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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 프로세스와 4.27 판문점 선언

기사승인 2018.05.25  2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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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통합학문연구의 시각에서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 결코 전쟁이 아니라 평화통일에의 길을 함께 가기로 합의한 남북정상은 이번 4.27 회담을 통해서 10.4 선언을 훨씬 뛰어넘는 여러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합의안들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서로 어떤 형태의 무력도 사용하지 않을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한 것이고, 단계적인 군축과 함께 특히 “올해”를 평화협정의 해로 전환하는 일, 그 일에서도 구체적으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협정 담당자들을 명시한 일, 가장 주목받는 일로서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써서 “핵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한 일 등을 말한다.

평화통일의 길은 결국 우리 믿음과 신뢰(信)를 실험하는
또 하나의 실험장이다

지난 10여 년간의 남북 단절의 시간 동안에 실질적인 핵보유국이 된 북한은 이번 선언문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허용하였고, 정상 간의 직통전화, 가을에 문재인 대통령 평양 초청 등을 단행하였다. 실로 엄청난 “신뢰”의 용기 있는 행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서 협상의 결과는 각자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서 반드시 이행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고,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해나가기로 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완전한 비핵화”라는 말과 관련해서 국내외적으로, 특히 오늘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생명줄을 쥐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일파만파의 응답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곧 다가올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 말에 대한 응답과 응전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다루어지는가에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이 크게 좌우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완전한”이라는 단어가 사실 매우 폭력적이고, 남성주의적이며, 생명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이 ‘완전한’ 이라는 단어는 사실 과연 북한이 진정으로 비핵화의 협상에 응할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그 일을 이루어낼 것인지, 다시 어떤 꼼수나 거짓을 숨기기 위한 위장의 말은 아닐지 등 수많은 의심과 의구심 때문에 나온 것일 터인데, 여기서 그러한 의심을 불식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차후의 비핵화 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더불어 또한 끝없는 ‘움직임’(易)과 ‘과정’으로서의 생명 현상과 실제 앞에서 이 ‘완전’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물음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의 여러 국제 관계들에서 이와 유사한 말들을 써오고, 또 상대방에게 그것을 요구해온 주체들은 주로 힘 있는 강대국의 당사자들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일본 강점 시기에 대한 배상과 관련한 1965년의 한일회담에서도 당시 보통의 한국 민중의 눈에는 그 회담이 전혀 정당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일본의 요구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단어를 써서 식민지 시절의 보상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한일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다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난 2015년 12월28일 박근혜 정부는 아베 정부와 더불어 그들의 주장으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타결되었다고 발표했었다.(각주 1)

오늘 한반도 평화의 핵심관건인 북미 정상회담(2018.6.12, 싱가포르)을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도 회담장소와 날짜 등의 발표가 자꾸 미루어진 것 등 “이상기류설”도 나돈다고 하고, 워싱턴 씽크 탱크에 지금까지 대북관계에서 매우 보수적이었던 존 볼턴이 합류하면서 “비핵화 과정을 잘게 쪼개지 않을 것이다”(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불충분한 합의는 수용할 수 없다”(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라는 말들이 최근 트럼프 핵심 참모들의 언술로 소개되는 것 등은 유사한 의구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각주 2)

이러한 언술들은 이번 북미협상의 파트너 북한에 대해서 ‘한번에’, ‘완전하게’, ‘불가역적으로’ 핵 폐기를 합의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단어들인데, 이 언어가 두 나라 사이의 협상과 합의에 말목을 잡지는 않을지 걱정인 것이다. 이미 이란과의 핵협정을 파기한 슈퍼파워 미국의 이와 같은 “완전하고(complete), 검증가능하며(verifiable), 불가역적인(irreversible) 비핵화(dismantlement)”(CVID)의 요구에 대해서 북한은 “단계적, 동시적 조처”를 제시했다면 두 당사자의 입장들이 기적처럼 잘 조율되기를 바랄뿐이다.

최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다시 만나고 온 김정은 위원장은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은 조선의 시종 하나같은 명확한 입장”이라고 확인하며 4.27 판문점 선언에서도 명시한 대로 자신들의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의심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완전한 비핵화’는 미국의 체제안전보장(적대정책과 안보위협 해소)과 동시에 “등가 교환”의 대상이라는 것과 ‘완전한 핵폐기 이전에 보상은 없다’는 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대해서 먼저 “대화를 통한 상호 신뢰”를 강조하며 앞서 자신들이 취한 핵․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지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공개에 이어서 미국인 억류자 석방으로 응답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북미 양국이 흔들리지 않고 상호 신뢰 프로세스를 견지해서 우선은 6.12 정상회담에 이르고, 거기서 상호 합의를 도출해 내고, 그 후 도출해 낸 합의안을 서로 간에 더욱 긴밀하고 실질적인 대화와 협의를 통해서 실제로 이행하고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곧 한반도의 비핵화가 하나의 ‘과정’(process)이라는 것과 상대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성취시킬 수 없는 인내의 실험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인 것을 말해 준다. 그 일은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상호주의의 자세로 임하는 동시에 고도의 긴장과 용기, 사려와 숙고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약자와 여성의 인식론적 강점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인류 화합의 사회를 위해서 더욱 허락하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 길에서의 비핵화를 위해서 남북과 북미뿐 아니라 주변 이웃들은 어느 정도의 신뢰와 믿음으로 함께 할 수 있을까?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예전부터 인류의 삶에서 믿음과 신뢰, 상상과 용기의 도약은 주로 약자와 여성, 새로 온 자, 가난한 변방의 소수자들의 것이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그들은 비록 어려움이 많고 갈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특유의 직관력과 판단력으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 길을 찾아내곤 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렇게 주변인과 약자와 소수자의 믿음에 찬 행위로 다시 새로워지며, 거기서부터 생명과 안정과 번영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곤 했다. 오늘 남북 정상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졌고, 판문점 선언과 북미회담을 앞두게 된 것도 당시 소수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금기를 깨는 용기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향한 굳은 믿음과 과감성이 귀중한 토대가 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인식력과 인내력, 실행력은 그러나 결코 허공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수천 년의 시간들을 어려운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도 믿음과 용기로 견디어 왔고, 그래서 오늘이 있고 동북아의 현실이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오늘 이러한 한민족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섣부른 판단과 오만한 결정으로 한반도가 다시 큰 위험에 빠지고, 그와 더불어 全 동북아, 인류 평화가 위기에 빠지는 일이 없기는 간절히 바란다.

일찍이 항일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민재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1948년 당시에도 동아시아에서의 조선의 역할과 공헌에 대해서 말하기를, 조선이 비록 수천 년에 걸쳐서 약소민족이었다 해도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어떻게 “주변 민족에게 거대한 방파제가 되고 성벽 노릇”을 해 왔는지를 기억하라고 촉구한다. 즉 만약 조선이 없었다면 일본은 예들 들어 거란, 여진에 이어 13세기 몽고 백년의 대침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겠으며, 또한 중국은 16세기의 일본 임진왜란의 대사변에서 대륙 북침군을 어떻게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은 조선이 중간에 위치하여서 온갖 고통과 고난으로 두 나라에 대해서 서로 방파제 역할을 해준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이 “결코 열약하고 비굴한 멸시받을 민족이 아니어서 세계에도 드문 반격 역량이 왕성한 독립 정신”이 강한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촉구한다.(각주 3)

그래서 만약 이 한반도가 독립을 잃어버리면 동아시아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물론 세계의 평화가 깨지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 문제 또는 조선인의 분노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 열국이 알아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면서 “조선의 청년들은 모두 이 자부와 긍지를 가져라!”고 일갈했는데,(각주 4) 이 글이 쓰인 시간이 1948년 해방이후 아직 남북의 동족상잔이 일어나기 전 어떻게든 화합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인데, 지금 그 당시와 유사한 위기의 때를 맞이해서 이 글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한반도의 삶이 오늘에 있기까지 그렇게 오랜 인내와 고난의 시간들을 견디어 오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는 지구 인류가 지금까지 실험해온 핵심적인 종교 전통들을 두루 함께 수행해왔고, 그것들을 통해서 겨레의 믿음과 상상이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그 한민족의 사람들 중에서 약자 중의 약자인 여성들이 주로 그 믿음과 상상과 인내의 담지자들이었고 수행자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여성들의 시각과 역할이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 더욱 더 과감하게 수용되고 경청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의 일에서는 특히 자기헌신과 지속력, 판단의 순발력과 유연성이 매우 긴요하다.

또한 여성들은, 오늘 가장 강한 나라 미국의 대통령과 무수한 남성들이 하는 것처럼 익명성 속에 빠질까봐 벌벌 떨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내어주며 삶을 위해서 모험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각주 5) 나는 오늘 그런 모습을 문재인 대통령에게서도 한편으로 보고, 그 옆의 김정숙 여사, 가장 약자인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과 리설주 여사 등에서도 본다.

우리가 가졌던 과거는 상처와 아픔의 과거일 수 있지만 그러나 과거가 없는 사람과 민족은 깊이가 없고, 온 마음으로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과거를 풍성히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서 ‘뜻’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뜻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절제하고 신중하게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삶에서 결코 몸과 마음, 개인과 나라, 민족과 세계, 여성과 남성 등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고 불이적(不二的)으로 함께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절대적으로’라는 언술들을 쓰지 않는다. 특히 여성들이 체화한 이러한 통합적인 안목과 역량들이 한반도 통일과 평화의 일에서 더욱 쓰이고 발휘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무리 하는 말 - 인류의 큰 화합(大同)의 길을 위해서

동아시아의 고전 『역경』은 나라에 천둥과 번개의 큰 진동으로 새로움을 가져오는 대통령을 의미하는 ‘진’(震)괘에서 밝히기를, ‘계속 몰려오는 어려움과 위기 앞에서 비록 충분히 강한 자로서 대통령의 지위에 앉지 않았다 해도(六五) 그 이어지는 진동과 위기 앞에서 깊이 사려하고 숙고하여 中을 잃지 않는다면 하는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六五 震往來厲億 无喪有事)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中이 항상 正보다 중요한데, 中하면 正에서 떠나지 않지만 正은 반드시 中하지는 못하다.”(中常重於正也 蓋中則不違於正 正不必中也)라는 지혜를 알려주었다.(각주 6) 나는 이 고전의 지혜를 오늘 문재인 대통령 또는 김정은 위원장의 경우에도 잘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여긴다.

비록 그들이 약자로서, 약소국의 대통령으로서, 또는 그들 주변에 그렇게 도와주는 나라가 많다거나 자국 내에서의 상황도 비판자와 반대자들로 인해서 녹록치 않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말고, 깊은 사려와 배려, 숙고를 통해서 급한 마음과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루려는 조급함에 끌리지 않고 주변을 살피면서 함께 中을 위해서 나아간다면 일을 그르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을 말한다. 남한은 미국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나 작전 통제권의 환수 문제 등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그들과 떼려야 뗄 수 없이 함께 가야하고, 중국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일본과도 마침내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서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여기에 더해서 오늘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인도나 이슬람 문명권의 등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더불어 러시아, 만주와 중앙아시아 등과 함께 하면서 미국과 일본 등과도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이렇게 다시 한 번 한반도 우리의 자리는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세계의 인류 문명이 집결하고 각축하는 장이 될 것인데, 이 때 우리의 역할과 판단과 지혜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참으로 잘 숙고할 일이다.

참으로 오묘하게도 최근에 신라 시대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 857-)의 한 석각이 1천200년 만에 지리산 자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고운 최치원은 통일 신라 말기의 뛰어난 문장가와 사상가로 당시 세계의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에 대해서 한민족의 고유성을 강조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묘지도”(玄妙之道)에 대해서 말했고, 유불선(儒佛仙) 삼교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신라 고유의 사상(풍류도)을 주창한 사상가였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당시 골품제 신분제도의 부패로 큰 위기 가운데 빠진 신라를 개혁하고자 시무책 10여조 등을 지었지만 당시 보수적인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마음을 달래면서 폭포를 감상하며 돌에 새겼다는 ‘완폭대’(翫瀑臺, 불일폭포를 즐기면서 감상하는 바위)의 글자가 오늘 다시 발견되었다는 것을 나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오늘 인류 사회에서 21세기 서구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이 점점 더 드러나고, 세계의 강국들은 우리 주변에서 패권주의적 다툼을 증가해가면서 우리의 처지는 참으로 긴장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말고 운전대를 잘 잡고서 자신의 깊은 과거와 역사로부터 배우면서 앞을 잘 내다보고 갈 일이다. 오늘 우리가 국가주의의 모든 경계는 넘는다 해도 오랜 동안 역사에서 민족으로서 가꾸어온 문화와 문명의 보고들은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것을 우리 공동의 토대로 삼아서 운전석에 앉아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해 좋은 흐름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거기서 인류가 크게 하나 되는 길도 더욱 넓게 열릴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각주

(각주 1) 나는 2017년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주관해서 제주도 강정에서 열었던 <한국재일일본여성신학포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발제를 준비하는 가운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용어가 이미 1965년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의 한일조약에서 쓰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은선, “동아시아 역사수정주의와 평화 이슈-‘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재일일본여성신학포럼 발표문, 2017.2.14-17, 제주도 강정.
(각주 2) <한겨레> 2018년 5월10일(목) 4면.
(각주 3) 안재홍, 「신민족주의의 과학성과 통일 독립의 과제」, 최원식/백영서 엮음, 『동아시아인의 ‘동양’인식: 19-20세기』, 문학과지성사, 1997, 265쪽.
(각주 4) 같은 글, 266쪽.
(각주 5)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193쪽;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박혜영 역, 동문선, 1997, 181쪽.
(각주 6) 『周易傳義 』권18, 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337쪽.

이은선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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