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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폴 틸리히의 신학을 동아시아 상황에서 반추하다

기사승인 2018.05.25  22: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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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재의 『틸리히 신학 되새김』(대화출판사, 2018)

팔순을 눈앞에 둔 노(老) 교수께서 평생 좋아하며 가르쳤던 신학자 폴 틸리히의 신학체계를 동아시아 콘텍스트에서 원숙하게 다시 풀어내었다. 세 권으로 구성된 그의 『조직신학』에서 50개의 신학적 주제를 뽑아 그의 사상에 담긴 뜻을 후학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한 것이다. 재직 시에도 틸리히를 소개하는 개론서를 낸 적 있었으나 저자는 금번 책을 통하여 그를 재구성했다.

저자는 겸손하게 제목을 『틸리히 신학 되새김』이라 했으나 사실 ‘재창조’라 해도 과하지 않을 듯싶다. 본 책에서 우리는 틸리히의 신학적 주제를 비판적으로 재론하는 아시아 신학자의 자의식을 맘껏 느낄 수 있다. 한국 신학계에 역작을 남겨준 저자에게 깊이 감사한다.

1.

이런 이유로 필자는 본 책에 대해 다음의 말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 글은 추천사의 일부가 되어 본 책속에 실려 있으나 접하지 못한 독자를 위해 다시 옮겨본다.

“이 책은 저자가 말하듯 틸리히 신학에 대한 단순한 되새김이 아니라 틸리히의 상관 방법론에 기초하여 틸리히의 물음에 저자가 창조적으로 답한 것이다. 동시대 신학자인 바르트 교의학과 달리 틸리히가 교회 공동체를 넘어 이성이 지배하는 세속(문화)의 질문을 답하려 했다면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갔다. 틸리히를 벗했으나 한국인으로서 저자의 물음 자체가 그를 능가한 탓이다. 자신 속에서 아시아인, 한국인 됨을 재발견한 결과이겠다. 서구적 이성이 아닌 동북아의 종교 문화적 상황에서 틸리히 신학을 재구성한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저자가 택한 50개의 틸리히 명제들에 대한 풀이는 분명 되새김이 아니라 재창조였다. 이 책을 통해 후학들은 한국인의 종교적 실존 속에서 서구 신학이 어찌 독해되는 지를 가슴 뛰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알고 싶고 묻고 싶은 내용들이 없지 않았다. 600쪽에 달하는 제법 큰 책으로 출판되었으나 절반 정도를 틸리히 텍스트를 소개한 탓에 저자의 생각을 충분히 담기에 여백이 부족했을 것이다. 책 전체를 저자의 언어로만 온전히 풀어냈더라면 더 많은 생각과 입장이 드러날 수 있었고 불필요한 물음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틸리히 『조직신학』에서 저자가 택한 50개의 핵심주제는 기독교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질문과 토론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본 글에서 필자는 저자가 선택한 50개 명제와 그 풀이에 대해서 나름 의견을 보태고자 한다.

50개의 신학명제를 5개의 큰 주제로 묶었기에 필자 역시 그 틀에 맞춰 질문을 중심으로 간편하게 글을 진행시킬 것이다. 참고로 본 책 『틸리히 신학 되새김』을 구상하는 5부의 제목을 적어 본다. ‘신앙과 이성, 그리고 거룩한 체험’, ‘존재자들과 존재: 피조물 의식과 창조주 신앙’, ‘새로운 존재: 인간 실존의 문제와 그리스도이신 예수’, ‘생명과 성령: 생명의 불안정성과 성령의 현존’, ‘역사와 하나님 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

3.

그 전에 틸리히 신학의 사상사적 위치와 신학적 변별성에 관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틸리히 신학 계보를 추적하면 가까이는 19세기 신학자 E. 트뢸치와 맥이 닿는다. 칸트(수수이성비판)와 슐라이에르마하(신앙론)를 창조적으로 종합한 트뢸치는 최초로 종교사에 관심을 둔 신학자였다. 그의 제자가 보편사를 신학주제로 삼은 판넨베르크와 오늘의 주인공인 폴 틸리히였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를 만나 트뢸치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킨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 실존의 물음으로 재구성시켜 종교사의 신학을 세속적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신학은 ‘Up down Experience’를 강조한 칼 바르트의 계시신학 달리 ‘Bottom up experience’로 무게 중심을 옮겨 소위 ‘아래로부터의 신학’의 길을 새롭게 열어젖혔다. 그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신론(종교)의 핵심으로 여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관계된 주제로서 틸리히는 신학사에 있어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란 어휘를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였다. 바르트가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이란 이름으로 자기 신학을 완결지은 것과 크게 변별된다. 주지하듯 틸리히 조직신학은 상관방법에 근거하여 인간 실존적 물음에 대한 답변체계였다. 교회 경험만을 강조하지 않았고 교회 밖에서의 물음도 신학적으로 중히 여긴 결과였다.

이런 틸리히 신학은 이후 제 3세계에서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의 탄생을 도왔다. 틸리히의 실존, 이성, 그에 근거한 물음이 제 3세계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반성이 생기했던 탓이다. 오늘의 책 『틸리히 신학 되새김』이 의미 있는 것도 실존의 지평을 아시아적으로 옮겨 재(再)서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신학의 경우도 어쩌면 틸리히의 ‘아래로부터의 방법론’에 힘입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틸리히 신학의 또 다른 변별력은 저자도 밝혔듯이 성령을 신학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다. 알다시피 성령은 기독교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받았고 무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간접적 역할로서, 교회체재를 부정하고 나아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은사로서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이다.

이점에서 틸리히 신학은 성령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웠다. 자기 신학의 핵심인 인간실존과 기독론의 구조를 성령의 시각에서 언급한 것이다. 칭의론을 성령론적으로 확대시켜 성화(聖化)를 넘어 영화(靈化)까지 강조한 것 역시 근대를 넘는 탈현대적 감각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그가 예술을 사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 신학은 근본에 있어 본질(주의)에 입각해 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 것이 아니라 본질을 실존에 앞서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실존은 본질로부터의 일탈로서 죄(유한성)의 다른 표현일 수밖에 없다.

실존으로부터 본질로의 복귀,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이 본질로의 환원인 한에서 틸리히는 여전히 고전적 신학자라 불릴 것이다. 처음부터 세계 내 상황성을 절박한 신학적 주제로 삼을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이제 김경재 선생께서 선택하여 풀어낸 50개 항목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묻고자 한다. 향후 토론될 주제라 여기면서 말이다.

첫 부분에는 틸리히의 신학 방법론(인식론)에 관한 7개의 명제가 적시되었다. 성서, 혹은 계시가 아니라 방법론이 첫 장을 점한 것이 틸리히 신학의 특별함이다. 무엇보다 틸리히는 종교의 본질을 ‘궁극적 관심’이라 말했고 ‘궁극적’, ‘무조건적’, ‘총체적’ 그리고 ‘무한성’을 그의 필요충분조건이라 여겼다. 그럴 경우 이런 제 조건들이 ‘절대적’이란 개념과는 어찌 관계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궁극적인 것을 절대성과 배타성으로 수용하는 교회적 현실에서 말이다.

저자는 틸리히 상관방법론을 변증적 신학이라 일컬으며 케리그마적 신학과 대별시켰다. 그렇다면 변증신학은 대화신학과는 어떻게 다르며 최근 회자되는 비교신학(Comparative theology)과의 관계는 어떨지 궁금하다. 후자의 두 경우를 변증신학의 발전적 개념으로 보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저자는 틸리히를 따라 실존적 상태에서 이성의 불안정성(상대성)을 강조했다. 주객 이분법을 해결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신앙의 불안정성은 어떻게 극복할까? 신앙이 어떻게 자기분열(모순)의 해독제가 될지 모를 일이다. 틸리히 신학에서 자/타율을 부정하는 대신 신률(神律,Theonomie)이 중요하다. 이를 저자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상태라 일컬었다.

그렇다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말하는 아시아 시각과의 치(호)환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틸리히의 ‘성스런 체험’을 저자는 R. 오토의 두렵고 떨림의 감정(누미노제)과 유사하다고 했다. E. 슐라이에르마하의 절대의존 감정과 함께 이들을 총칭하여 ‘종교적 선험성’(Das religioese Apriori)이라 일컫는 비판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틸ㄹ히히 신학이 종교적 선험성을 긍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예수 숭배론을 비판하며 예수의 인간성을 철저하게 강조했다. 자신을 비우는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의 본성을 남김없이 쏟아 부었던 예수를 그리스도라 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물들이 중요할 터인데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주지하듯 틸리히의 상징론은 성서 근본주의를 난파시킨다. 이런 상징론을 저자는 중세 실재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상징 역시 다의성보다 단일성을 실존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비판에 다시 답이 필요하다. 실존 철학자 야스퍼스가 실존 신학자 틸리히에게 묻는 질문이겠다.

5.

본 책 2부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신학적 명제들을 다뤘다. 존재자들과 존재 자체는 이에 대한 틸리히 식의 언표라 할 것이다. 저자는 틸리히의 하나님을 유무(有無)를 초월하면서도 이를 근거 짓는 근원적 ‘있음’의 능력이라 했다. 이런 신(神)을 틸리히는 존재자체(Being itself)라 불렀다. 저자는 이를 多夕의 ‘없이 계신 하나님’과 견줬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하나님 절대 주권(전능성)을 강조했다. 신과 인간(세계)간의 질적 차이를 상정한 것이다. 그럴 경우 양자의 차이는 분명할 것인데 어찌 유사하다 보았을까? 저자는 존재자체로서의 神을 성서적 유일 신관과 연결시켰다. 고통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이 ‘야훼’ 이름 속에 담겼다는 것이다. 이를 배타성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타자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고 성서 자체가 이를 도처에서 웅변하고 있다.

저자는 삼위일체론을 통해 틸리히의 성령론을 강조했다. 아래로부터의 영(靈) 기독론을 틸리히에게서 본 것이다. 성령에 대한 저자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신성의 무제약적인 힘의 요소와 로고스(말씀)의 창조적 요소가 함께하는 제 3의 원리’. 하지만 틸리히와 저자 모두는 여성 신학적 시각을 놓쳤다. 반면 최근 책 『오소서 성령이여!』에서 해방신학자 보프는 하나님 靈이 최초 여성(마리아)에게 임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 한신대 신학과 김경재 명예교수 ⓒ윤병희

저자는 신정론(神正論) 물음에 대해 신앙주의적 입장(fideism)을 견지했다. 세상 악에 대한 하나님 부재 체험의 소중함을 강조할 목적에서다. 하지만 본 책 초반에 길희성 교수의 글이 수차례 언급되었다. 그가 신앙의 주관성(fides qua) 대신 객관성(fides quae)으로 회귀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세월호 참사와 같은 현실에서 신정론과 신적 특별섭리의 관계가 더욱 궁금하다.

신의 전능성을 승인하는 저자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앞세웠고 그로써 진화론과 창조론을 함께 엮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자가 틸리히만큼 관심했던 과정신학은 이 개념을 폐기했다. 예배(신앙)를 통해 관계를 맺는 거룩한 하나님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신앙유비’의 전통에 의거, 저자는 신/인간의 본질적 유사성을 부정했다. 가까이 할 수도 볼 수도 없는 분(딤전 6:16), 그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런 하나님만이 실존적 유한성(불안)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속에 내주하며 우리와 나뉠 수 없는(不二) 임마누엘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가?

개체화와 참여(관계성)는 저자가 강조하는 틸리히의 핵심개념이다. 이것을 저자는 신적 사랑(아가페)의 존재론적 구조라 했다. 실존성과 사회성의 양면을 포함한 개념이다. 이런 사랑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언표 되는 시대적 현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정치적 구원을 궁극구원의 이전단계로만 치부할 수 없는 탓이다.

6.

본 책 3부는 새로운 존재(New Being)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실존을 다루는 장이다. 저자는 11개의 항목으로 3부를 정리했다. 우선 유한한 인간실존의 제 모습을 적시했다. 본질로부터의 일탈된 인간, 이것이 바로 실존의 모습이다. 이를 원죄라 했으나 비관치는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원죄를 우선시했다.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탄생성(Natality)을 긍정하는 원복(Original Blessing)의 시각을 앞세울 수는 없었을까?

저자는 불신앙을 존재론적 기반인 하나님께 등 돌리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존재의 중심이라 여기는 태도를 총칭한다. 그러나 삶 자체가 짐이 되는 현실에서 불신앙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 현실적일까? 원죄를 강박하는 기독교적 기재, 혹은 본질을 강조하는 실존신학의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저자는 틸리히의 ‘초월적 범재신론’이란 말을 좋아했다. “신의 무한 양태는 신의 정신이고 유한 양태는 자연과 모든 개별 현상이다.” ‘하이어라키’와 ‘헤테라키’의 통합으로서 ‘다차원적 전일론’(켄 윌버)을 예로 들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하는 대승불교의 실재관과도 비교했다. 하지만 초월적 범재신론 속에 여전히 정신과 물질(자연)의 이분법이 잔존한다. ‘정신으로 되어가는 물질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주지하듯 틸리히에게 있어 소외는 죄의 다른 말이고 존재의 양극성이 그 실상이다. 자유와 그의 제약, 역동성과 형태 그리고 개체화와 참여의 양극성(분리) 탓에 실존이 분열과 소외의 상태에 이른다. 이를 치유하는 것이 ‘새로운 존재’로서 그리스도란 것이 틸리히와 저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보편성으로서의 죄(소외)가 극복되는 방식 역시 보편적으로 설명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요한서의 로고스 성육화로 답했다. 하지만 요한서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과 갈등 차원에서 읽혀질 책이 아니던가?

저자는 영 기독론으로서 사람 예수를 역설했고 그 예수가 인간 실존의 곤궁과 소외를 해결할 ‘새로운 존재’라 했다. 존재의 양극성, 소외의 존재양태를 해결할 힘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를 ‘칭의’가 아니라 ‘화해론’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 역시 미정고(未定稿)란 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책임이 우리들 몫이 된 탓이다. 물론 틸리히는 전통적인 속죄론(대속사상)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를 십자가 사건의 결론이라 했다. 그렇기에 질문이 다시 솟는다. 과연 살아생전 분리된 존재양태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가?

저자는 ‘본질’이란 헬라 개념을 갖고 神을 표현한 틸리히 신학을 변호했다. 여전히 이 개념이 복음의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Vere Deus Vere Homo)이란 기독론 신조를 하나님의 실존이 곧 그의 본질이란 말로 풀어냈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동아시아 풍토에서는 ‘뜻’의 일치로서 양자(神/人)간 하나 됨을 말할 수 있다.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를 ‘뜻’의 존재로서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저자가 틸리히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점은 부활에 대해서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사건’과 ‘상징’으로 대별한 틸리히에 반해 저자는 부활 역시 ‘사건’인 것을 역설했다. 신적 주권성에 무게를 둔 까닭이다. 상징으로서의 부활이 저자에겐 이성의 한계로 보여 졌다. 그러나 십자가조차 상징으로 본 신학 사조도 있다. 십자가 역시 기독교 서구전통에서 비롯된 자기이해의 토대란 것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존재’란 말에 주목했다. 틸리히 신학을 성령의 시각에서 본 결과이다. 중생, 칭의, 그리고 성화 등의 구원(론)의 표증도 이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맺혀진 열매의 유무이다. 열매가 없다면 단연코 구원도 없다. 그렇기에 저자는 영화(Glorification)란 개념에 주목한다. ‘죽음 이후 삶’(死後生)을 현재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서이다. 하지만 성화와 영화의 개념 차가 불분명하다. 이를 꼭 구분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7.

본 책 『틸리히 신학 되새김』 4부에는 생명과 성령에 관한 13개 항목이 다뤄졌다. 가장 많은 분량이다. 3부에서 언급한 인간실존과 기독론의 구조를 생명과 성령의 차원에서 재론했다. 구원의 영역을 인간을 넘어 우주 자연에로까지 확대시키고자 함이었다.

저자는 인간을 실존적 차원을 넘어 다차원적 우주적 존재라 했다. 창조의 靈을 통한 존재란 것이다. 여기서 창조는 발생(진화)을 포함한다고 저자는 보았다. 과정사상의 영향史로 인함이다. 하지만 정작 통합화 과정에 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 하나님 靈을 ‘생명을 위한 에너지’(Energy for Life)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영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 영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영과 여타의 영간의 차이를 전제했다. 몰트만의 성령론이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해방신학자 보프의 성령론은 차이보다 같음에 무게를 두었다. 틸리히를 동아시아 전통에서 재창조한 저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동학의 지기론(至氣論)을 깊이 연구했던 까닭이다. 성령의 활동을 저자는 생명의 자기 통전, 자기 창조, 자기 초월 운동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無로부터의 창조’를 앞세운다. 이를 포기한 화이트헤드의 신관을 오히려 왜소하다 비판했다. 저자는 이를 한국 기독교인들의 보편시각이라고 하며 긍정했다. 하지만 양자를 통합시킨 미국 신학계의 새로운 시도 역시 주목해도 좋겠다.

저자는 인간을 부정적,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기존 신학적 입장을 회개했다. 하지만 아시아적 종교들의 낙관적 견해도 긍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생명의 불안정성 때문에 영의 활동이 필요하다 믿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깊다는 성서의 말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긍정적 인간성 속에서도 영의 활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긍/부정, 안정/불안정을 아우르는 영의 활동성을 말이다. 생명의 불안정성만큼이나 문화의 불한정성 또한 목하 현실이다. 하나님의 영은 문화적 형태를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을 부수기도 한다. 현실에서 법, 조직, 체계, 질서는 필요악일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해체를 영의 활동이라 여기는 신(철)학자들이 많다. 자본에 먹혀버린 교회를 해체하라는 소리가 성령의 외침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종교의 마성화(魔性化)를 틸리히처럼 저자 역시 크게 염려한다. 그럴수록 하나님 영의 활동만이 속화(俗化)된 종교를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지닌 유/불교보다 목하 기독교 몰락의 속도가 더 빠르게 진행된다. 기독교는 오히려 자기초월을 방해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자본의 마성에 굴복된 기독교의 미래를 성령활동에서 기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4부 중반부터 성령의 현존 및 활동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먼저 인간과 하나님의 靈과의 관계를 논했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근저에서부터 파악된 존재들이다. 칭의론을 성령론적으로 확대시킨 결과였다. 바울신학의 본질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 체험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성령론을 너무 개인차원에서 보았기에 역사(구조)의 화해적 측면이 언급되지 않았다. 성령현존 체험을 위해 틸리히는 매개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교회의 뭇 아이콘은 물론 말씀(성경)과 때론 목회자도 필요하다. 말씀을 매개물로 보는 시각이 신선하다. 그렇다면 영의 직접성을 더욱 강조하는 기독교를 기대할 수도 있을 듯싶다.

앞서도 보았듯이 틸리히 성령신학은 그 열매를 강조했다. 사랑이 바로 그 열매인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영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사랑 속에서만 생명의 자기 초월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사랑이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듯 사랑을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성령은 의당 세계종교들 속에서도 현존한다. 하지만 틸리히는 종교를 유형별로 분류했다. 개체아를 부정하는 무자성(無自性)의 불교와 역사성을 강조하되 가역(可逆) 불가능한 기독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보다 이들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옳을 듯싶다. 첫 번째 차축시대가 종교를 분리시켰다면 영성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두 번째 차축시대에는 이들을 다시 엮을 필요가 있다. 교회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이들의 공동체인 탓이다. 그러나 예수를 잊은 교회, 영적치매에 빠진 한국 교회를 공교회라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교회 밖 사람들에 의해 현실 거역적인 대안가치들이 실험되고 있다. 성령론적 신학의 철저 화를 위해서라도 교회 내 구원보다 교회 밖의 구원에 주목해도 좋겠다. 하나님 나라가 본래 체제 밖 사유였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저자는 틸리히를 따라 자기초월 능력의 증대를 성화의 핵심으로 여겼다. 삶속에서의 초월이 바로 성화인 것이다. 이 말이 허언(虛言)이 되지 않으려면 성화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구체적으로 ‘순수 증여’, ‘선물’, ‘환대’와 같은 말로 치환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거스르는 개인적 차원의 저항이자 자기 초월의 길인 탓이다.

4부 마지막에서 개신교 원리와 칭의 신앙이 재론된다. 신앙이 하나님의 자기분여로서의 선물인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온전한 자력도 완벽한 타력만으로 존재하는 종교는 없다. 어는 종교에서든 자/타력은 불이(不二)적 관계에 있을 뿐이다. 길을 가다 길이 되는 것이 구원이고 깨달음일 터, 그 길 자체는 선물이자 타력일 수밖에 없다. 그 길을 내가 만들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8.

본 책 5부에서는 역사와 하나님 나라(神國)를 주제로 하여 11개의 항목을 정리했다. 일종의 기독교 종말론인 셈이다. 마지막 50번째 항목이 영원한 생명으로 되어있다. 익히 알 듯 하나님 나라는 역사와 상당히 유관(有關)하다. 역사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그 끝에 올 신국인 탓이다.

함석헌은 ‘역사란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기독교를 목적론적 세계관과 같이 보았다. 그러나 실패한 과거는 어찌 되는가? 역사의 끝에서 실패한 과거들이 절로 의미를 얻는 것인가?

W. 벤야민은 그렇기에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슬픈 과거를 먼저 구하라고 했다. 과거 없는 미래는 진보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다. 동서 신비주의를 비교하는 항목에서 저자는 역사와 관계하는 방식을 말했다. 참여와 일치, 두 개념으로 기독교와 동양종교간 차이를 역설한 것이다. 전자는 신/인간의 불가역성을 말하나 후자는 가역적이라 했다. 신비주의 본질이 공히 우상타파에 있겠으나 저자는 기독교적 신비주의만이 몰(沒)역사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인간의 일차적 접촉(타키자와)과 이차적 접촉(야기세이찌) 모두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불교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이 시장한가운데서 세상을 구하는 일이었으니 불교를 평가하는 沒역사성도 기우일 수 있겠다. 저자도 틸리히를 어쩔 수 없는 서구 신학자란 것을 인정하며 거리를 두었다. 틸리히가 거듭 역사적 종교와 비역사적 종교로 그 형태를 구분했던 까닭이다. 역사 변혁 의지가 기독교의 경우 불교에 비해 강할 수 있다. 하지만 생태적 측면에서 불교는 기독교 이상의 역할이 있다. 그렇기에 유형별 분리는 현명치 못한 처사이다. ‘상호 불가결한 보충 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필자는 앞서 분리나 차이를 주장하는 것에 더해 상호 관계시키는 방식을 찾으라 했다. 유형론적 방식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와 열반 역시 많이 다르다. 앞의 것이 참여를 말하고 나중 것이 일치(동일성)를 강조하는 탓이다. 기독교는 동일성만 갖고서는 역사적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으로 종교 성격을 확정지을 수 없다. 힌두교만큼 신적 궁극(절대)성을 말하는 종교가 없고 불교 이상으로 관계를 논하는 종교가 없겠으나 기독교는 역사의 우발성(우연성)에 가장 예민한 종교라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의 완성을 위해 세 종교의 역할이 모두 소중하다. 그럼에도 역사변혁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 사상은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인 까닭이다.

그러나 현실 기독교는 세상을 빼닮았다. 체제 밖 사유로서의 하나님 나라 사상을 잊었고 종교적 이기심으로 천당(天堂)만 바라고 있을 뿐이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건축현장으로 만들라’는 한 신학자(몰트만)의 고언이 참으로 공허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기독교의 구원사를 세계사 속의 내적 목적이라 확신했다. 세계사와 구속사가 역시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 자체를 계시로 보는 신학자(판넨베르크)도 있으니 신학의 묘미가 크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미래를 중시한다. 하지만 필자에겐 거듭 실패한 과거사가 중요하다.

이웃 종교들과의 관계도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언급되었다. 틸리히는 모든 종교들이 본래 탄생된 그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출현될 당시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란 말이다. 종교탄생에 있어 풍토적 요인이 가장 중요하다.

주지하듯 문명발생지가 종교탄생지였고 이들 저마다 다른 풍토(환경)의 산물이었다. 사막형 풍토, 몬순형 풍토 그리고 목장형 풍토, 그곳에서 문명과 종교가 저마다 다른 형태로 생겨났다. 그렇다면 종교간 우열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틸리히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즉 역사의 종말로서의 神國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가야될 나라가 아니라 도래하는 세상이다. 종교자체도 없어진다 하니 기독교도 거기선 더 이상 자리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일까? 이를 역사의 목적이자 끝이라 믿는 신앙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듯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적 몸’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이 바울의 전언(傳言)이다. 이들 세상에 걸 맞는 인간 존재양식이 바로 ‘영적 몸’의 상태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 생전의 육체로서가 아니라 ‘영적 몸’을 입고서도 개체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지속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니 무엇을 옳다 하기도 힘겹다. 몰트만은 하나님에 의한 기억으로 ‘영적 몸’의 뜻을 풀어냈다. 인간의 일체 잘잘못을 기억하되 심판치 않고 두루 수용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우선적으로 고백하면서 말이다.

9.

아픈 몸을 갖고 저자는 후학들의 목회적 삶을 염려하며 큰 책을 썼다. 한국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저자의 마음이 책 서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신학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교회현실에 경종을 울릴 목적도 있었다. 저자의 그 마음을 알기에 필자 역시 공들여 책을 읽었고 단숨에 이 글을 썼다.

▲ 이정배(顯藏아카데미)

하지만 본 책 『틸리히 신학의 되새김』의 내용을 정리하기보다 좀 더 논의하고 싶은 주제들을 나열했기에 송구한 마음도 있다. 저자는 틸리히 신학을 바르트의 케리그마적 선포신학에 반해 변증신학이라 총칭했다. 교회 밖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 물음에 답했던 변증신학이 일방적 선포신학보다 공헌할 바가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틸리히 변증신학을 아래로부터의 신학, 혹은 성령론적 신학이라고도 불렀다.

이 신학을 붙잡고 저자는 평생 문화신학의 영역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동아시아 전통 속에서 틸리히를 창조적으로 왜곡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본 책 곳곳에서 눈에 띈다. 틸리히의 신학적 물음이 여전히 서구적 이성에 근거했다면 저자는 아시아적 이성과 심성을 바탕 삼은 결과이다.

그러나 평생 아시아 문화를 갖고 씨름한 저자의 마지막(?) 저술에서 필자는 좀 더 한국적, 아시아적 주체성을 기대했다. 그러나 저자에게 기독교적 실존이 언제든 우선이었다. 신학자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이렇게 표현한다. 본 책에서 저자의 실존보다 두 번째 차축시대의 도래란 시대적 감각이 앞섰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틸리히 신학 되새김』만으로도 저자는 큰일을 했다. 서구 신학의 거목인 틸리히를 이처럼 잘 소화한 학자를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귀한 노력에 재차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도 저자에게 더 큰 배움을 얻고 싶다. 내 제자 중 한사람은 틸리히가 말한 자유와 운명의 변증을 통해 절망적 삶을 헤쳐 나갈 힘을 얻었다고 고백해 왔다. 틸리히 저서가 이미 한 사람을 구원한 셈이다.

10.

오늘의 시점에서 신학의 역할이 참으로 왜소하게 느껴진다.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서도 신학의 언어를 경청하지 않는다. 신학의 풍토 역시 많이 척박해졌다. 고전과 전통 그리고 민족을 잊고 오늘, 서구를 앞세우며 자기 신학만을 목청 높여 전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시간이 곧 생명처럼 느껴지는 인생 끝자락에서 몇 년을 공들여 신학의 거장 틸리히 사유를 한국적 상황에서 풀어 낸 선생님의 공로는 후학들이 길게 기억해야 옳다. 후학들이 틸리히에 맹종치 않고 그를 넘어설 시각도 배울 터이니 말이다.

본 글을 끝내기 전에 선생님과 함께한 신학자 30년의 삶을 반추해 본다. 선생님은 필자가 학생 때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셨다. 생존하신 분들 중에서 필자가 학생이던 70년대 초반 시절부터 대학에 적을 두셨던 분은 선생님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필자를 학문의 도반으로 여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님의 귀중한 옥고가 나올 때마다 서평할 기회를 주셨으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필자 역시 인생의 소중한 기회에 선생님을 청해 말씀을 듣곤 하였다. 선생님과 더불어 문화 신학회 활동을 할 때가 그립게 추억된다.

얼마 전 수척하신 모습으로 『틸리히 신학 되새김』을 세상에 내 놓은 선생님을 보며 마음이 울컥해 졌다. 생명(시간)을 바쳐 일군 작품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학자는 책으로 말한다는 말을 몸으로 보여 주셨다. 선생이 사라진 지금 선생의 모습을 삶과 학문으로 옳게 보여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

선생님은 선배 신학자들,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유동식, 변선환 등을 각기 특색을 가진 높은 봉우리(高峯)로 비유한 바 있었다. 이제 우리는 김경재를 한국 신학계의 한 고봉(高峯)으로 여길 때가 되었다. 오늘의 자리가 그 시점이 되길 바란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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