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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 신앙의 함정(민21:4-9; 엡2:1-10;요 3:14-21)

기사승인 2018.03.17  23: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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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맹목적 대속신앙의 나쁜 예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저는 매우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목사입니다. 이는 제가 예수의 말씀과 그 뜻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진보가 무조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할아버지의 할머니께서 첫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그러니까 따지면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배우며 자라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 안에 소위 요즘 말하는 진보적인 신앙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제게 오늘 하늘뜻펴기 본문 말씀 선택권이 있었다면 오늘의 본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들은 개인 구원에 관련한 교리적인 말씀들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보수 성향의 목사님들이 즐겨하는 성서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은 에베소서 2장의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입니다. 이를 보안하는 말씀으로 민수기와 요한복음의 두 본문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모세의 영도아래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은 광야 40년 생활로 들어갑니다. 곧장 걸어가면 며칠이면 통과할 시나이반도를 그 안에서 계속 돌고 돌아 40년을 머문다는 것을 문자로 이해하여서는 안됩니다. 히브리어로 ‘므드바르’(광야)라는 단어가 ‘신의 말씀 능력이 펼쳐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말해주듯이 히브리 노예들이 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양육받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장소이지만, 육적으로는 문명의 혜택이 전연 없는 고난의 땅입니다. 그래 히브린인들은 광야에서 계속 불평을 합니다. 마실 물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 야채가 먹고 싶다. 그러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반항을 합니다. 자유인으로서의 누리는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의 육신의 1차적인 욕망 충족을 위해 노예생활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뱀과 성서 이야기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태도는 매우 어리석게 보이지만, 어찌 보면 우리 또한 비슷한 태도를 가질 때가 많이 있지요? 미래가 새로움을 향한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는 보장되어 있지 않기에 불안합니다. 그래 불안한 미래를 향해 지금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보다는 현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불평하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하느님은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 심판을 합니다. 노예생활이 힘들고 괴로워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쳐서 기껏 구원해 주었더니 먹는게 좀 부실하다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내가 신이라고 해도 화가 날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자, 이제는 잘못했다고 빕니다. 모세가 야훼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느님은 모세로 하여금 불뱀이 새겨진 지팡이를 만들어 이를 들어 올려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 고침을 받게 합니다.

이 구절은 그냥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저는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질문이 생깁니다. 우선 지팡이에 새기는 형상이 왜 뱀이냐 하는 것이지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에덴동산의 선악과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한 동물이 바로 뱀입니다. 곧 사탄의 상징입니다. 불뱀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이를 치유하게 하는 형상이 또 뱀이냐는 것입니다. 병주고 약주기인가요?

뱀이 아닌 다른 동물, 예를 들면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형상을 만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십계명에서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해 놓고 뱀의 형상을 만들도록 했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열 번 절을 하면 낫게 한다든지 혹은 십계명의 말씀을 암송하게 한다든지 하는 치료법을 주는 것이 십계명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이지 않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꼭 형상을 만들어야만 치유가 가능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즈기야 왕 시절 나라 안에 우상 신들을 제거하는 신앙정화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때 산당들과 아세라를 비롯한 신의 형상들을 없애는데, 이때 모세의 구리뱀을 부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이 광야  사건 이후 수백년동안 이 구리뱀이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치료 우상이 되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군의관의 군장에 보면 한쪽에는 계급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지팡이를 휘감고 올라가는 두 마리의 뱀 형상이 새긴 견장을 달고 있습니다. 이는 미군들의 견장을 본딴 것인데,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우상숭배의 냄새가 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형상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신전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 인간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자 동시에 치유를 상징하는 일종의 우상 신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었다는 이 구절은 종교사학적으로 말하면 유대교가 주위의 우상숭배 사상을 도입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것이었다면 히즈기야 왕 때 이를 제거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뱀의 지혜를 에덴동산에서의 뱀의 간교함으로 이해할 수는 없으니 저는 뱀의 중요한 특성인 허물벗기에 빗된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곧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진취성으로 이해합니다.

정리하면 히브리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진노를 사 뱀으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받고 뱀의 형상을 쳐다봄으로 고침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나 요한복음은 이 얘기를 통해 예수가 세상 구원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곧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무조건 고침을 받았듯이, 십자가 위에 높이 올려진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 말씀은 잘못하면 쳐다보기만 해라 곧 믿기만 해라, 예수 이름만 외쳐라. 그러면 구원은 떼놓은 당상이다. 이런 뜻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이런 유의 교리적인 말씀은 하나의 보조이지 주류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계속 강조하시는 것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너라.’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선한 행실의 열매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예수님의 대부분의 말씀과 비유들은 ‘은총에 의한 무조건 구원’이라는 교리보다는 ‘구원받은 자의 삶의 열매’가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대속(代贖) 신앙의 근본 정신

그런데 이 은총 구원의 가르침은 본래 제1 성서의 하박국 예언자가 강하게 외쳤습니다. ‘의인은 오직 하느님의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바울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 기초한 유대교가 지나치게 율법 지키는 일을 강조하다보니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의 영역은 사라지고 모두 인간의 공로로 치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바울 자신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그렇지 못한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죄성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로마서 7장의 매우 유명한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저 또한 사도 바울의 이 고백에 백 퍼센트 동조합니다. 내 안의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이성의 법과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나를 사로잡는 내 육체의 죄의 법이 있다는 것을... 이는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고 하는 이원론에 빠져 현실도피 신앙으로 쉽게 빠져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육체 안의 죄성을 고백했지만, 죄의 법에 굴복당한 패배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강함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할 줄 아는 영성의 힘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또한 바울과 같이 내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구원을 대속(代贖) 신앙의 입장에서 이해합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피로 대신 씻어주심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우리가 빠져들기 쉬운 신앙의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고민 끝에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감옥으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살인범이 말하기를 감옥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고, 그때 나의 모든 죄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여주인공은 깊은 고민에 빠지고 그리고 신을 향해 저항합니다. 어떻게 당신은 나의 동의도 없이 나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가해자가 희생자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는 대신에 예수 십자가의 피에 의지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용서받았다는 일에 대해 동의하시나요? 여러분이 가해자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희생자라면 입장이 달라지겠지요? 위안부 문제, 희생자 동의 없이 한일 간에 두 정상이 만나 돈을 받고 서명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대속 신앙이 갖는 함정입니다.

대속신앙의 위험성

대속(代贖)의 반대말은 자속(自贖)입니다.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 스스로 속죄의 제물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만약 나쁜 행위에 대한 죄의 값을 치루지 않고 그냥 말로 다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 죄의 행위는 결코 줄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은총이라는 대속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죄의식이 점점 사라집니다.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식당에 가서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기가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사람의 지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 대신 밥값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밥값 내는 것이 아까워집니다. 목사와 신문기자와 경찰서장과 세무서장이 함께 밥을 먹었는데, 누가 밥값을 지불했을까요?

제1성서에서 예언자들이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죄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믿음에 따르면 성전에 가서 희생제물을 드리면 되니까요. 죄의 크기에 따라 양을 드릴 것인지 소를 드릴 것인지만 결정하면 되었지 죄 자체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이 높습니다. 신자들과 비신자들의 구별이 별로 없습니다. 저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뇌물을 주어도 받지 않아. 그런 얘기 들어본 적이 있나요? 어느 회사나 기관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더 청렴한 사람들이기에 재정을 맡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신자 비신자의 구별은 단지 일요일 교회에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혹은 밥 먹을 때,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이외에 또 어떤 차이가 있나요?

요즘 이명박 씨의 비리 문제가 붉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14범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검찰은 100억 뇌물을 얘기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는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이고 포스코의 유령회사 투자를 비롯한 해외투자, 사대강 사업 등등 엄청난 비리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남한의 내노라하는 초대형 교회 장로잖아요. 선거할 때, 그는 장로이기에 청렴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표를 찍어준 사람도 많았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의 대조되는 두 발언

▲ 부시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 맹목적 대속신앙으로 무장한 수구 보수 기독교의 민낯. ⓒ월간 조선

페이스북에 국가조찬 기도회에 관련한 글들이 많이 떴습니다. 내용인즉 당일 설교한 소강석이라는 목사와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소 목사의 설교는 성경 구절을 들먹이긴 했지만, 정치적 언사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춘다.”는 말씀과 이사야 32:17의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를 언급하면서 그가 말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잘못된 적폐를 고쳐야 합니다. 긴 세월, 사회 곳곳에 누적된 병폐와 부정부패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적폐청산이 또 다른 적폐를 낳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지 1년이 되었지만, 적폐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반해 이분은 지나친 적폐청산으로 인해 잔인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 목사는 박근혜 씨를 비롯한 몇 명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 같고 무슨 잔인한 정치 보복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박근혜씨를 감옥에 넣은 것은 촛불 국민이지 문 대통령이 아닙니다. 이분은 번지수를 잘못 잡았을 뿐더러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을 혼동하고 있고, 사랑과 죄의 은폐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언도 했습니다. “정부는 교회의 고유영역을 침범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오히려 교회의 역할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도록 교회 생태계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난 생태계 운운하기에 무슨 생명환경 문제에 관련하여 교회의 책임을 얘기하나 생각했는데, 그 이어지는 말은 동성애관련 발언이었습니다. “성적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이나 개헌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모순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난 이렇게 무식한 발언은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이 분의 논리는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기독교인들이 역차별 당한다는 것입니다. 별 해괴한 논리가 다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덕담 얘기를 하더니만,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울러 대통령님께서 가까운 날에 아랍을 순방하신다면 그곳에 가셔서 나라의 경제를 위하여 신원전 수주까지 많이 받아 오시길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아니, 생태계라는 말은 본래 자연생태계를 말하는 것인데, 엉뚱하게 교회에다 생태계를 갖다 붙이더니만,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원전수주를 운운거리다니... 그것도 후쿠시마핵원전폭발 7주기를 맞이하는 탈핵주일에... 게다가 탈핵을 국정운영의 중요한 의제로 삼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원전수주를 요청하다니 도대체가 낯짝이 두꺼워도 이렇게 두꺼운 목사가 있을 수 있고, 목사 이전에 이렇게 몰상식한 인간이 있을 수 있는지 정말이지 해도해도 너무 했습니다.

이분이 과거 목회자 세금 대책위원장 시절에 “국세청 세무조사에 대비하기 위해 교회가 이중장부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한 수준 이하의 사람이니 전연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무례하고 수준 이하의 발언을 하는 목사가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국가조찬기도회에 설교자가 되었다니 한국교회 전체가 정말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이 소목사는 2년 전 이미 박근혜가 참여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미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무슨 문학상도 받고 그래서 대형교회 목사 중에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해서 또 내세운 것입니다. 남한교회의 수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래도 공부도 하고 나이도 제법 있는 목사가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수준이하의 발언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을 가르치는 설교를 계속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인화’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인데, 이 자기 의인화라는 착각은 바로 자기 죄는 모두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에 의해 용서받았다고 하는 대속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문 대통령은 50주년을 맞은 국가조찬기도회를 언급하며 “성경에서 희년은 죄인과 노예, 빚진 사람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해방과 안식의 해였습니다. 약자는 속박으로부터, 강자는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경계와 벽을 허무는 포용과 화합의 정신이 희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희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을 다짐하는 기도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국교회는 불평등과 억압으로부터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숭고한 여정의 길에 참으로 큰 힘이 되었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꺼지지 않는 촛불이 돼 공의를 선포하고 실천해 왔습니다. 또, 기독교는 대한민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투운동과 여성인권을 언급했는데, 그 방식이 또한 특이했습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특히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성장에는 여성들의 기도와 눈물이 녹아 있습니다. 가장 약하고 낮은 곳으로 향했던 이분들의 사랑이 기독교 정신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이었습니다. 조수옥 전도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평양형무소에서 만난 아이들이 눈에 밟혀 자신의 쇠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1946년 9월 고아원인 마산 인애원을 세웠습니다. 그 후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병든 자의 의사, 문맹 퇴치 선봉자이자 ‘우리들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1950년 순교하기까지 생명을 다해 이웃을 사랑한 흔적들이 전남 신안군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 땅의 여성들은 정말 강합니다. 신앙과 사랑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요즘,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여성들의 차별과 아픔에 대해 다시 한 번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통 받은 미투 운동 피해자들에게 따뜻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언급했습니다.

“이제 한 고비를 넘었습니다만,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고비들이 많습니다. 오랜 반목과 갈등으로 인해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함께 손잡고, 북한과 대화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초석을 놓겠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포용하고 화합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께서 우리나라와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제 내일부터 열흘간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개최됩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오직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선수들입니다. 뜨거운 박수로 응원해 주십시오. 전 세계의 장애인 선수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평창이 가장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제가 길게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저는 종교인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비판적 지지자입니다. 남북대화에 소극적이라 작년 추석 선물은 거절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설 선물은 기쁘게 받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희년정신과 한반도 평화와 민족자주와 미투운동과 여성인권과 패럴림픽 장애인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생명평화정의의 이슈를 골고루 다루었습니다. 지금 SNS상에는 소목사와 문대통령의 발언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저는 국가조찬기도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청와대가 앞으로 계속하겠다고 한다면 교회가 크든 작든 국민들의 일반 정서에 맞는 목사를 초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서 구원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임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강조하는 말씀은 “우리는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품은 희랍어 원어로 보면 매스터피스, 걸작품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걸작품으로서 하느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입으로 외치는 자기 의인됨이 아닌 행동하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불뱀 #대속신앙 #국가조찬기도회 #하느님의 작품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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