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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제주4.3 지휘·명령자 속의 기독교인

기사승인 2018.03.20  01: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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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 ②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1. 서론
2. 제주4.3사건과 기독교인들의 활동
1) 서청과 기독교

2) 지휘, 명령자 속의 기독교인 - 조병옥
3) 지휘, 명령자 속의 기독교인 - 이승만
3. 나오는 말 - 이념과 신념

 

2. 제주4.3사건과 기독교인들의 활동

2) 지휘, 명령자 속의 기독교인 - 조병옥

제주4.3이 발생하였을 당시 초기 사건을 진압하는 실질적인 지휘·명령자로 감리교 출신의 기독교인 조병옥 경무부장이었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하기 위해 1949년 1월 21일 발근색원 지시(각주 6)를 내린 이승만 전 대통령도 감리교인이었다. 또한 당시 이○○ 등 다수의 천주교인과 개신교인들이 장교로, 경찰로 학살에 가담하였다. 그 중에 여기서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이승만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1947년 3·1절 직후 경찰에 항의 하는 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만적 선전과 파괴적 모략으로써 제주도의 사회를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 근본적 요소를 제거할 근본방침도 수립되어 있다. 도정 책임자와 협의하여 그 실현에 옮기겠다. … 폭동과 같은 무질서의 행동같이 조선건국의 전도를 위험케 하는 것은 없다. 폭동의 빈발은 조선민족의 정치적 자치력과 도덕적 자율성이 결여함을 세계의 이목 앞에 폭로시켜 우리의 위신과 신용을 실추시키는 것이다. 동포여, 반성 자중하여 일상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건국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각주 7)

경무부장은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주민들의 파업을 기만적 선전과 모략으로 조선민족의 자치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세계에 폭로하여 조선의 건국을 위험하게 하는 폭동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폭동의 근본 요소를 제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날 제주도청을 방문한 그는 도청 직원들에게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며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각주 8)

그가 말한 ‘자치력’은 미국무부의 남한만의 자립정부를 의미하고, 이승만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통한 즉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무부의 정책은 미군의 철수와 동시에 남한에 자립 정부를 수립함으로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공격과 외부의 사주를 받은 내부 반란에 의한 국가전복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 제주 4.3사건의 지휘·명령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기독교인인 이승만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응원경찰대가 충원된 1947년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각주 9)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간부들의 검거를 시작으로 3‧1절 행사를 주도했던 민전 간부들과 남로당 간부들도 연행됐다. 3월 18일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검거된 사람이 약 200명이라고 했고, 4월 10일엔 검거된 500명 가운데 군정재판에 송치된 자가 199명, 송치 예정자가 61명으로 결국 군정재판 회부 건수는 도합 260명이라고 했다.(각주 10) 대량 검거는 가혹해위로 이어졌다.

1947년 4월경부터 취조과정에서 경찰들은 연행자들을 고문하기도 했다. 재판과정에서 피고인들은 “경찰의 청취서는 사실무근이다. 고문이 심하므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다시피 되었지만 이런 자백을 한 바는 없다”거나 “말도 듣기 전에 구타 고문”을 했다고 했다.”(각주 11) 결국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김용철 등 3명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1947년 3‧1사건부터 1948년 4‧3 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약 2,500명이 검속됐다.(각주 12)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함으로 4·3사건이 시작되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주장했다. 무장대의 전단지에는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라고 하였다.(각주 13)

또한 무장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는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각주 14)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로당 제주지부와 주민들의 의도는 국가전복이라기 보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했으며,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수준이었다.

4·3사건 진압을 담당했던 조병옥 경부부장의 입장은 매우 달랐다. 4월 16일에 발표한 「도민에 고함」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친애하는 제주도의 동포여러분! 우리의 동경하던 자주독립이 목첩(目睫)에 박두한 이 때, 무모한 폭동을 일으켜 여러분의 골육인 건국의 일꾼을 살상하여 가뜩이나 빈약한 우리의 재산을 파괴하고 독립을 방해함은 그 무슨 일인가. 여러분은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 하는 공산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은 것이다. 현명한 여러분은 총선거가 조선독립의 천재일우의 호기이고 그 완성의 유일한 방도임을 인식하라.
- 1948년 4월 14일.(각주 15)

그는 제주4·3사건을 건국을 방해하는 폭동으로 규정하고, 이 폭동을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는 공산분자의 음모라고 판단했다. 미군정 경무부는 제주4·3사건을 내부 반란세력에 의한 국가전복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른 진압정책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공산당이 지원하는 내부반란세력에 의한 국가전복은 미국의 대한정책인 NSC8에서 예측되었던 핵심 사안 중에 하나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Executive Secretary of National Security Council)  시드니 W. 소어스(Sidney W. Souers)가 트루만(Truman) 대통령에게 1948년 4월 2일 보낸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관련한 미 NSC의 보고서”(이하 NSC8)(각주 16)에 의하면 미국은 “한국에 민주적인 주권정부의 수립”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소련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 한국에서의 소련 정책의 주된 목적은 결국 한국 전역의 지배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목적이 명백하게 나타내는 것은, 위에서 보았듯 북한에 한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소련이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군대의 무력이 뒷받침하는 위성국가 체제 수립을 조장하는 소련 점령 당국의 행동이다.
(2) 소련의 지배가 한국 전역으로 확장되면 중국과 일본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전략적 입지가 강화될 것이고, 한국과 중국, 일본, 극동지역에서 미국의 입지는 약화될 것이다. 만약 미 주둔군이 철수할 때 미국이 공공연한 도발 행위를 제외하고 어떤 경우에도 남한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토착 군사력을 남기고 가지 않는다면, 미군의 철수는 극동지역의 우호국 및 동맹국을 미국이 배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소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지역 전체 세력이 근본적으로 재편성될 수도 있다. 게다가 유엔의 후원 하에 남한에 수립된 체제가 소련이 주도하는 세력에 의해 전복된다면, 유엔의 명성과 영향력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엔의 이해관계와 유사하다.(각주 17)

따라서 남한에 진미정부를 수립하고 이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국무부의 정책이었다. 소련의 영향력이 남한까지 확대되면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인 일본의 내부 분열과 3곳의 외부공격(북, 서, 남)의 가능성으로 인해 극동지역에서 미국의 입지는 약화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에게도 확인된다. 그는 NSC8을 근거로 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을 이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조선을 援助함이 美國策에 符合되는 까닭입니다. 미국은 조선을 통일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만들므로써 民主主義 陣營을 世界的 規模로 防衛하고 極東의 地理的 樞要地인 조선반도를 미국의 友好圈으로 편성키 위함으로써 그 국방상생명선인 태평양을 보위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방위가 깨어지는 날에는 태평양방위는 중대한 脅威를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각주 18)

미국이 조선을 원조하는 것은 한국의 방위가 깨어지는 날에는 태평양 방위가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을 자주 독립국가”로 만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한 부분이 되게 하고, 이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봉쇄한다는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미국의 진영으로 편입시키는 것도, 남한이 군사적 방어선으로 적절하지 않아 철수하는 것(극동군사령부 의견)도 태평양방어선을 지키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자국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악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실현가능하고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남한에 수립된 정부를 지지”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으로 군사력의 확대와 군 고문 설치 그리고 경제적 지원 등을 지원하는 것으로 남한의 정부를 안전하게 수립하고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과 대책도 갖고 있었다.

(c) 외부의 도발 혹은 내부의 전복에 대항해 필요한 경우 무력에라도 의존해 남한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하는 것. 이 행동방침은 남한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와 연계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미국은 계속 직접적인 정치·경제·군사적 책임을 져야 하고, 심지어 사실상 모든 자연적인 이익이 소련에 돌아가는 지역에서의 대규모 전쟁에 개입하는 정도까지 책임을 져야할 수도 있다.(각주 19)

그런데 미국과 미군정의 입장에서 ‘내부전복’이라는 예측이 제주4.3을 통해 현실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조병옥은 1948년 4월 20일 출간된 『民族 運命의 岐路』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총선거에 대하야 恐怖를 感하는 자가 누구냐, 그것은 ‘공산당과 그 추종자’들이다. … 이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은 한인 중에 간악하기나, 愚味하여서 不知不識, 破壞陣營의 동맹군이 된 자들과 連擊工作하여서, 행진하는 총선거에 대하야 중상, 비방, 폭력으로 최후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5월 10일 총선거투표가지 3, 4주일 간 저 反民族 非國民인 共産徒輩는 최후의 발악을 감행할 것이다. 그들은 謠言을 돌리고 민중을 기만 선동하고 선거사무소와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동포를 살상하고 國財를 파괴하는 反逆行爲를 할 것이다. 可憎可憐한 그들은 미신적으로 모스코바의 지령에 驅使되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혈맥이 상통하는 동족임을 생각할 때에 測測한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지마는 국립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야 蔑視의 大義로 秋雪같이 이 무리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총선거를 보이 하는 것만도 非國民的이어든 하물며 파괴적 수단으로써 방해함에랴. 이러한 徒輩는 法의 罪人이오 민족의 적이오 국가의 반역자다. 적과 반역자에 대하여서는 거긔 상당한 措處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각주 20)

조병옥이 바라보는 한반도에 대한 시국관과 이에 대한 대책은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관련한 미 NSC의 보고서”, 즉 미국무부의 대한반도 정책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5·10선거는 독립정부와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중요한 사건이며 따라서 이를 방해하는 세력을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방해하는 자들로 규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4.3사건을 미신적으로 모스코바의 지령에 驅使되어 공산당과 그 추종자들, 즉 破壞陣營의 동맹군이 된 자들의 폭력적 최후의 발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긍정적 자아로, 이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과 단체를 부정적 타자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신학화 한다.

이제 世界는 組織된 共産主義 惡徒의 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美, 英, 佛, 中의 同心協力이요, 로마 法王의 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랴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防共勢力이 나날이 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陣營 이 순순히 服屈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惡을 繼續한다면 그들이 無底抗으로 轉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다.(각주 21)

공산주의 진영, 즉 “사탄의 진영”은 무저갱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공산주의 악도의 도량”을 막는 세력이다.(각주 22) 그는 신학적 해석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사탄의 진영과 의의 진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신학화 작업은 그가 주장한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와이오밍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많은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가 어떻다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기독교의 교리로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본질을 파악한 나로서, 언제나 기독교에 귀의할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기독교의 감화는 나의 인생항로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다”고 하였다.

1925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그는 연희전문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면서 일요일마다 서울 YMCA 일요강습회에 나가 “사회복음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사회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조선사회를 지상낙원으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지상낙원의 건설을 위해 “인간사회의 죄악인 질병, 무식, 궁핍 등의 3대 죄악의 근원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각주 23)

그의 사회복음주의의 내용은 지상낙원이라는 이상과 이를 방해하는 요소라는 이원론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가 위에서 “기독교의 교리로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했을 때, 기독교의 교리는 선·악 교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상낙원을 이룩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질병과 궁핍 같은 것도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다.

그의 사회복음주의는 자신의 입장을 선으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경직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그의 이원론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선의 세력과 이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이라는 구도로 발전했던 것이다.

미국무부와 미군정의 정책은 남한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될 수 있는 친미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통해 극동에서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외부공격과 공산주의의 사주를 받은 내부 반란에 의한 국가전복이었다. 그런데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4.3사건이 발생했다. 따라서 조병옥과 미군정은 이 사건을 NSC가 예측한 대로 외부 공산주의의 지원에 의한 내부 국가전복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5.10 총선거를 방해하는 제주도민을 소련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내부반란 세력을 “사탄의 진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주도민을 사탄의 진영으로 규정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강경책을 계속해서 실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5.10선거 8일 전인 5월 2일 오라리 방화 조작사건과 5월 5일 제주도회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오라리 사건은 제주읍 중심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청년단원들이 대낮에 들이닥쳐 10여 채의 민가를 태우면서 시작됐었고 무장대와 경찰이 시간차를 두고 이 마을에 도착했다.(각주 24) 제주주둔 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은 사건 발생 소식을 듣고 직접 현장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오라리 사건은 경찰의 후원 아래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자행한 방화로 판단, 미군정을 찾아가 이를 보고했으나 묵살 당했다.(각주 25) 5월 5일, 딘(William Dean) 군정장관·목사 출신 통역관 김 씨·안재홍 민정장관·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조병옥 경무부장·9연대장 김익렬 등이 참석하는 제주회의가 열렸다. 딘 장관과 조병옥은 오라리 사건을 무장대의 행위라고 하면서 강경진압을 예시했다.

▲ 1959년 3월 7일, 야당의원들이 의사당 구내식당에서 민주당의 유진산 총무가 마련한 파티에서 술잔을 들고 환담을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사

그러나 김익렬은 사진첩과 증거물을 제출하면서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딘 장관이 조병옥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의 보고내용과 다르지 않소”라고 질책했다. 딘과 조병옥이 오라리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이를 근거로 강경진압 결정을 한 상황에서 제주도회의가 열렸던 것이다.(각주 26)

이는 회합 다음 날인 5월 6일 딘 장관의 두 가지 조치에서 확인된다. 그는 제주4·3사건을 “도외(道外)에서 침입한 소수의 공산분자들의 모략 선동”에 의해 발생한 폭동으로 규정해 강경진압을 예시했고(각주 27) 9연대장이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교체했다. 5월 5일 제주회의는 제주사태를 조기 진압하기 위한 미군정 수뇌부의 조치를 공론화하는 자리였고, 조병옥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각주 28) 그래서 김익렬은 “4·3사건에 총책임자가 조병옥씨야.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라고 하였던 것이다.(각주 29)

4.3사건 당시 조병옥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매우 능동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주4.3사건에 대한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건을 진압하고했다. 또한 그는 문봉제를 통해 서북청년단원 500명을 지원 받아 진압작전에 투여했다.(각주 30) 심지어 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강경 진압의 명분을 만들려고 했다.(각주 31)

그는 단순히 미군정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간 의 상호 적대행위, 즉 냉전이라는 이념을 자신의 신앙체계 안에서 신학 화 하였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방해가 되는 악의 근원과 사탄의 진영, 즉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세력을 제거하려하였던 것이다. 그는 냉전의 이념을 기독교의 배타적 이원론으로 신념화하였고 이것이 그의 행동의 동기가 되었다.

각주

(각주 6) 『국무회의록』, 1949년 1월 21일.
(각주 7) 「濟州新報」(1947년 3월 16일).
(각주 8) 金亨中(88세. 제주시 이도1동, 당시 제주도청 공무원, 2002. 9. 13. 채록) 증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122에서 재인용.
(각주 9) Hq. 7th Inf Div, G-2 Periodic Report, No. 59, March13, 1947; 「獨立新報」 (1947년 4월 5일, 3월 14일). 목포항을 떠난 전남 경찰 122명과 전북 경찰 100명은 다음날 제주항에 도착. 3월 18일, 경기 경찰 99명이 파견되었다. 이 경찰들과 2월 말 제주에 온 충남‧북 경찰 100명을 합치면 응원경찰은 총 421명이었다.
(각주 10) 「濟州新報」 (1947년 3월 20일, 4월 12일).
(각주 11) 「濟州新報」 (1947년 4월 22일, 5월 10일).
 (각주 12) 홍한표, “動亂의 濟州島 이모저모,” 「新天地」, (1948년 8월);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 - Governor Ryu, Hai Chin of Cheju-do Island,” March 11, 1948, Report of Special Investigation by Lt. Colonel Lawrence A. Nelson, USAMGIK: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128에서 재인용.
(각주 13)  김봉현‧김민주, 『濟州島人民들의 4‧3武裝鬪爭史』 (文友社, 1963), 84-85.
(각주 14) Ibid., 85.
(각주 15)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신보」 (1948년 4월 8일, 4월 18일).
(각주 16) "NSC8: A Report to be President by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on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Korea," April 2, 1948.
(각주 17)  "NSC8: A Report to be President by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on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Korea," April 2, 1948.
(각주 18) 조병옥, “治安의 角度로 建國을 論함,” 『民族 運命의 岐路』(서울: 경무부경찰공보실, 1948.),10, 11.
(각주 19) "NSC8: A Report to be President by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on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Korea," April 2, 1948.
(각주 20) 조병옥,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 『民族 運命의 岐路』(서울: 경무부경찰공보실, 1948.4.20.), 1, 7, 8.
(각주 21) 조병옥,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 『民族 運命의 岐路』, 7. 無底抗(무저항)은 한글 ‘무뎌항’을 한문 無底坑(무저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기한 것이다. 1909년 대영성서공회가 순 한글로 발간한 『신약전서』의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의하면 말세에 사탄을 의미하는 용을 결박하여 1천년 동안 가두어 두는 곳이 ‘무저항’이다. 한문 성경의 표기대로라면 武底坑(무저갱)인 것이다.
(각주 22) William Inboden, Religion and American Foreign Policy 1945-1960: The Soul of Containment, Ⅲ. 이러한 조직이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중심으로 실제로 존재했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트루먼은 천주교와 모든 개신교가 참여하는 반공종교동맹(a religious alliance against communism)을 조직하여 소련과 공산주의를 이념적으로 봉쇄하려했다.
(각주 23) 조병옥, 『나의 回顧錄』, 40, 41, 90, 91.
(각주 24) 林甲生(제주시 이도2동, 당시 납치됐다 탈출한 대청단원의 부인)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②(서울: 도서출판 전예원, 1994), 152-153);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819, April 27, 1948;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199.
(각주 25)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199-200.
(각주 26) Ibid., 203; 김익렬, “4.3의 진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② (서울: 도서출판 전예원, 1994), 338-342.
(각주 27) 「대동신문」 (1948년 5월 7일).
(각주 28) 「조선일보」 (1948년 5월 20일, 5월 27일).
(각주 29)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김익렬 HA00299,” 「증언록」(서울: 전사편찬위원회, 1966. 11. 28).
(각주 30) 북한연구소, 「북한」(1989년 4월호), 127.
(각주 31) 김익렬, “4.3의 진실.” 『4.3은 말한다』, 338-342.

최태육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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