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NCC를 힘차게 세워나가야 하는 이유
구약성서가 없이는 신약성서를 이해할 수가 없고, 신약성서가 없이는 구약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이러한 해석학의 명제는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기독교의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용어들과 그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구약성서에 나타난 그 용어들의 개념과 용례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의 사상에 끼친 고대제국의 종교문헌과 헬레니즘의 영향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그 영향의 방향성과 상호대화성을 제대로 이해를 해야 비로소 성서해석이 가능성이 열린다. 신약성서가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헬레니즘의 사상계 속에서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증언하려고 했던 기독론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오늘날 현대인에게 그리스도를 비로소 전할 수가 있다.
이 모든 해석의 과정을 생략해 버린 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이다. 현대인의 세계관에 속한 해석자가 자신의 관념으로 성서의 구절을 제 입맛대로 골라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는 일은 성서를 죽이고 자신의 종교적 야욕을 채우는 악행이 된다. 이런 자들이 성서를 모두 인간의 종교적 여망에 종속시키며 인간을 하나님 보다 더 앞세우는 오류를 범한다.
성서문자주의 내지 축자영감절이 바로 그 오류이다. 이런 경향성에서 저마다 성서를 영적으로 해석한다는 전통을 지니고 보수정통을 표방하고 있다. 이들이 한기총을 결성하여 에큐메니즘을 호도하며 평신도들에게 악선전을 퍼뜨린다. WCC와 NCC를 이단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으로써 신통한 자들이 시대마다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흑역사를 기독교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대형교회를 이루고 신자들을 미혹하며 교주가 되거나, 교주가 못되면 교주를 닮은 유사교수형적 목회자가 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성서해석으로 혹세무민하는 설교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반인의 종교적 심성을 볼모로 잡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전하면서 성경의 문자를 믿게 하고 그 문자를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여 교리의 도움을 받아 설교하는 카리스마틱스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 적폐 중에 적폐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만든 교리적 전제를 가지고 일체의 대화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신의 뜻이라고 일방으로 선언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을 배타하고 심지어는 사탄으로 몰아세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을 가리켜 신학은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 지역NCC 재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에큐메니안 |
촛불정국 이후 국민이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운 이후 벌써 2년이 지났다. 지금은 각계 각층에서 국민이 스스로 적폐를 발견하고 스스로 청산하는 일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노동계, 교육계, 문화계, 체육계, 시민운동계, 지방차치단체, 종교계, 등등 국민의 모든 분야에서 적폐청산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각계 각층에서 스스로 깨어있는 동량들이 나서서 국민의 삶을 어둡게 만들어왔던 적폐세력들을 발본색원하여 청산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 우리 기독교계도 무엇이 적폐인지를 확실하게 가려내고 규명하면서 각 교단과 NCC가 앞장 서서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먼저 반민주적 종교인사들을 가려내어 사회에 공개하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적시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먼저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역사의 평가라는 도마 위에 올라 서야 한다. 그들이 내세웠던 반공주의 노선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은 긴요하다. 그들이 세속사회의 상층인사들과 맺었던 은밀한 관계와 그들이 누렸던 권력과 부가 낳은 부조리가 그들의 교회에 무슨 악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동량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청산할 수 있어야 하다.
그 핵심에는 성서의 왜곡과 근본주의가 있다. 감리교의 권력을 잡고 양심적인 학자들을 억압하고 교단을 온통 근본주의와 반공노선을 이끌고 갔단 권세자들이 지금 이 시점에 지목되고 광장으로 끌어내어 모든 기독도들 앞에서 공개토론을 벌여야 한다. 교회는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아니기에 그들이 휘둘렀던 권력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선에 멈추고 나머지 심판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일이다.
기장도 마찬가지이며 예장통합측도 성공회도 구세군도 복음교회도 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청산의 기준으로 교권을 휘둘렀던 권력자들을 청산해 내야 한다. 더 명확하게는 순복음교회 교단이 저질렀던 조용기 목사의 흑역사에 대해서 사회를 향하여 공개사과를 할 것을 NCCK는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가장 심각하게 비평해야 할 사항은 목회자들의 타락이다. 목사들이 대형교회를 꿈꾸고 교회의 부흥을 통해 자신의 삶의 물적 기반을 확보하고 교권을 잡아보려는 권력지향적 속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수의 젊은 목사들이 이런 대형교회의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국의 번영에 기대어 권력을 누리고 물질을 향유하는 제사장 집단이 바로 바알 숭배자들이었으며 마르둑 신전의 제사장들이었기에 성서는 우상숭배를 배타하고 우상을 금지함으로써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한때 대구성서학당에서 성서비평을 제시하여 교회의 설교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그 비평은 지속되지 못했고 그 후 오히려 설교자의 비성서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또 한 가지, 목회자가 대형교회의 헛된 꿈을 지워버리고 교우가 100여 명 되는 작은 교회의 진실한 사랑을 꿈꾸며 청빈을 실천하는 개혁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자본주의적 물질숭배를 극복하는 성서의 영성을 연마하고 용맹정진하여 세속주의 우상숭배를 버려할 시점이 이르렀다. 언어학의 연구결과는 참조할 만하다. 한 개인이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원수의 한계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언어학자들의 이론이다. 한 개인은 50명 정도의 인맥을 진실하게 유지할 수 있으나 100명이 넘으면 그 진실한 관계는 희미해진다고 한다. 더구나 150명의 인간관계는 한 개인이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실한 목회자라고 자처하면서 200명 이상 내지는 500명의 교우들을 목양한다는 거짓말은 그만해야 한다. 심지어는 수천 내지 수만 명의 교우들을 목회한다고 하니 이는 거짓말 중에도 거짓말이다. 거짓말로 목회하는 한국교회에 좋은 열매가 맺힐 수는 없다.
대형교회가 아니라도 수백 명의 교회를 담임하지 못하여 애타는 목회자가 부지기수이다. 수 많은 중소형 교회의 목사들은 열등감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교인수가 100명이 채 넘지 못하거나 50명 정도 되는 규모의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는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작은교회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는 진실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것을 성령님께서 요구하신다. 이 점을 예민하게 깨닫고 있다면, 작은 규모에 대한 열등감이나 힘겨운 재정상황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이다. 작은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작은 규모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해야 한다. 적은 수의 성도들과 더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바로 이 소외된 사회의 대안이며 이 시대에 선포할 하나님나라의 내용이다. 참된 목회자는 진실한 사랑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할 것이며 물질에 구애 받지 말고 물질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굳센 신앙으로써 자유롭고 행복한 청빈의 삶을 구가해야 할 것이다.
우리시대의 기독교는 신학자들의 타락에 몸살을 앓고 있다. 강단신학자들이 타락하였다. 교권의 눈치를 보고 바른 소리를 외치지 않거나, 물질의 유혹에 빠져 교수라는 직책과 그 경제적 여유에 함몰되어 연구결과물을 교회에 내놓지 않고 있다. 신학교의 운영을 위하여 학생을 모집하는 일에 몰두하여 신학생들을 걸러내지 않고 마구 입학시키고 있다. 학교는 자생의 논리에 빠져서 세속주의로 넘어가버렸다. 잘못 입학한 신학생들 중에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목회자들이 생긴다. 소명감이 없이 학교를 졸업하여 대형교회의 꿈을 꾸다가 이윽고 한국교회에 세속주의를 전파하는 악한 일꾼들이 된다.
세속적 신학자 밑에서 세속적 신학생이 배출되며 이들이 독버섯처럼 한국교회를 더럽힌다. 이들은 신학의 부재로 인하여 사탄론을 강조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가상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불특정 군중집회의 파시즘적 성향을 부추기고 그것으로 대형교회를 이루려고 한다. 이것이 기독교 적폐의 본색이다.
마지막으로 청산할 적폐는 기독교 진보진영 안에 있다. 진보를 내세우며 일생 폼이 나는 권좌에 앉아서 진보의 이름으로 에큐메니칼 진영을 오염시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평생 활동하기는 하되 개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이 지금 노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권좌를 탐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민중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며 고난을 당하는 동안 마치 브로커처럼 정치가들과 민중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개인의 이득을 취해 왔다.
이들의 특징은 일생 진실한 마음으로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배를 키우지 않으니 에큐메니칼 진영의 인적 인프라는 구축되지 못했다. 운동한다면서 그것으로 이득을 취한 자들은 지금 자복하고 회개하며 모든 공적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자기가 후배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막 등장하고 있는 젊은 40~50대 활동가들에 모든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래야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미래가 있다. 얼마나 많은 기독활동가들이 명함 한 번 내 보지 못하고 사장되어 사라졌던가.
지금까지 논한 이러한 대원칙 위에서 지역의 적폐청산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NCCK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성령님은 각 지역에 지역NCC들을 세우고 계신다. 현장에서 목회하는 진실한 목회자들이 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기구주의 한계와 관료주의에 함몰된 NCCK는 스스로 적폐를 가려내고 뼈를 깎는 아픔으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케케묵은 교권주의자들을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지역NCC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소위 교단의 대형교회를 배경으로 물질과 권력을 등지고 NCCK 안에서 활약하는 자들이 있다면, 지역NCC의 작은 목회자들이 외치는 함성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곱 갈래 길로 도망을 쳐야 할 시점이 왔다.
역사는 냉엄하다. 힘겨운 민주화의 여정에서 요리조리 좋은 자리만 찾아서 누려온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다 지켜 보아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근본주의의 흑역사와 진보진영의 적폐는 말끔하게 청산해야 마땅하다. 이 일은 이제 지역NCC들이 자기 지역에서 감당해야할 몫이 아닐까 싶다.
이영재 rheeyjae20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