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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

기사승인 2018.07.01  22: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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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왕상 19:7-8)

‘혼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말이 없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혼자 무엇인가를 즐기는 사람들,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우스게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혼족의 가장 높은 경지는 고기집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먹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최근 나오는 뉴스를 보면 혼술 문화로 인해 술집들의 매상이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혼족이 늘어나는 이유는 사회적인 원인이 큽니다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여유를 즐기겠다는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혼족이 갖는 고독은 소외나 고립됨이나 외로움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자신만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 고독이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고독이기 때문입니다.

‘대지’의 작가 ‘펄 벅’은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라고 말하였고, ‘수상록’의 몽테뉴는 “고독한 생활의 목적이란, 보다 더 유유하게, 보다 더 마음대로 지낸다는 단 하나라고 믿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고독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게 됨을 말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에 따라 고독을 선택하였을 때에,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되고, 또한 그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실제로 혼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던가, 혼자서 공부를 한다던가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일부러 고독함을 선택해서 책이나 공부에 빠지게 됩니다.

선택하지 않은 고독

그런데 저는 혼족이라는 사회 현상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의 고독이, 이 시대의 혼족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그러한 삶을 선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혼자 밥 먹을 때가 있고, 혼자 무엇인가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그러한 일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고독을 택합니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기에 혼자 밥을 먹고, 같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기에 TV를 찾거나 혼자 영화를 보거나 혼자 술을 마십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 주변에 사람은 넘치고 넘칩니다. 친구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가족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대화를 나눠봤자 대화가 통하지 않고, 대화에서 재미를 느낄 수도 없고, 같이 밥을 먹으려고 해도 먹고 싶은 메뉴가 너무나 달라서 내 입맛을 버리고 맞춰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함께보다는 혼자를 택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잘못된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혼자된 이유는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혼자가 된 것이라고 말하며 위안을 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더욱 처절한 외로움 밖에 없습니다.

그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도 우리는 분명 자신을 만납니다. 내 안에 숨어있던 나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나’입니까? 오히려 부정적인 ‘나’, 나의 외로움을 더욱 깊게 만드는 ‘나’, 나 자신을 더 처절하게 만드는 ‘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혼자서 책을 읽어야겠다 하면서 책을 들고 카페에 나가서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려면 사람이 없는 공간, 그래서 조용한 공간이 좋을 텐데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갑니다. 약간의 소음은 집중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까요?

물론 개인적인 생각으로, 까뮈의 ‘이방인’을 읽을 때면, 창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지기에 카페 창가에 앉아서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의 책들을 읽을 때면 그런 경우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의 책들을 읽을 때는 역시 조용한 곳에서 편하게 앉아 읽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약간은 모순된 행동으로 보입니다만,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기 위해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엘리야의 고독

고독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시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은 큰 의미가 없겠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어느 때라도 선택하지 않은 고독에 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아합에게 가뭄을 예고했고 이스라엘에는 가뭄이 왔습니다. 그 상황에서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였고, 결국 엘리야가 승리하여 주변에 몰려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쳐서 죽였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는 아합 왕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는 기적적인 순간을 보냈습니다.

▲ Elijah Fed by an Angel, Ferdinand Bol, 1660~1663 ⓒGetty Image

그런데 그 이후, 비가 내린 이후 엘리야에게 남겨진 것은 아합의 아내 이세벨에 의해 내려진 사형 명령이었습니다. 이 순간 자신과 함께 바알 선지자를 죽였던 백성들은 없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기적을 보았던 아합 왕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과 사환 둘 뿐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남쪽 브엘세바로 도망치고 거기에 자신의 사환을 남겨둔 채로 광야로 도망칩니다. 열왕기상 19장 3절에 보면 엘리야는 분명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살기 위해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광야 깊은 곳으로 하룻길을 홀로 들어간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이런 간구를 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살기 위해서 도망쳤던 엘리야가 이제는 하나님께 죽음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홀로 된 상황 속에서, 고독 속에서 엘리야가 택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사가 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먹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명령에 엘리야는 천사가 준 떡과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을 자려고 눕습니다. 엘리야가 누웠다는 것은 잠자려고 누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또 천사가 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루만지면서 명령합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죽음을 선택했던 엘리야에게 내려진 것은 40일 광야길을 더 걸어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이었습니다.

붙들린 사람들

엘리야의 이야기, 로뎀나무에서 천사를 만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고, 은혜로운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로뎀나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가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그저 아름다운, 은혜로운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번 붙잡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잡혀있는 사람들은 죽고 싶은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진심에서 일어난 선택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결코 놓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라고 말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자에게 그 자유의지를 행할 기회도 주시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다시 일어날 힘을 줘버리십니다.

붙잡혔다는 표현은 열왕기에 나오는 표현은 아니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표현을 따온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오직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엘리야는 처음 천사가 나타났을 때, 처음 그를 어루만지며 먹을 것을 주었을 때에 ‘저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더 이상 저를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다시 누워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세우셨습니다. 엘리야가 선택한 죽음이, 그가 처해있는 고독이 결코 그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있던 엘리야는 결국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고독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붙드시는 힘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악한 백성들 가운데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 7000명을 남기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약속은 너를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함께 할 사람 7000을 남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떠한 고독 속에서도, 그 고독에 의한 잘못된 선택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잡힘 받은 사람이 받게 될 은혜입니다.

나가는 말

종교에 있어서 자신의 진정한 선택으로 고독에 빠지는 행위를 명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명상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깨달음과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옛날 수도사들이 선택했던 신앙행위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고독에 빠진다면, 외로움에 빠진다면, 소외감에 빠진다면, 그곳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만나게 되겠습니까? 결국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부정적 자아,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나의 목소리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여러분께서는 그러한 어떤 순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실 것입니다. 어쩌면 나의 생각에 너무 빠져서 그 손길을 외면하고 멀리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붙드신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택하지 않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힘들어 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가? 하나님은 나를 붙잡고 계신가? 하는 걱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속한 교회에서 최소한의 자리라도 지키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붙들린 분들입니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에, 외로움에 빠져들 때에, 나만 남겨졌다 느껴지실 때에, 나 혼자는 아무것도 할 없다고 느껴지실 때에,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떠올리시기 바라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명 엘리야와 같이 어떠한 힘든 일도 이겨내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나와 함께할 이들을 보내주시겠다, 남겨주겠다, 힘을 나눌 이들이 아직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실 줄 믿고,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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