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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해방과 여성, 종교들 그리고 새로운 우주론의 기초

기사승인 2018.03.18  23: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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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보프의 『오소서 성령이여!』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신부로서 해방신학자로 활동하던 보프는 앞서 『생태신학』을 저술했고 최근 그 연장선상에서 성령론, 곧 『오소서 성령이여』를 출간했다. 이는 남미적 상황에서 비롯한 민중해방의 지평이 점차 우주 생태로 확장된 것을 뜻하며 성령론을 통해 그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 결과이다.

성령을 주제로 한 본 책은 몇 가지 점에서 특징이 있다. 첫째는 여러 민족들이 공유하는 샤마니즘, 즉 토속신앙을 긍정했고 여성들의 경험과 영의 활동을 연결 지었으며 그리고 현대과학의 우주론을 성령의 활동으로 풀어냈다. 물론 영과 성령간의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를 분리시킨 유럽의 성령론(J. 몰트만)과 달리 관계성에 역점을 두었다. 이는 개신교의 ‘신앙유비’와 달리 ‘존재유비’라는 가톨릭적 신학토대를 성령론 차원에서 재해석한 결과라 할 것이다.

1.

13장으로 구성된 본 책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지구생명권, 성서적 개념으론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현실과 다수의 사람들이 해방을 요구하며 힘겹게 투쟁하는 현실에서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영’을 긴급하게 요청한 것이다. 이는 모두 인간이면서 악마인 인간존재에서 비롯한 것으로 인간을 재주체화 할 목적에서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성령강림절이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을 새삼 묻고 있다. 본 책에서 보프는 이런 성령을 인간의 뭇 경험과 성서 그리고 현대우주론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2.

책 제목처럼 보프는 성령강림을 시대적인 절박한 요청이자 절규 차원에서 이해한다. 우주 및 인간 발생의 어느 순간에도 성령이 개입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우리 기독교의 경우 성령이 마리아란 여성에게 임한 탓에 예수의 거룩한 인간성이 탄생된 것이다. 교회 역시 성령이 역사한 결과였고, 이후 많은 해방 투쟁 과정에서 성령은 존재했다.

▲ 레오나르도 보프, 『오소서, 성령이여』, 이정배 옮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7) ⓒ한국기독교연구소

여전히 우리들 세상은 빵에 대한 굶주림, 생태계 파괴, 영적 갈급 등 지구적 차원의 문제가 심각하나 총체적 상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 탓에 세상을 바꿀 여력을 잃었다. 세계화를 넘어 지구화 시대에 이른 지금 다행히도 다양성(차이) 속에서도 보편성(일치)을 구하는 노력들이 생겨났다. 탈(脫)자본주의 운동을 비롯하여 생태적 의식의 고양 그리고 문명의 전환요구 등이 이에 속한다.

보프는 이 모든 것을 성령의 돌파라 여긴다. 역사 속에서 역사를 새롭게 하는 돌연변이가 성령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 내 교리를 앞세우는 근본주의와 늘 상 갈등했다. 세상 속으로 돌파된 성령은 화석화된 사고 틀을 깨트리는 탓이다.

이런 성령은 근본주의와 달리 경험주의를 선호한다. 동양종교를 비롯한 영적 전통에서 경험된 창조성, 자유에 대해서 수용적이었다. 근대적 합리성 대신 직관과 명상을 강조했고 여성주의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늘 상 그의 몫이었다.

3.

여기서 영(靈)은 물질과 반대되는 어떤 것도, 사적인 영역 내지 비합리적 어떤 것과 무관하다. 우리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영은 다차원에서 경험된다. 자연실재 속에서, 동물, 식물들 생명력 속에서 그리고 인간 뇌(대뇌 신피질) 속에, 약자들 편에 선 예언자들 말속에서 두루 체험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격만이 아니라 영으로서 하느님을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 우주와 인간 그리고 인간적 가치를 지속시키는 과정이자 에너지로서 ‘되어감’의 하느님을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프는 애니미즘(정령주의)과 샤마니즘을 영을 이해함에 있어 기초개념으로 설정했다. 실재를 에너지(과정)으로 해석하는 우주에 대한 옛 버전이라 여긴 것이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루아흐(야웨의 영)’도 이점에서 동일하다. 성서의 오랜 전승에서는 결코 영들 간의 차이를 말하지 않았다. 이런 ‘루아흐’가 신적 실재를 이해하는 발판이었다. 신적 생기,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 이것들이 바로 하느님 실재의 표현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에너지로 보는 현대우주론과도 이점에서 의미 상통한다.

이후 신약시대의 ‘프뉴마’ 중세의 ‘스피리투스’ 등도- 물론 성(性)은 달랐으나 자연의 기본 힘이란 점에서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 우주론에서 우주는 물질 그 자체는 없고 물질로 되어가는 에너지뿐이란 점에서 영과 유사성이 크다. 불교의 연기론 역시 이점에서 현대 우주론과 의미 상 중첩되는 부분이 많고 크다. 이 경우 연기설은 영(靈)의 철학적, 개념적 이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영(靈)은 현대 과학에 있어서도 핵심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원초적 에너지를 의식할 수 있는 우주 내의 특별한 존재이다. 인간 속에 이런 원초적 에너지(영)을 소유했기에 그렇다.

최초 우주 속에 있었던 영이 우리들 인간 안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우주의 영과 인간의 영간에는 어떤 질적 차이도 없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 내 존재 일체는 영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우주의 복잡성이 인간 의식을 출현시킨 것이다. 참고로 인간은 우주의 99.6%가 생겨난 이후에 출현한 종(種)인 것을 기억해야 옳다.

4.

이런 영(靈)을 모든 문화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해했고 개념화했다. 하느님 역시 영의 영역 속에서만 이해되었던 것이다. 인간의식의 산물들인 시, 예술 등도 모두 영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 유대교라는 특별한 역사적 정황에서 이런 영을 인격화시키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그로써 영이 하느님(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영’으로 고백되었다. 영이 특별히 거룩한 영으로서 하느님이 된 것이다.

주지하듯 ‘거룩’은 유대인들이 칭하는 하느님 언어였다. 이때부터 하느님은 거룩한 영(靈)으로 분별되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거룩한 존재이기에 그 속의 영 또한 거룩한 영, 곧 성령(聖靈)이 된 것이다. 바로 신약성서는 이런 거룩한 영을 성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보프는 여기서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마리아에게 임재 한 하느님 영에 주목한다. 마리아 태중의 아기는 거룩한 영(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우주 시작부터 활동한 우주적 힘으로서의 하느님(聖父)이 이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믿었다.

성부의 아들로서 예수는 자신을 당대 비참한 현실에서 특별히 죄인(암하레츠)들을 위한 존재라 여겼다. 자신 속 거룩한 에너지를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보프는 여기서 성령과 여성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하며 이를 이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영성을 크게 주목하는 근거로 삼았다. 성령을 받은 여신이 마리아라는 여인이었던 것을 주목한 것이다. 두려움에 흩어진 제자들을 공동체(교회)로 엮어 낸 것도 오순절 성령의 작용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시작이었을 뿐 끝이 아니었다. 이 영은 이제 오순절사건을 무한 확대 시켰다. 유대인 이방인 구별을 무화시켰고 빈부 차를 없앴으며 체제 밖 사유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신적 에너지를 받은 예수로부터 온 영(靈)이 여타와 구별되는 성령이란 사실이다.

5.

성령인 하느님을 삼위일체 신론으로 전개시킨 것이 2천년 기독교 역사이다. 이 과정에서 성령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는가, 예수에게서 비롯했는가를 묻는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동/서방 기독교가 갈라졌었다. 우여곡절 있었으나 태초부터 진화하는 과정(靈)으로서의 하느님을 일치 속의 다양성, 곧 삼위일체의 틀거지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창조 영이신 하느님과 그 영의 온전한 드러남인 예수 그리고 이들로부터 나와 지금도 진화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성령이 각기 다르나 하나라는 생각이 기독교 고유한 신학전통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성령론을 다른 두 인격보다 약화시켰고 간과한 측면이 컸다. 희랍신학 전통과 라틴 신학 전통에서 성령을 이해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상호 많이 달랐던 것이다. 전자는 하느님 안(內)의 세 인격을 말했고 후자는 세 인격들 속에 한 하느님이 있다고 했던 탓이다. 앞의 것이 하느님 인격 개념에서 본성을 이해한 반면 나중 것은 하나의 본성이 세 인격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자는 인격이신 하느님이 강조됨으로써 성자, 성령이 그에 종속될 위험을 남겼고 나중 것은 3신론(양태론)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희랍신학은 ‘신비적 명상’, 제의를 발전시켰고 라틴 신학은 철학적 사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에 역점을 두었다.

여하튼 희랍신학자들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 하느님에게서 비롯했음을 강조했고 라틴신학에서는 성령이 성자를 통해서 성부로부터 온 것을 역설했던 바(필리오케 논쟁) 이로써 동/서방 교회가 분리되었다. 이런 필리오케 논쟁의 핵심은 결국 성령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산물로 보는가에 대한 논쟁으로서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다. 靈이 본래 신적인 것(하느님)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 인격은 저마다 타자 속에 머물며 타자들과 함께 하나(pericoresis)로만 존재한다. 이들 간에 어떤 위계도 인과도 없다.

6.

몇 차례 언급했듯이 보프 신부의 성령론이 특히 강조하는 바는 영이 마리아에게 임했다는 누가의 증언이다. 성령의 도래가 마리아의 수용을 통해서 가능했고 성령과 그녀가 동일시됨으로써 그녀에 의해 성자 예수가 태어난 까닭이다. 이는 성령에 대한 강조인 바, 기독론 중심의 서구 신학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마리아 역할은 어머니 하느님의 모습을 적시한다. 하지만 이 같은 마리아의 靈化(성령화)는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성과 여성 속의 여성적 측면(아니마)이 본 사건을 통해 성령에 감동, 작동되어야 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여성(마리아)의 본성(아니마) 속에 성령이 도래했다는 것, 이것이 다른 신학자들과 견줘 보프의 탁견이라 해도 좋겠다.

7.

이제 본 책 후반에 이르러 보프는 현대 우주론을 성령의 시각에서 구체화시켰다. 우주를 성령이 활동하는 장(場)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현대과학이 밝힌 우주와 성령의 관계를 밝히려는 것이다. 우주의 성령론적 생태학적 이해라 명할 수 있다.

주지하듯 우주는 빅뱅(Big Bang)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팽창되어 복잡화 과정을 겪는다. 외적인 복잡성과 함께 내면적으로는 주체적 의식을 잉태했다. 우주와 인간 내면이 상호적이란 의미이다. 두뇌와 마음이 상호적이듯 말이다.

▲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 ⓒGetty Image

현대 과학자들은 태초가 있기 전 무엇인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를 연상시키는 바, 모든 가능성들의 충만함이자 원초적 심층 에너지로서 ’양자 진공‘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성적 심연으로부터 에너지가 출현하여 폭발했고(빅뱅) 질량 없는 순수 에너지(쿼크 등)가 생겨났다.

통상적으로 질량 없는 물질이란 존재치 않는 법이다. 하지만 2012년 소립자라 불리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우주를 가득채운 에너지에 질량을 부여하여 물질로 전환시켜 지속적으로 우주를 창조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느님 입자‘라 할 것인 바, 그것이 모든 창조의 수단이 된 것이다.

이들 활동으로 우주 내 시공(時空)이 탄생되었고, 그 속에 물질이 채워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붉은 별들이 만들어져 40억년동안 타면서 우주 내 수소와 헬륨을 소비했고 다수의 물리화학적 원소들을 생산했다. 이들이 농축되어 수십 억 개의 은하수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수십 억 개의 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듯 우주 속에서 일체의 것들은 근본적 하나에 의해서 연결된 존재들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론적이고 생태적인 우주의 실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일체가 관계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8.

위 사실을 좀 더 논해 보겠다. 이런 우주 내에는 구심력과 원심력, 곧 응축과 팽창이라는 힘이 공존하는 바, 이 두 힘 덕택에 우주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들이 상호 제한하며 균형을 이룬 결과가 지금의 우주란 것이다. 이를 일컬어 ‘질서 있는 팽창’이라 불러도 좋겠다. 우주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응축과 팽창의 균형(조화)의 결과로서 지속된 창조라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우주는 복잡성의 단계에서 생명과 의식을 창출하도록 정위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주는 지금 태초의 영과 더불어 상호 연계되어 더 높은 복잡화 과정을 만들고 있다. 이런 우주 생성의 원리를 다음 세 개념 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복잡성과 분화 둘째는 내면성과 주체성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상호관계성과 연결. 만약 복잡성(분화)이 없었다면 우주는 단조롭게 되어 붕괴되었을 것이며 우주가 내면성을 얻지 못했을 경우 무(無)활성적 죽은 공간으로 변했을 것이며 이들 간의 내적 연관성이 없었다면 고립된 단일체로 그 운명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진화가 우발적이지 않고 복잡성과 상호 관계에 의해 창출된 것임을 반증한다. 우주 만물을 일정한 방향-새 하늘과 새 땅-으로 추동하는 일종의 유인자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 셋을 일컬어 저마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라 명해도 좋겠다.

이런 정황에서 지구는 결코 죽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 에너지를 갖고 움직이는 살아있는 생명체(가이아)인 것이 분명하다. 하느님이 만물 속에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의식을 지닌 인간은 거대한 우주 공동체의 일부이자 우주 생성과정의 정점이기도 하다. 의식을 통해서 우주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까닭이다.

9.

이제 마지막으로 교회와 우리들 삶의 문제를 다뤄야겠다. 교회가 오순절 사건 이후 태동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 공동체을 조직하는 원리이다.

교회가 위계적이고 자폐 증세를 보이면 억압의 도구가 된다(영적 파산). 약자를 위한 예수, 정의를 위해 싸웠던 예수를 따르는 일과 함께 생태적 파괴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탄식하는 자연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가난한 자’ 된 탓이다. 이를 위해 은사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대교회가 획일화를 거부하고 해석의 다양성을 강조한 공동체였음을 기억할 일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작은 교회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하길 바란다. 우리 시대에 회자되는 영성이란 말은 결국 하느님 영이 활동하는 방식이라 해도 좋다. 하느님 영이란 모든 것에 영향을 불러일으키며 에너지를 쏟아 붓는 존재인 까닭이다. 복잡성, 다양성, 그리고 관계성을 만들면서 말이다.

필자는 이를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영성으로서 ‘풍류’란 말로도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에 있던 태초의 道가 바로 그것인 탓이다.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의당 인간의 기본조건을 위해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영이 생명인 탓이다.

자연을 살리는 삶을 택하는 것도 영적인 삶의 구체적 모습이다. 비인간적, 반(反)생태적 삶의 구조와 싸우는 것이 생명의 영인 성령을 따른 삶의 구체적 실상이다. 악한 사회를 영속시키는 것이 육에 따른 삶인 것을 명심할 일이다. 결국 성령 안에 사는 삶은 경계 없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으로서 자유의 길일 것이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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