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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과 기독교

기사승인 2018.03.19  00: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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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 ①

NCCK와 제주NCC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사순절 맞이 제주4.3 평화기행”이 지난 3월15일~16일까지 제주 일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당시 첫날 마지막 일정으로 최태육 목사님께서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 원고를 에큐메니안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원고를 한 번에 모두 올릴지, 몇 번에 나누어 올릴지 고민,한 끝에, 이 원고는 단 몇 분이라도 정성을 들여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몇 차례 나누어 읽기 편하게 개재하게 되었습니다. 귀한 옥고를 보내주신 최태육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의 흐름상 끊어지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리고 이 귀한 옥고가 제주 4.3에 대한 개신교의 죄책고백의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편집자 주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학살을 연구하면서 기존의 기독교 자료들을 검토한 적이 있다. 개 교회, 노회, 지방회, 연회 단위의 역사는 물론 학자들이 기술한 서적들에도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는 일관되게 피해자로 나타난다. 본고는 이를 부정하거나 반대할 생각이 명백히 없다. 다만 학살과 기독교를 연구하다가 기독교인들이 직접 학살에 가담하거나 학살을 지휘, 명령한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왜 이런 사실들이 조사, 연구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서론

2008년 경주, 대구, 군위 등 경북지역을 방문하였을 때, 대구10.1사건 당시 기독교인들이 신념에 따라 학살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순사건 당시에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신념을 가지고 민간인들의 분류와 처형을 지휘, 명령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을 지휘, 명령한 핵심 가해주체 중에 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고, 시군 단위의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가해자들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이 작성한 기독교 관련 글에는 학살에 가담하게 된 동기가 나타나 있었다.

또한 각각의 동기는 사회적(공산주의 적대), 기독교적(공산주의 적대의 신념화)으로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학살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은 이들의 “학살 가담 동기가 기독교적이었는가? 그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제주4.3과 기독교의 관계성을 연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가장 기초인, 민간인 학살을 지휘·명령한 가해주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부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이로 인해 이들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학살에 가담하였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다른 연구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였다.

한경직 목사의 발언과 서북청년회 중 기독교인들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중들은 기독교인들이 학살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고 있다.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기독교인들이 제주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살에 가담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많은 시간을 요하겠지만 연구가 진척되면서 4.3 민간인 학살과 기독교의 관계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번에 발표되는 글은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와 4.3의 관계를 연구하는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를 하는 이유는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제주4.3은 어떠했고,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고, 그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행동과 동인이 되었던 요소가 현재 교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해방이후 기독교에 자리한 공산주의 적대 이념과 선악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 이원론이라는 종교적 신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2. 제주4.3사건과 기독교인들의 활동

1) 서청*(편집자 주)과 기독교

제주4.3 당시 진압군으로 참전한 장교는 “그 뭐 작전이지만 어떤 때는 동물 잡는 기분도 내고 굉장했습니다.”라고 하였다.(각주 1) 그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제2과 방첩정보를 담당했던 장교로 산테이지구 보급창본부를 습격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고, 당시 1000여 명의 포로 수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가 한 말, “동물을 잡는 기분”이라는 말 속에 당시 제주4.3을 진압했던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회의 태도와 행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서북청년단, 혹은 서북청년단 출신의 경찰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이 사람을 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증언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입장에서 대단히 심각하게 바라볼 문제이다. 사실여부를 확인하여야 할 것이고, 그에 따라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 서북청년단 ⓒGetty Image

제주4.3사건과 기독교인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한경직 목사의 이 말이 공개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각주 2)

한경직 목사는 서북청년회가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점, 이 청년들이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직접적이었다. 그런데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영락교회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증언이 있었다.

질문:  그럼 오제도 검사가 검사되기 전에 영락교회내의 서청을 주도했습니까?
답변:  그분은 곧 검사가 되었기 때문에 별로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누가 대표적인 인물입니까?
답변:  김○○라는 분이 있습니다.
질문:  이분이 어느 서북청년회 입니까?
답변:  그건 잘 모르겠고, 교회 안에서 서청원들이 모일 때 주도했습니다.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청을 거의 주도해 나갔습니다. 김○○씨도 장로가 되었습니다.(각주 3)

한경직 목사의 주장처럼 구술자는 서북청년회를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도하였다고 하면서 영락교회 안에 서북청년단원들이 사무실처럼 사용하는 장소가 있었다고 하였다.(각주 4) 영락교회에서 서북청년회를 주도한 인물은 김○○이고 그는 한경직 목사가 말한 것처럼 1975년 이 교회 안수집사가 되었고 이후 장로가 되었다. 김○○의 서북청년회 소속과 직위, 그리고 활동내용은 아직 확인 중에 있다.

영락교회를 다니는 청년 중에 서북청년회 소속 회원들이 있었다는 점은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구술자가 주장한 것처럼 영락교회 청년들이 서북청년회를 주도하였다는 점과 교회 안에 서북청년회원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었다는 점은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통해 추가로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경직 목사의 두 번째 주장, 영락교회 청년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이에 대해 구술자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답변:  그건 그렇죠. 박○○씨는 서귀포 경찰서로 갔는데, 4·3사건에서 폭동일으킨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홍○○인데 (서울) ○○역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 여주인이 제주도 사람이라서 제주도 말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되어 제주도 제주시로 가 통역을 했다고 합니다. 
질문:  이분들이 장로가 되었습니까?
답변:  박○○씨는 장로가 되었고 돌아가셨습니다.(각주 5)

영락교회 교인 중에 서북청년회 출신으로 경찰에 입문하여 4.3사건 당시 제주도로 파견된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중 박○○은 4.3사건 발생한 직후 서귀포경찰서 소속 형사로 파견되었고, 홍○○은 제주경찰로 파견되어 통역을 하였다는 것이다. 박○○은 1965년, 홍○○은 1970년 각각 영락교회 안수집사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의 주장처럼 4.3사건 직후 파견된 영락교회 교인 겸 서북청년회 출신으로 경찰이 되어 제주도에 파견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주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제주도에 파견된 서북청년회 중 영락교회 교인들이 몇 명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제주4.3사건을 바라보았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각주

(각주 1) 이○○의 면담록
(각주 2) 김병희 편저, 『韓景職 목사』, 55-56.
(각주 3)  김○○  통화구술 (2014년 7월 12일).
(각주 4)  김○○  통화구술 (2014년 7월 12일); 김○○ 목사, 김○○ 집사 면담록(2013년 5월 9일)
(각주 5)  김○○  통화구술 (2014년 7월 12일).

 

편집자 주

미 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보수운동단체로 반공주의 청년단체였다. 서북청년회의 사무실은 한국 민주당 본부가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선우기성(鮮于基聖)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설립한 우익청년운동단체이다.

1946년 8월경부터 대한혁신청년회·함북(咸北)청년회·북선(北鮮)청년회·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平安)청년회 등의 각 대표 사이에 통합협의가 진전되어 서울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창단하였다. 강령으로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의 공헌 등을 내세웠고, 기구는 중앙집행위원장 외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결성된 지부는 강계(江界) 출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울종로지부로서 김이협(金履浹)이 위원장이었다.

1947년 1월 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한 서울중구지부, 평안북도 청년들의 서부지구, 청단지부(靑丹支部), 인천지부 등이 잇따라 결성되었고, 1947년 6월 10일임일(林一)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전에 남선파견대본부(南鮮派遣隊本部)를 설치했다. 서북청년회는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했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 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부산극장에 좌익 문화계 인사들이 모였다는 이유로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사건이었다),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등이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공산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년 4월에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만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비롯하여 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최태육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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