그 과제를 성서에서 다시 살펴보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영혼은 무엇이며, 성서가 제시하는 구원은 무엇인가? 성서의 구원을 위한 교회의 선교는 어떠한 지침 위에서 진행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상반된 선교의 쟁점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救援)’은 한자로 救援이라 쓰고 히브리어로  יְשׁוּעָה <여슈아>이다. 구원은 성서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핵심어이다. 성서의 역사를 ‘구원사’라고도 부를 만큼 ‘구원’은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의 이름도 ‘구원’이란 뜻이다.

성서의 ‘구원’ 개념은 무엇인가? ‘구원하다’란 히브리어 동사는 <야샤 יָשַׁע>이다. 이 동사는 ‘구원하다/구출하다/승리를 안겨주다/돕다/복수하다/보존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그 아랍어 어원은 ‘넓히다/넉넉하게 하다’란 뜻인데, 그 반대말 <사라르>는 ‘좁다/제한되다/억압하다’란 뜻이다. 넓힌다는 것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누리는 자유를 의미하며 행동과 사상에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의 향유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성경에 동사 <야샤 יָשַׁע>와 그 파생어들은 353회 언급된다.

▲ 이탈리아 화가 아그놀로 브론치노(Agnolo Bronzino)의 작품 ‘홍해의 기적’

이 동사의 빈도수를 살펴보자. 토라에 5회, 너비임에는 137회(여호수아서 2회, 사사기 18회, 사무엘-열왕기 32회, 이사야서 25회, 예레미야서 17회, 에스겔서 3회, 열두소예언서 15회), 커투빔에 89회(시편 72회, 욥기 6회, 잠언 2회, 역대기 8회, 느헤미야 1회) 언급된다.

명사 <여슈아יְשׁוּעָה>는 히브리어 성경에 77회 언급된다. 빈도수는 토라에 4회, 너비임에 24회(신명기역사서 4회, 이사야서 18회, 열두소예언서 2회), 커투빔에 48회(욥기 2회, 시편 48회, 역대기 2회)로 나타난다. 이상하게도 성서의 중심이 되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명사의 빈도수가 그리 많지 않다.

명사와 동사의 빈도수를 종합해 보면 이상한 점이 두드러진다. 명사와 동사가 모두 시편과 이사야서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점도 이상하지만 성서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부분인 토라(오경)에는 그 빈도수가 도합 9회로서 너무나 낮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상하다. 토라에서 명사는 4회(창49:18; 출14:3; 15:2; 신32:15), 동사는 5회 나올 뿐이다(출2:17; 14:30; 민10:9; 신20:4; 33:29).

토라에 언급된 문맥에서 구원은 모두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에서 ‘구원’의 바탕이 되는 기본 개념은 사회적 구원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단어의 실제적인 용례를 살펴보자. 개념을 분명하게 잡아 내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일일이 찾아 보아야 한다.

개인과 개인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서 침략한 지배자를 물리치고 독립하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사람을 ‘구원자/구주’라고 부른다. 여호수아란 이름이 ‘구원자’란 뜻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자들의 억압으로부터 건져낸 구원자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구원자’로 고백되고 있으며 시편에도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시68:19~21). ‘구원자’가 사람인 경우조차도 그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힘을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된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구원 개념은 대부분 원수의 억압과 같은 사회적 고통이나 자연재해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실적인 사회구원의 관념이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케류그마가 신약성서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억압과 헤롯체제와 예루살렘성전의 지배체제라는 이중삼중의 사회적 수탈구조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구원 개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고 이로써 사탄이 쳐놓은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신약성서에서의 구원은 사탄 또는 마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는 신화적이고도 영적인 의미를 품게 되었다.

구원의 영적인 해석은 신약성서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서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방인의 지배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할 때 야훼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얻고 비로소 자유를 회복한다. 이 때 그 공로는 야훼께 온전히 돌려야 하는데 이것을 성서신학자들은 ‘헤렘 법’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등 모든 이득을 야훼께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삼상17:47).

억압자를 물리치지 못하고 후퇴할 때에는 야훼께서 나서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시62:7). 이 때 야훼는 구원의 방패(시18:35), 투구(사59:17), 갑옷(사61:10)으로 고백된다. 그렇다면 구원은 승리할 때나 패배할 때에나 언제나 주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로 귀결하며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으로 터져 나온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의 영성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패배가 없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도성이 ‘구원자’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안심이 된다(사60:18). 이러한 고백에서 구원의 영적인 의미가 조금씩 발전해 나온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희생제물로 죽으심으로써 모든 죄인을 구원하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그렇기에 죽음의 저주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이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사회악의 실체인 로마제국을 물리친 것은 아니었다. 야훼께서 애굽제국의 억압을 물리치셨고, 다윗왕조의 타락한 우상숭배 왕권을 물리쳤으며, 바빌론제국의 억압도 물리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사회구원의 사상이 구약성서의 신학이지만 신약성서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구원 사상이 개진되어 있다.

로마제국의 억압을 물리치지 않으신 채 자신의 독생자 예수로 하여금 고난을 감내하게 함으로써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기존의 어떠한 종교에서도 없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이나 노예, 남자나 여자를 포함하여 만민이 차별 없이 동일하게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신비한 구원관은 믿는 자에게 깊은 묵상을 요구하며 세심한 성서독서를 요청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구원의 고백이 지닌 깊은 신약성서의 영성 때문에 구원을 지나치게 영적인 의미로만 이해할 때 그것이 성서 전체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사회구원의 역사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영혼구원만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신비주의의 종교성에 빠져 잘못되기 십상이다. 이 점을 방지하고 교회로 하여금 역사성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구원관을 고백하는 길은 신구약 성경 전권을 통일성 있게 독서해야 한다. 올바른 구원관을 견지하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사회적 구원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원초적인 구원 개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인간을 살리는 참된 구원의 바탕에는 모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현실적인 구원이 기저에 깔려 있다.

그렇다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이분법을 낳은 서구신학의 구조 안에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헬레니즘에 널리 유포되었던 영과 육의 이분법이다. 성서에 나타난 ‘영혼’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짚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이제 제기된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시편의 할렐루야 찬양시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란 노랫말이 반복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영혼’이란 용어가 매우 자주 언급되는데 그 원어는 히브리어 <네페쉬 נֶפֶשׁ>이다. 이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개역이나 새번역은 ‘영혼’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공동번역은 종종 ‘마음’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시146:1). 이 단어는 또한 ‘생명’이라고 옮기기도 하고 ‘생물’이라고 할 때의 ‘물(物)’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우리말 역본은 이처럼 다양하게 번역했지만 영역본들은 대체로 soul이라 통일하여 옮기고 있다.

우리말 ‘영혼’은 한자로 靈魂인데 이것은 영(靈)과 혼백(魂魄)의 두 가지 개념을 융합한 용어이다. 우리말에서 실제로는 영과 혼백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개인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영원한 존재로서 감각과 인식작용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독립된 실체를 ‘영혼’이라고 간주한다. 넓은 의미에서 영혼의 동의어는 넋·혼·영·혼령·혼백 등 다양하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관념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사령(死靈)과 생령(生靈)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대부분의 원시종교에서 사령은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으로 가는 영을 말하고,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속에 깃들여 있는 영혼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망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려고 굿을 하는 무속의 제의에서 볼 수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영혼이 육신을 떠나 떠돌아다니다가 꿈으로 나타나거나 다른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중병이나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의식이 흐려지면서 유체이탈이 되기도 한다고 믿는다.

사령은 조령(祖靈)과 원귀(寃鬼)로 구분된다. 조령은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저승으로 편안히 들어간 영혼으로서 선령(善靈)이 되는 반면에, 원귀는 생전에 한이 많아 저승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악령이 된다. 일반적으로 선령은 3년 탈상으로써 저승에 안전하게 들어가지만 원귀는 3년이 지나도 저승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악령의 원한을 풀어서 저승으로 천도하는 ‘진오기’, ‘오구굿’, ‘씻김굿’ 같은 무속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관념을 지닌 ‘영혼’이란 단어를 우리말 성경은 히브리어 <네페쉬 נֶפֶשׁ>의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네페쉬>는 우리말 영혼과 사뭇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다. <네페쉬>는 동물의 생명 그 자체를 가리키며(창1:20, 21, 24), 동물의 피 속에도 들어있다(창9:5; 레17:11). 창세기 1장에 ‘생물’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어로는 <네페쉭하야 נֶפֶשׁ חַיָּה>이다. 살아있는 네페쉬가 생물이다. 사람도 <네페쉭하야>로 창조되었다고 창2:7에 기록되어 있는데 한글개역은 ‘생령’, 새번역과 카톨릭역은 ‘생명체’, 공동번역은 의역하여 ‘숨을 쉬게 되었다’라고 옮겼다.

본디 <네페쉬 נֶפֶשׁ>는 목이나 목구멍을 가리키는 명사였다. 목구멍에는 숨이 들락날락하는 통로가 있다. 사람의 목구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숨’(נְשָׁמָה 너샤마)이 들락거린다(창2:7). 우리말 역본들에서 창2:7의 <너샤마 נְשָׁמָה>를 개역은 ‘생기’, 새번역은 ‘생명의 기운’, 공동역은 ‘입김’, 카톨릭역은 ‘생명의 숨’이라고 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숨이 사람의 목구멍에 들락거리는 동안 그 사람은 살아있는 <네페쉬>가 된다.

이러한 창세기의 인간론은 우리말의 ‘영혼’이란 개념과 매우 다르다. 구약성서의 <네페쉬 נֶפֶשׁ>는 한 개별적인 존재자 자체를 가리킨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찬양은 찬양자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온 존재를 바쳐서 찬양한다는 뜻이다. 유체이탈 현상처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는 이원론적인 인식은 히브리어 <네페쉬 נֶפֶשׁ>에는 찾아 볼 수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영혼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존속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인식은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통한다. 그러나 성경은 <네페쉬 נֶפֶשׁ>가 육체와 분리된 것이 아니고 육체와 일체화된 생명체임을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성령과의 합일을 가르쳤을 뿐 개별자의 영혼이 영속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바울은 헬라세계에는 매우 낯선 히브리어 성경의 <네페쉬 נֶפֶשׁ> 관념을 헬레니즘의 시대에 설명하고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그리스어 성경 LXX는 <네페쉬 נֶפֶשׁ>의 번역어로 그리스어 <프쉬케 ψυχή>를 사용했다.

그리스어 <프쉬케 ψυχή>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불멸하는 영혼으로 이해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영혼불멸사상이 후대에 전개된 포스트 플라톤주의에 의해서 정교하게 발전하였는데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신앙으로 채용하였다. 이로써 중세기독교에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관이 기독교 세계관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나란히 다니엘서의 문시문학에서 표현하는 육체의 부활이라는 관념도 없어지지 않고 병존해 왔다.

교회에서 일반화된 영혼 관념의 정체

현대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성령과 교호하는 영혼의 활동을 강조하여 영혼불멸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에는 없으며 헬라철학에서 따온 것이다. 영혼불멸 사상은 힌두교에도 있다. 인도에 이주한 아리아인들은 이미 육체와 독립된 영혼의 존재를 믿었으며 죽음 이후에 존속하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나중에 발달한 업(業, karma)의 사상이 이 믿음에서 펼쳐져 윤회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의 영혼불멸설을 부정하였다. 불교는 무아설(無我說)로써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인간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이 화합한 존재이며 영혼은 없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사자공양(死者供養)이나 정토신앙 같은 분파에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한국불교는 민속종교를 흡수하면서 영혼신앙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한국기독교는 일반 대중의 샤머니즘 전통의 영혼관을 부정하지 않은 채 포스트-플라토니즘의 영향을 받은 서구신학의 영혼불멸 사상에 입각한 영혼관을 받아 들였다. 교회는 이러한 서구전통에 입각한 장례의 형식을 따름으로써 전통사회의 유가가 지켜온 장례문화와 크게 충돌하였다. 유교의 조상제례에 의하면 조상의 혼과 백이 정성스레 드리는 제상에 오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장례예식에서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가 죽어서 그의 영혼은 천국으로 영접되며 그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신앙은 성경에는 없다. 한국교회에서 서구교회의 영혼불멸신앙이 서구교회의 토착화 과정에서 민간의 영혼 사상과 기묘하게 결합하였다.

영혼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영혼구원관은 성경의 구원관은 사뭇 다르게 발전하였다. ‘영혼’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성경의 <네페쉬 נֶפֶשׁ>란 단어는 생명체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임은 위에서 살펴보았다. 성경의 구원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구원, 다시 말하자면 전인간의 구원이 성경의 구원이다.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창3:19의 말씀은 영과 육을 이원론으로 분리하는 관념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죄인에게 퍼부어진 저주가 죽음인데 네페쉬를 상실한 죄인의 죽음을 경고한 창2:17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선언이다. 인간의 육체는 흙이지만 그 속에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있어 인간 존재는 <네페쉭하야 נֶפֶשׁ חַיָּה >가 되었다.

구원은 <네페쉬 נֶפֶשׁ>의 구원, 곧 인간 전존재의 구원이다. 이 속에는 사회의 구원도 송두리째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교신학에서 영혼구원이나 사회구원을 별개의 것으로 따로 다룰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아예 없다.

이영재 rheeyjae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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